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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기어와 아르마니가 건네는 조언

은근히 다양한 색상을 시도하는데도 어수선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채도가 낮은 차분한 컬러 위주로 선택하고, 엇비슷한 톤을 함께 매치하기 때문이다. 줄리안이 자신의 집에서 의상을 고르는 장면은, 잘라내서 남자들의 스타일링 가이드 비디오로 삼아도 될 정도다. 그는 흐린 카키색 셔츠 위에 같은 색의 줄무늬가 들어간 회색 타이를, 그리고 푸른 셔츠 위에는 남색 타이를 얹어본다. 심지어는 살인 누명을 쓰고 절박하게 도움을 구하러 다닐 때도 컬러 배합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 정준화
  • 입력 2016.03.17 12:59
  • 수정 2017.03.18 14:12

지난 2월부터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서는 사진가 허브 리츠의 회고전이 진행중이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관람객을 맞는 건 익숙한 얼굴의 젊은 시절이다. 아직 세일즈맨으로 일하던 시절, 허브 리츠는 무명 배우인 친구 리처드 기어와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를 여행했다. 잠시 정비소에 들렀을 때 재미 삼아 찍은 컷은 몇개월 뒤 <보그>나 <에스콰이어>같은 유명 잡지에 실리게 된다. 장래가 촉망되는 스타 사진가와 새로운 섹스 심벌의 탄생이었다.

리츠의 사진이 포착했던, 나른하게 유혹적인 리처드 기어의 모습은 폴 슈레이더의 1980년작인 <아메리칸 지골로>에서 다시 한번 재현된다. 주인공인 줄리안은 주로 부유한 연상의 여성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고급 남창이다. 화려해 보였던 삶은 그가 뜻밖의 음모에 휘말리게 되면서 힘없이 허물어진다. 기대만큼 도발적이지도 않고 결말도 관습적이었던 로맨스 드라마는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미적지근한 성과를 거뒀다. 영화 자체보다 큰 반향을 일으킨 건 블론디가 달짝지근하게 부른 주제곡 '콜 미'와 조르조 아르마니가 담당한 리처드 기어의 의상이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패션디자이너는 이 작품을 통해 할리우드에서의 입지를 확실히 다지게 된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줄리안은 외모에 상당한 공을 들인다. 강도 높은 운동으로 근육을 쪼개고 최고급 제품들로 옷장을 채운다. 의상의 경우, 소재와 실루엣이 일단 눈에 띈다. 아르마니는 리처드 기어에게 갑옷처럼 빳빳한 슈트 대신 몸을 따라 넉넉하고 부드럽게 흐르는 아이템들을 입혔다. 자연스럽게 구김이 간 리넨 재킷이나 셔츠, 타이와 함께 입은 카디건 등은 지루하지도, 경박하지도 않게 전체적인 인상을 정리해준다.

허리선을 거의 가슴 아래까지 당겨 올리는 배바지를 예외로 하면, 줄리안의 스타일은 무리하는 법이 없다. 번쩍거리는 액세서리나 현란한 프린트 따위는 그의 취향이 아니다. 특히 마음에 드는 건 색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은근히 다양한 색상을 시도하는데도 어수선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다. 채도가 낮은 차분한 컬러 위주로 선택하고, 엇비슷한 톤을 함께 매치하기 때문이다.

줄리안이 자신의 집에서 의상을 고르는 장면은, 잘라내서 남자들의 스타일링 가이드 비디오로 삼아도 될 정도다. 그는 흐린 카키색 셔츠 위에 같은 색의 줄무늬가 들어간 회색 타이를, 그리고 푸른 셔츠 위에는 남색 타이를 얹어본다. 심지어는 살인 누명을 쓰고 절박하게 도움을 구하러 다닐 때도 컬러 배합에 대한 집착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주인공이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나타나자 누군가는 "꼴이 그게 뭐야? 그래서야 메이드도 못 꼬시겠어"라는 메이드 비하 발언으로 핀잔을 준다. 하지만 내 눈에는 회색 계열로 차려입은 리처드 기어가 충분히 근사했다. 저 정도가 '꼴'이라면 나한테는 얼마나 더 하찮은 단어를 써야 하는 걸까, 순간 혼란스러웠다.

<아메리칸 지골로>는 1980년대 남성복 유행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대의 섹스 심벌이 아니더라도 무리 없이 시도할 수 있을 만큼 안전하면서도 세련된 스타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르마니가 이 영화를 통해 건넨 조언 중 상당수는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유효해 보인다.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회색, 카키색, 베이지색처럼 엇비슷하지만 다른 색들의 조합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색으로만 온몸을 휘감는 '깔맞춤'은 훨씬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하는 기술이다. 섹시함과 텔레토비 동산은 한끗 차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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