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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를 죽여야 한다

'개인'이 없는 '우리'의 나라에 산다는 것. 단순히 나는 노래방 가기 싫은데 다 같이 가자고 하니까 따라가야 하는 수준의 불편함만 유발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집단주의적 광기가 개인의 삶을 철저히 비참하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든다.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집단주의 정서는 개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을 집단의 '기준'에 맞추도록 강요한다. 내 가치, 내 주관에 따라 행동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만든 가치, 남들이 만든 주관에 따라 살도록 만든다는 말이다. 개인은 이 소셜스탠다드(사회적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친다. 장래희망이 무엇이건 대학에 가야 하고, 하고 싶은 게 무엇이건 가급적 많이들 선호하는 그런 직장에 자리를 잡고, 서른줄 되면 연인이 있건 없건 결혼을 준비해야 하고 등등.

ⓒGettyimage/이매진스

글 | 우원재

헬조선을 둘러싼 아우성

여기저기서 아우성이다. 힘들다고 난리다. 한국에서 먹고사는 게 지옥같다고 한다. 그래서 '헬조선'이란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사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의구심이 든다. GDP 세계 11위에, 1인당 GDP가 3만 달러를 향해 가고 있는 경제선진국에 살고있는데 먹고사는 생활이 힘들다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고, 헬조선이라는 절망적인 표현이 유행어가 되다니.

이렇게 헬조선을 부정하면 갖가지 반론이 나온다. 생계유지가 어려워 동반자살한 가족에 대한 기사, 취업이 힘들어 극단으로 내몰린 청년들에 관한 기사,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독거노인 문제를 다룬 기사 등 어려운 경제에 의해 이 나라를 지옥으로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많음을 증명할 데이터가 수백, 수천 개는 더 된다. 실제로 한국이 지옥인 것처럼 느껴지게 하는 부정적인 뉴스들이 차고넘치고, 사람들은 거기에 환호한다. 그래도 아직 먹고 살 만한 나라임을 보여주는 긍정적인 데이터나 뉴스는 저 말이 진짜인가 오히려 의심이 들 정도다. 한국이 지옥이라며, 헬조선 헬조선 거리는 건 이제 일종의 유희문화가 되어버렸고 그래서 이 놀이에 찬물을 끼얹는 사람은 질타의 대상이 된다.

물론 한국 경제전망이 좋지는 않다. 이를 부정하지는 않겠다. 오랜 저성장과 경기침체를 겪고 있고, 부의 격차는 심해져만 가는데 계층이동은 점점 어려워져가고 있고, 왜곡된 노동시장과 같은 문제들 때문에 이를 당장 뜯어고치지 않으면 더 암울한 미래가 다가올 예정이다. 지금 현재도 힘들고 어렵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앞으로 어떡할지 걱정이다. 참 우울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제적 문제 때문에 한국이 지옥이라고 말하는 건, 시쳇말로 '오버'다.

까놓고 한 번 얘기해보자. 먹고 살기가 어려워 이 한국이 지옥 같다면, 전 세계 229개 국가 중 지옥이 아닌 국가가 몇이나 되는가? 아니, 한국보다 '덜' 지옥 같은 나라는 얼마나 되는가? 솔직히 말해서 한국에서 태어난 건 비교적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229개 국가 중 적어도 20위 안에는 들어가는 G20 국가이니 어쨌든 한국인은 인생게임에서 1/10의 대박확률에 당첨된 셈이다.

자 이제 이 글을 읽는 것이 매우 불편해진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신경 안 쓴다. (구독자 수 떨어지는 건 디스라이크 편집장이 신경쓸 문제다) 원래 도그마를 깨는 건 어려운 일이다.

헬조선을 만드는 진짜 원인?

