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6년 03월 17일 08시 17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3월 18일 14시 12분 KST

심은경의 연기가 아깝다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괴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인물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따졌을 때 심은경의 캐릭터는 어디로도 갈 수 있다. 오래 전에 법의 굴레에서 벗어났고 자체적인 논리를 세워놨기 때문에, 이 인물은 오로지 자신만이 주인이다. 하지만 영화는 여전히 이 인물을 '선'의 역할에 놓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행동 가능성을 살리지 못한다. 그 결과 이 인물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분량 면에서 조연으로 밀린다.

NEW

모홍진의 스릴러 <널 기다리며>에서 가장 매력적인 것은 주연배우 심은경의 연기이다. 철저하게 위장된 삶을 살면서 연쇄살인마의 손에 죽은 아버지의 복수를 계획하는 젊은 여성의 역할은 심은경 연기의 스펙트럼 안에 자연스럽게 포함되면서도 새롭다. 누군가는 이 캐릭터가 공감가지 않는 사이코패스에 가깝다고 불평했지만 과연 그것이 문제가 될까? 주인공이 모두에게 공감되는 역할일 필요는 없다. 예술이 우리의 지평을 넓히는 도구라면 완전히 공감되지 않은 인물들은 우리가 탐험해야 할 대상이다. 그들에게 끝까지 공감하지 못할 것인지, 결국 공감할 것인지는 탐험의 결과에 달렸다.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 괴물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인물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따졌을 때 심은경의 캐릭터는 어디로도 갈 수 있다. 오래 전에 법의 굴레에서 벗어났고 자체적인 논리를 세워놨기 때문에, 이 인물은 오로지 자신만이 주인이다. 하지만 영화는 여전히 이 인물을 '선'의 역할에 놓고 있기 때문에 충분한 행동 가능성을 살리지 못한다. 그 결과 이 인물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분량 면에서 조연으로 밀린다. 이야기 속에서 각본이 계속 발목을 잡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해결책도 지루하다.

반대로 김성오가 연기하는 연쇄살인마는 미쳐 날뛴다. 그가 영화 속에서 출옥한 뒤로 몇 명이나 죽였는지 난 모르겠다. 게다가 그는 동업자인 연쇄살인마 친구까지 하나 있다. 영화는 이들에게 악당의 자격증을 주는데, 그건 이들에게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뜻이다.

원래 악당은 주인공보다 손이 넉넉하기 마련이고, 대부분의 영화가 주는 긴장감도 여기에 있다. 하지만 모홍진은 장르 계산을 잘못하고 있다. 이런 긴장감은 주인공이 사법제도의 편에 서서 그 규칙을 따르며 악당을 저지하는 장르에나 의미가 있다. 그런데 <널 기다리며>는 복수극이다. 이미 주인공은 신의 위치에 서서 오래 전에 범죄를 저지른 악당을 처벌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악당이 미쳐 날뛰는 상황이라면 처벌은 무의미한 사치가 된다.

영화의 진짜 문제점은 연쇄살인마가 재미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건 <양들의 침묵> 이후 이 소재를 다룬 수많은 영화들의 실수이다. 이 영화의 연쇄살인마는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종자이다. 그들에겐 내면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저지르는 폭력은 건조하고 지루하다. 관객들이 카레의 풍미를 원한다면, 이 영화는 물에 탄 캡사이신을 내놓는다. <양들의 침묵>을 다시 한 번 보라. 한니발 렉터가 가장 매력적일 때는 그가 살인을 저지를 때가 아니다.

대부분 훌륭한 이야기는 주인공의 행동을 다루고 그 행동은 이야기의 맥락 안에서 중요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 <널 기다리며>의 각본은 거꾸로 간다. 이 영화의 폭력은 대부분 무의미하며 매력없는 자극만 준다. 그러는 동안 진짜 가능성이 있는 주인공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방치된다. 관대한 비평가들은 이런 상황에서 헬조선의 시대정신을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만큼 관대할 생각이 없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PRESENTED BY 호가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