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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국회의원 후보들을 처음 공천했을까?

62년이나 계속된 낡은 제도이고, 무엇보다도 독재자가 권력 연장을 위하여 만들어 낸 구리기 이를 데 없는 출현 배경을 가진 이 국회의원 공천 제도에 의해 이번 총선도 결국 치러야 하는 모양이다. 지난 62년 간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비약적인 경제 발전이나 국제적 위상의 상승에 걸맞지 않는 낡은 제도라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무엇보다도 1987년 6월 항쟁 이후 되찾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에 과연 적합한 제도인가 하는 의심마저 드는 이러한 국회의원 공천 제도는 적어도 다음 21대 국회의원 선거 전에는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 바베르크
  • 입력 2016.03.16 13:34
  • 수정 2017.03.17 14:12

1. 들어가며 - 국회의원 공천제도의 창시자를 찾아서

이제 4.13 국회의원 총선거가 한 달도 남지 않았다. 각 정당들이 국회의원 공천자 명단을 발표하면서 공천에서 탈락한 국회의원들이나 정치 지망생들의 반발도 심해지고, 또 각 당에서 공천권을 휘두르는 인사들이 과연 공정한 잣대를 적용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이런저런 말들도 나오는 것 같다. 그런데,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정치인들 중에서 각 정당이 "우리 당에서 공식적으로 내세운 후보"를 정하는, 말하자면 인증하여 주는 셈인 이런 국회의원 공천제도는 도대체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언제 왜 때문에 만들었을까?

그러고 보면 지금 한창 오바마 대통령의 후임을 뽑기 위해서 민주, 공화 양대 정당이 대통령 후보 당내 경선을 진행 중인, (해방 후 우리나라에게 민주주의를 수출한 셈인) 미국의 경우에는, 적어도 현재는 의회 의원들을 뽑을 때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에서는 상향식 당내 선거만 치를 뿐이지, 우리나라처럼 특별히 중앙당 차원에서 공천자를 정해서 발표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미국에서 온 것도 아닌 (현재 상향식 공천이나 공천 과정에서 여론조사 도입 논의 등이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각 정당의 중앙당에서 해당 지역구(또는 비례 대표)에 나설 자기네 정당의 후보를 낙점하여 발표하는 방식의 하향식 공천이라는 것은 도대체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언제 처음으로 만들어낸 것일까? 그것이 이 정치의 계절, 공천의 계절을 맞이하여 쓰여질 이 글의 주제가 되겠다.

2. 자유롭고 무질서하기까지 했던 처음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첫번째 국회의원 선거는 그 해 5월 10일에 있었고(5. 10. 총선거), 헌법을 만든 제헌국회인지라 2년의 임기로만 뽑혔던 이 대한민국의 첫번째 국회의원들은 6.25 사변 직전인 1950년 5월 30일의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의하여 뽑힌 국회의원들로 대체되었다. 그러나 해방과 건국(또는 정부 수립, 웃음), 6.25 전쟁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대격변기에 벌어지던 대한민국의 초기 국회의원 선거들에서는 국회의원 공천제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 정당에서 심지어는 같은 지역구에 두 명 이상의 후보가 출마하여서 서로 당선되기 위하여 다투기도 하였다.

예컨대 1950년 5월 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5.30 총선)의 서울 지역 입후보자들의 명단을 살펴보면, 같은 지역구에서 한 정당의 복수의 후보가 난립하여 서로 경쟁하는 예들을 적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성동갑 지역구에서는 조민당에서 선우련, 최약한 두 후보가 나란히 출마했고, 성동을 지역구를 살펴 보면, 국민회라는 정당의 진영하, 유재균 후보가 함께 출마했으며, 마포갑 지역구에서는 국민당에서 오성환, 배상규, 이재갑, 허찬 무려 네 명의 후보가 같이 출마하기도 했다. 즉 다른 정당들 간의 연대는 고사하고, 한 정당 내에서도 출마하고 싶은 정치인들이 있으면 얼마든지 그 정당의 이름을 걸고 국민의 심판을 받아 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렇게 제법 자유롭고 어찌 보면 무질서해 보이기까지 했던 국회의원 선거 입후보 방식을, 한 정당에서는 원칙적으로 한 지역구에 단 한 명의 후보만 내세운다는 국회의원 공천제도로 누가 언제 어떤 의도로 바꾼 것인가?