굳이 이렇게까지 강경한 어조로 이른바 '헬조선 론'을 부정한 이유가 있다. 경제와 관련된 객관적 지표를 들이대며 한국이 지옥이니 아니니 하는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논쟁에 의해 헬조선을 만드는 '진짜 원인'이 수면 아래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경제는 한국을 지옥으로 만드는 핵심요인이 아니다. 물론 암울한 경제상황이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간접적 요소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다만 직접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살률을 생각해보자. 한국 자살률이 OECD 자살률 몇년째 1위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밑에 보면 한국보다 잘 사는 나라로 알려져 있는 핀란드, 프랑스, 뉴질랜드 등이 있다. 핀란드는 북유럽 최대의 복지국가고 프랑스는 서유럽 최고의 사회보장제도를 갖추고 있다. 뉴질랜드 역시 흔히 '살기 좋은 나라'로 손꼽히는 곳중 하나고. 자살률이 그 국가의 국민들이 얼마나 '불행한가'를 보여주는 척도 중 하나라면, 국민들의 행복수준은 그 나라의 경제적 여건에 아주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생각해보면 방글라데시가 행복지수 1위 국가라는 말, 다들 한 번쯤은 들어보지 않았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라고 반드시 국민들이 행복을 덜 느끼는 것도 아니고, 그 반대로 부유한 나라에 산다고 국민들이 더 행복한 것도 아니다. 경제 데이터만 놓고 보면 한국보다 훨씬 더 지옥 같아야 할 나라가 백 몇십여개나 있지만, 정작 한국인처럼 이렇게 적극적으로 불행하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애당초 '삶의 질'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다. 그러니 자꾸 경제침체가 어쩌고 저쩌고, 복지가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이상한 방향으로 빠지지 말자. 좌우로 갈려 치열하게 치고박는 경제관련 논의는 어차피 답도 안 나온다.

결국 행복한 나라와 불행한 나라, 천국 같은 나라와 지옥 같은 나라는 국민들이 어떤 보편적 주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멘탈리티'의 문제라는 말이다. 여기서 한국을 '헬조선'으로 만드는 '진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보편적 정서, 문화, 분위기 등 한국인의 보편적 멘탈리티를 구성하는 갖가지 정서들이 한국인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집단주의 : 헬조선 멘탈의 뿌리

한국은 참 희한한 나라다. 집단주의 속에서 개인이 발붙일 곳을 잃었다. '나'는 존재하지 않고, '우리'만이 있다. 이러한 특성은 하다 못해 우리가 쓰는 말에서도 느껴진다. '우리 나라', '우리 동네', '우리 가족'이지 '내 나라', '내 동네, '내 가족'이 아니다. 개인이 배제되어 있다.

헬조선을 만드는 것, 그건 바로 '우리'다. 우리가 만든 사회이니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말일까?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시도 때도 없이 우리라는 집단 혹은 공동체를 들이대면서 개인을 억압하는 그 잘난 집단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지내본 외국인들, 특히 서양인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한다. 실제로 외국인들이 만든 한국 관련 블로그나 웹사이트를 들어가보면 '우리'의 폭력에 식겁했던 에피소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해를 위해 에피소드 하나만 가져와보자. 영어교사로 한국 공립학교에 취직한 미국인 여성이 있다. 출근 첫째 날, 반갑다고 환영회 겸 회식을 해주더란다. 학교 근처 고깃집으로 갔는데, 베지테리언(채식주의자)이었던 아가씨는 자신이 고기를 먹지 않음을 정중하게 이야기하고, 밑반찬만 먹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사람들이 고깃집에 와서 고기를 안 먹는 게 말이 되냐며 친절하게 젓가락으로 고기 한 점을 집어 자신의 입 앞에 들이밀더라는 것이다. 이를 단호하게 재차 거절하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빈정상한다는 표정을 짓는 사람을 보며 이 아가씨는 혼란에 빠졌다. 아니, 안 먹겠다는 사람 입 앞에 음식을 들이밀며 강요하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기분이 나빠도 내가 나빠야지 왜 이 사람들이 기분 나빠한단 말인가? 그렇게 어색하게 앉아있는데, 이번에는 건배 제의가 왔다. 술을 먹지 않겠다고 하자 노골적으로 불편한 표정들을 짓기 시작했다. 결국 이 아가씨는 억지로 술을 마실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지옥 같은 회식이 끝나고, 2차라는 것을 가게 되었다. 노래방이란다. 평생 노래방(karaoke)에는 친구랑도 가본 적이 없는데 낯선 사람들이 가자고 하니 거부감이 든다. 이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도리가 없었다. 결국 그 미지의 공간에 따라갔고, 어릴 때 학예회 이후로 사람들 앞에서 한 번도 노래를 불러본 적 없는 사람에게 노래 한 곡 하라는 제안을 가장한 강요가 시작되었다. 결국 이 가여운 아가씨는 울음을 터뜨렸다.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에서 살아가는 이상 모든 개인은 어떤 집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간다. 이것이 한국인의 보편적 멘탈리티이기에 이를 실감하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외국인의 눈을 통해 이를 바라보면 '우리'가 행사하는 폭력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잘 드러난다. 가만 생각해보면 이 나라의 불쌍한 개인들은 우리를 위해 얼마나 숨죽이고 살아왔던가. 누군가 '다 같이' 뭔가 하자고 하면, 하기 싫더라도 분위기를 위해 그 '다 같이'의 일부가 되어야만 한다. 이 암묵적 룰을 깨고 끝내 '우리'에게 거부의사를 표하면 유도리가 없다는 둥, 사교성이 없다는 둥, 심지어는 이기적이라는 둥 하는 소리가 나온다.

