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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버, 그리고 톰보이를 대하는 한국 사회의 시선

  • 박수진
  • 입력 2016.03.27 12:19
  • 수정 2016.03.27 12:21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돌이켜보면 한국 대중음악계에 ‘톰보이’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최근 엠버를 대하는 한국 사회의 시선은 이선희와 이상은을 경험한 나라치곤 폭력적이기 짝이 없다.

1940년대 이전만 하더라도 분홍색은 금남의 색깔이 아니었다. 프랑스 작가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는 자신의 저서 <내 방 여행하는 법>(1794)에서 방 분위기를 개선하고 싶은 남자들에게 방을 분홍색으로 칠하라 권했다. 결투를 벌이다가 체포되어 42일간의 가택연금형을 받은 혈기방장한 스물일곱 청년이 남자들에게 자신있게 추천한 색깔이 분홍색이었던 것이다. 분홍색에 젠더 구분이 붙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이었는데, 심지어 처음엔 남성적인 색깔로 여겨졌다. 1918년 미국의 어린이 패션지 <언쇼스 인펀츠 디파트먼트>(Earnshaw’s Infants’ Department)에 실린 설명을 보자. “단호하고 더 힘찬 색인 분홍색이 남자아이에게 더 적합한 반면 여자아이들은 섬세하고 앙증맞은 색인 푸른색을 입었을 때 더 예뻐 보입니다.” 분홍색이 여성적인 색깔 취급을 받기 시작한 역사가 채 100년이 안 된다는 뜻이다.

제법 최근까지 남자가 귀를 뚫고 다니는 건 망측한 일 취급을 당했는데, 이 풍조도 사실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니다. 삼국시대와 고려를 거쳐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랫동안 귀고리는 성별의 구분 없이 폭넓게 사랑받았다. 한반도의 남자들 사이에서 귀고리 문화가 한풀 꺾인 건 1572년 선조가 ‘신체발부수지부모’를 언급하며 귀고리 금지령을 내린 이후였다. 귀고리 금지령도 단번에 약발이 들진 않았다. 금지령을 내린 지 25년 뒤인 1597년, 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병된 명군 경리 양호가 “조선 군대가 전공을 부풀리기 위해 함부로 조선 사람을 죽이고는 왜적으로 꾸미는 일이 있다”고 추궁하자 접반사(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벼슬) 이덕형은 귀고리 구멍 흔적의 유무로 왜적과 조선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고 답했다. 당대 조선 남자들 사이에선 귀를 뚫는 게 왕명으로도 잠재우기 어려운 압도적인 유행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갑자기 분홍색이나 귀고리 이야기를 꺼낸 건 ‘남자다움’이나 ‘여자다움’을 규정하는 것들의 역사가 의외로 그리 길지 않으며, 그조차도 자연스러운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이런저런 이유로 수차례 인위적으로 바뀌어 왔음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복식이나 액세서리, 색깔과 취향 등의 기준으로 특정 성별을 규정하려는 움직임이란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그럼에도 새로운 상품이나 유행이 등장할 때마다 세상은 그것이 남성적인지 여성적인지를 굳이 따지고, 그 기준에 맞춰 굳이 자신의 남성성/여성성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않는 사람들은 성적 지향을 의심당하는 일도 심심찮게 겪는다. “혹시 성향이 그런 쪽은 아니죠?”라는 질문 뒤에는 ‘게이/레즈비언도 아닌데 왜 여자/남자같이 구느냐’는 물음, 왜 암묵적인 규범을 따르지 않느냐는 추궁이 숨어 있는 것이다. 말투나 행동양식, 옷 입는 취향 따위가 성적 지향, 성 정체성과 세트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사람들의 무지는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장삼이사들은 그래도 눈초리를 덜 받는 편이다. 대중 앞에서 어떠한 역할 모델이 되기를 강요받는 연예인들의 경우엔 세상의 시선을 피하는 게 더 어렵다. f(x)(에프엑스)의 ‘엠버’는 동시대 한국 걸그룹에선 쉽게 찾아보기 어려웠던 톰보이(중성적이고 활달한 여성) 캐릭터로 많은 여성 팬들을 사로잡았지만, 동시에 데뷔하자마자 그를 ‘남장 여자’라는 키워드로 수식하는 사람들과도 마주해야 했다. 2009년 한국방송 <개그콘서트>에서 ‘왕비호’ 캐릭터로 활동하던 윤형빈은 엠버를 두고 “걸그룹이라더니 남자가 있다. 하리수 같은 애”라고 이야기했다. 비록 방송 후 많은 시청자들로부터 엠버와 하리수 모두에게 결례라는 비판을 받긴 했지만, 그런 농담이 피디의 사전 검사에서 걸러지지도 편집 과정에서 탈락하지도 않았다는 건 사람들의 편견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돌이켜보면 엠버가 한국 대중음악계에 처음 등장한 톰보이 캐릭터인 것도 아니었다. 통기타와 포크, 청바지의 시대였던 1970년대 양희은은 흰 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기타를 쳤고, 뮤지컬에서 치마를 입은 것이 언론에 대서특필 될 정도로 바지를 고수했던 이선희는 ‘언니부대’를 이끌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했다. ‘담다디’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던 이상은 또한 큰 키와 짧은 머리, 청바지 차림으로 여성 팬들을 사로잡았다. 너무 오랜 시간 연약하거나 앙증맞은 이미지로 대중을 상대하는 걸그룹들에만 익숙해져서 그런 걸까? 엠버를 대하는 한국 사회의 시선은 이선희와 이상은을 경험한 나라치곤 폭력적이기 짝이 없었다. 물론 1980년대는 세계적으로 톰보이 열풍이 불던 시기였다는 점도 고려해야 하겠지만, 시대가 지나 유행이 바뀌었다고 해서 타인의 취향이나 옷차림 따위를 지적하며 ‘모범적인’ 여성상 혹은 남성상 안에 상대를 가두려 하는 시도가 정당화되는 건 아니다.