3. 국부(國父, 풉), 국회의원 공천 제도도 시작하다!

이는 역시나(응?) 대한민국의 국부(國父)(풉)인 당시 대통령 이승만의 작품이었다.

이승만은 해방 직후에는 일제시대의 독립운동 경력 덕분에 심지어 좌익이 주도했던 인민공화국에서조차 대통령으로 추대될 정도로 (그의 독립운동의 실체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적지 않지만) 좌우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승만은 해방정국 3년을 거치며 좌익을 제외한 우파의 지도적 인물로 포지셔닝을 했다. 나아가 그는 대한민국 정부수립(또는 건국) 후에는 점점 독재적 성향을 드러내어, 1952년 대선을 앞두고선 6.25를 겪으며 저지른 실정 때문에, 당시의 국회에선 재선이 무망할 정도가 되어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하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이른바 발췌개헌).

그런데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서는 이승만은 이제는 (대한민국에서 용납된 우파 계열의) 정파들을 초월한 지위에서 정치를 한다는 코스프레조차 못할 지경이 되고 만다. 특히나 당시 헌법상으로 이승만은 3선 출마가 불가능한 처지였기 때문에 스스로 "하늘 밑에서 처음 보는 국회"라고 불렀던, 자신에게 비판적인 당시 국회의원들을, 자신의 말을 잘 따라서, 자신을 위한 3선 개헌을 가능하게 할 국회의원들로 교체하여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이승만은 우여곡절 끝에 자신을 지지하는 '진실한 사람들'(뭐래니?)을 중심으로 자유당을 조직하게 하고, 자유당에서도 아무나 출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낙점한 사람들만 국회의원 선거에 나설 수 있게 하여 자신의 3선 출마를 보장할 개헌선을 확보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하여 국회의원 공천제도(당시에는 공인 입후보제라고 불렀던 것 같다)를 처음으로 실시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공인 입후보는 각 (지역)구의 당부(黨部)의 추천으로 입수된 자료에 의하여 중앙당부에서 결정하며, 공인 이외의 당원은 (해당 지역구에) 입후보 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1954년 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시 집권당이던 자유당이 발표한 이런 하향식의 국회의원 공천제도는 무려 62년 후인 2016년의 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도 그 원형은 거의 변동이 없이 여야를 막론하고 계속하여 적용되고 있는 셈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렇게 국회의원 공천제도라는 것까지 새로 만들어 내면서 세심하게(응?) 고른 진실한 사람들로도 독재 연장을 위한 3선 개헌안이 제대로 통과되지 못하자 이승만은 희한불금의 꼼수를 부리게 된다.)

1954년 5월 치러진 3대 국회의원 선거 벽보.

4. 맺음말

62년이나 계속된 낡은 제도이고, 무엇보다도 독재자가 권력 연장을 위하여 만들어 낸 구리기 이를 데 없는 출현 배경을 가진 이 국회의원 공천 제도에 의해 이번 총선도 결국 치러야 하는 모양이다. 지난 62년 간에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비약적인 경제 발전이나 국제적 위상의 상승에 걸맞지 않는 낡은 제도라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무엇보다도 1987년 6월 항쟁 이후 되찾은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에 과연 적합한 제도인가 하는 의심마저 드는 이러한 국회의원 공천 제도는 적어도 다음 21대 국회의원 선거 전에는 이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대한민국 정부수립/건국 초기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 때처럼 각 당의 후보들이 난립하는 방식으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각 당에서 각 지역구에서 그 당을 대표하는 후보들을 정하는 과정에서는 지금보다는 보다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방식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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