집단을 위해 개인을 철저히 낮추는 것이 미덕이라고 교육받아왔기 때문이다. 이는 아주 위험한 발상임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개인주의 문화와 비교하며 양놈들은 이기적이라 자기밖에 모른다고 멸시하고, 반대로 '우리'는 화합을 위해 자신을 낮출 줄도 아는 유도리 있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며 희한한 우월감에 젖는 일이 자주 있다. 이런 정신 나간 사고방식 때문에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다수를 거스르고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는 것이 싸가지 없는 짓이 되고, 집단 내 다수가 뭘 원하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이 되고,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는 사람이 이기적인 사람이 된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 문화에 세뇌되어 왔다.

집단주의 광기에 저항하는 개인주의를 위하여

'개인'이 없는 '우리'의 나라에 산다는 것. 단순히 나는 노래방 가기 싫은데 다 같이 가자고 하니까 따라가야 하는 수준의 불편함만 유발하는 것이 아니다. 이 집단주의적 광기가 개인의 삶을 철저히 비참하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든다.

한국 사회에 널리 퍼져있는 집단주의 정서는 개개인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을 집단의 '기준'에 맞추도록 강요한다. 내 가치, 내 주관에 따라 행동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만든 가치, 남들이 만든 주관에 따라 살도록 만든다는 말이다. 개인은 이 소셜스탠다드(사회적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친다. 장래희망이 무엇이건 대학에 가야 하고, 하고 싶은 게 무엇이건 가급적 많이들 선호하는 그런 직장에 자리를 잡고, 서른줄 되면 연인이 있건 없건 결혼을 준비해야 하고 등등.

실로 우울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삶의 전반적인 설계 중 거시적인 부분만 집단주의가 끼어들면 그나마 참을만 하겠는데, 아주 미시적인 차원에서조차 이 '집단의 기준'이라는 것이 개개인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이는 소비문화에서 잘 드러난다. '남들 다 하는 거 나도 해야 한다는' 그런 부담감, 여기에 따라가지 않으면 '뒤처진다'는 불안함.

중,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제 2의 교복이 된다는 '패딩 점퍼'와 같은 거다. 유행하는 브랜드의 패딩을 입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계급이 나눠지고, 입고 있는 패딩의 가치와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한다. 왜? 그것이 중, 고등학생 집단이 공유하는 문화이자 인식이니까. 그래서 어려운 집안 형편을 잘 알면서도 굳이 부모에게 떼를 써서 히말라야에서나 입어야 할 법한 고급 패딩을 사는가 하면, 어린 나이에 죽어라 짜장면 배달하고 전단지 돌려서 패딩을 사 입는다. 철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소셜스탠다드에 맞춰가야 한다는 압박감을 청소년들도 잘 아는 거다.