엠버는 이런 세상의 편견에 꾸준히 반문해왔다. 2015년 2월 발표한 솔로 앨범 <뷰티풀>에 수록된 타이틀곡 ‘셰이크 댓 브라스’의 뮤직비디오 또한 친구들과 떠들썩하게 놀고 농구를 즐기는 모습을 담았으며, 동명의 자작곡 ‘뷰티풀’에서는 “날카로운 말들이 내 맘을 깊이 베”어 세상은 “좁은 새장 같”지만, 자신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될 것이며, 자신이 자신일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노래했다. 같은 해 7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에서는 메시지가 한결 더 선명해졌다. “전 여자와 남자가 어떤 한 가지 외양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름다움이란 모든 형태와 크기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모두 다르지요. 만약 우리가 다 같은 멜로디로 노래한다면 어떻게 하모니가 존재할 수 있을까요?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아주세요. 우리 모두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면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싫어하는 사람들은 계속 싫어할 테지만, 자기 면전에서 자신을 모독하는 건 전혀 다른 일이라 한가지 분명히 해 둬야겠다는 말로 시작한 이 정중한 글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언제나 자기 자신이 되세요. 자기 자신에게 진정 진실하게 사는 것이 스스로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입니다.”

I never want to be forceful but there comes a time where i need to put my foot down on something i strongly believe in. Due to recent events i want to address something: I've been a tomboy pretty much all my life and honestly, to put it short, it really sucks sometimes. Haters can and will hate, but insulting me in front my face is totally different thing. I personally believe girls and boys are not limited to one specific look. Beauty comes in all shapes and sizes. We are all different. If we all sang the same melody how can there be harmony? Dont judge someone just because they're different. Hopefully we can all grow to respect each other's differences. Im always trying to stay positive and happy. I love my life, my work, and the people who are constantly supporting me. I am always thankful because i know i cant be here on my own strength. With every mistake, i analyze my fault and then try to better myself. I know i can't be perfect but i will always try to be my best. In regards to that, i want thank everyone again for constantly encouraging me and believing in me. To put it simply, love and help one another. And for people who are struggling, always be yourself. Being true and real to who you are is the biggest thing you can do for yourself. Love life, work hard, and chase your dreams. Thank you again.

A photo posted by Amber J. Liu (@ajol_llama) on

지난 3월24일 공개된 솔로 음원 ‘보더스’(경계)에서도 그는 같은 이야기를 한다. 1절에서 엠버는 세상의 손가락질에 괴로워한다. “여기 모두가 날 바라보며 고개를 젓네. 내가 뭐가 문제인 걸까… (중략) 저들이 말하는 ‘완벽’에 가닿을 수 있다면 뭐든 할 거야. 그럼 어쩌면 내가 속할 곳도 찾을 수 있겠지.” 그러나 바로 다음 소절에서부터, 그는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고 다른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하지만 만약 내가 충분히 강하다면, 눈을 발치에 두고 묵묵히 걸어갈 텐데. 왜냐하면 엄마가 말했거든. 경계를 넘을 때 궁지에 몰리더라도 결코 두려워하지 말라고. 똑바로 서서 너의 길을 위해 싸우라고. 일어서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 나를 짓누르는 압박에 맞서서.” 그러고는 세상을 향해 말한다. “흉내내지 않을 거야. 훨씬 더 많은 것들이 앞에 있으니까.” 솔로로 곡을 발표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엠버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꺼내며 세상의 부당한 편견에 맞서고 지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그 메시지는 이제 엠버 본인만이 아니라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괴로워하는 이들 모두의 것이 되었다. 엠넷 <4가지 쇼>에 출연했을 때 엠버는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에 가수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거예요. 음악으로. 자기가 왕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마음이 아픈 사람들. 이겨낼 수 있어요.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요. ‘엠버도 이겨냈으니 당신도 이겨낼 수 있어요’ 그런 말을 해주고 싶어요.” 수많은 기준으로 타인의 삶을 재단하고 손가락질하기 좋아하는 세상에, 그 편견은 부당한 것이며 아름다움은 모든 형태와 크기로부터 오기에 더 이상 남들이 바라는 모습을 흉내내지 않을 거란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는 것을 소명으로 삼은 가수가 송곳처럼 뚫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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