번듯한 직장에 리스건 중고건 외제차쯤 굴려줘야 어깨가 펴진다. 유행한다는 맛집에 가서 사진 찍어 SNS에 올려야 하고, 꾸준히 문화생활도 누려야 한다. 연례행사로든 뭐든 가끔 해외여행도 가주고 말이다. 현실은 비루할지라도 어떻게든 화려한 척, 풍족한 척 이 소셜스탠다드를 다 따라간다. 그런데 또 참 웃긴 것이, 남들이 그 기준에 따라오면 자신의 급을 더 올리고 싶은 게 사람심리다. 어느 소셜스탠다드가 일반적인 유행이 되면, 또 새로운 희소가치가 등장한다. 이는 새로운 소셜스탠다드가 된다. 유행을 거쳐가며 소비수준은 점점 높아지고, 헬조선의 불행한 개인은 여기에 맞춰가기 위해 죽어라 발을 굴린다. 물론 진즉에 포기한 사람들도 있다. 대신 박탈감을 느낀다. 마치 쳇바퀴를 돌리는 햄스터들과 같다. 쳇바퀴가 점점 빨라지듯 소비수준은 점점 높아지고, 여기에 따라가려는 햄스터들은 안간힘을 쓰다 결국 좌절하고 만다. 어느 나라건 이런 경향이 조금씩 있다만, 한국은 이게 유난히 심하다.

충분히 먹고 살만한 개인들이 집단적 우울에 시달린다. 집단이 만들어 낸 각종 기준들은 넘치고 넘치는데 여기에 따라가는 것이 너무 벅차다. 그러니 너도나도 박탈감에 시달린다. 전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로 높은 소비수준을 가지고 있는 한국이 가난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소득수준 상위 10%들이 자신을 불쌍한 서민으로 여기는 나라가 바로 헬조선이다.

지금 한국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정치나 경제가 엉망이어서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지금 지적되는 수많은 정치 경제적 문제들이 해결되었다고 해도 한국은 여전히 헬조선일 것이다. 집단이 규정한 행복함의 기준이 계속 상향평준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집단의 기준에 맞추기 위해 개인은 끝없이 고통받는다. 내가 가지지 못한 남의 것을 가지기 위해 또 발버둥칠 것이고, 그렇게 남들이 누리는 것을 다 누리며 살기 위해 끝없이 발악할 것이다. 행복해지기 위한 조건은 점점 더 높아지고, 행복하다 느끼는 사람의 수는 점점 줄어들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집단주의를 때려치우고, 개인의 방식대로 사는 게 가능할까? 글쎄. 요원하다. 내 식대로 살자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의식하건 관심 끄고 내면에 충실해야 하는데, 삶의 방식이 그렇게 하루 아침에 바뀔 수가 없다. 다른 사람들의 눈이 너무 무섭다. 당장 남들 눈에 촌스럽게 비칠 옷을 입고 집 밖으로 나서는 것도 신경쓰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해결책은 있는 걸까?

미안하지만 '우리'는 이제 막 '우리'에 관한 문제인식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 글은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다. 서두에 밝힌 대로 문제해결의 첫 단계는 올바른 문제인식을 가지는 것이다. 해결방안까지 제시한다는 것은 일개 개인인 나에게는 너무나 벅찬 일이다. 지금이야 말로 '우리'가 '우리'를 죽이기 위해 힘을 모을 때다.

우리는 어차피 우리로부터 벗어날 수 없기에, 적어도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의 개인들에게는 우리세대보다 '우리'의 그림자가 덜 드리우기를 바라며 끊임없이 그 방법에 대해 논하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집단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나는 개인주의를 어떻게 강화할 것인가.

* 이 글은 디스라이크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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