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히어로의 친구인가, 적인가? | DC의 초고도 문명과 인공지능들

영화 「맨 오브 스틸」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만화 속 크립톤의 세계에서는 수많은 조수 로봇이 주인의 활동을 도와 정보를 찾고 일을 한다. 특히 크립톤인들은 고도의 문명에 도달하자 타인과 거의 교류하지 않고 저마다의 '고독의 요새'에 홀로 기거하며 각자의 연구와 과제 등을 수행하는데, 그때 이들 인공지능 로봇들이 마치 영화 「아이언맨」에 나오는 토니 스타크의 인공지능 조수 자비스처럼 주인의 말상대를 하며 명령들을 수행한다.

  • 이규원
  • 입력 2016.03.14 13:45
  • 수정 2017.03.15 14:12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24] 히어로의 친구인가, 적인가?

─ DC의 초고도 문명과 인공지능들

2015년 9월 26일 배트맨 데이를 기념하기 위해 시작되어 오늘로서 24회를 맞은 이번 연재글에서는 최근 인간 대 인공지능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결을 계기로 DC 유니버스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그리고 배트맨과 관련 있는 인공지능을 짧게 소개할까 한다.

DC 코믹스에는 초고도의 발전을 이룬 3대 문명이 존재한다. 첫째는 그린 랜턴을 탄생시킨 가디언들의 오아. 둘째는 슈퍼맨의 고향 행성인 크립톤. 그리고 셋째는 우주 최악의 악당으로 손꼽히는 다크사이드가 속한 뉴 가즈의 세상 아포콜립스와 뉴제네시스다.

오아의 맨헌터와 파워 링

먼저 오아는 우주의 중심에 존재한 행성인데, 오늘날 DC에서 멀티버스라고 부르는 개념 자체가 여기서 탄생했다. 고도의 과학 발달로 신체와 정신의 한계까지도 넘어선 오아인들은 어느 날 우주 창조의 근원을 엿보는 '휘브리스'(오만)를 저지른다.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들이 종종 신의 영역을 넘보려 하다가 처참한 벌을 받는 것처럼, 오아인의 이 잘못으로 인하여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였던 우주에 혼돈이 생겨난다. 그렇게 정물질 우주에 반대되는 '악'의 우주인 반물질 우주가 탄생하는가 하면, 기존의 우주들이 무한하게 복제된 멀티버스가 생성된다. 오아인들은 자신의 죄를 만회하기 위해 우주의 질서를 회복할 목적으로 로봇 군단을 창조하는데, 이 인공지능 로봇 군단이 '맨헌터'이다. 그런데 어떤 존재가 가치 있는 존재인지, 어떤 존재가 우주에 위협이 되는지를 판별하는 역할을 맡은 맨헌터에게 문제가 발생한다. 당시 우주에는 과학의 영역 대신 마법과 주술의 힘에 바탕하는 종족들이 있었는데, 이것이 질서에 위협이 된다는 논리적 계산과 결론에 도달한 맨헌터들이 그들을 무참히 학살한 것이다. 수많은 별과 생명체가 말살당하는 사태를 초래한 맨헌터들은 심지어 창조자인 가디언에게서 힘의 근원인 파워 배터리를 강탈해 직접 우주 질서의 집행자가 되려는 시도까지 하게 된다. 인공지능의 반란이다. 이에 가디언들은 맨헌터 계획을 폐기하고 그 대신 지성을 가진 생명체가 주체이면서 막대한 정보를 검색하고 엄청난 힘을 가진 과학 기술의 정수를 도구로 삼아 우주 질서를 유지하는 그린 랜턴 군단을 만든다. 가장 소중한 가치 판단의 역할을 지성체가 맡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이 내용은 국내 정발작 중 『크라이시스 온 인피닛 어스 - 무한 지구의 위기』, 『그린 랜턴 시크릿 오리진』 등에서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하나가 아닌 다수의 우주가 존재한다는 '멀티버스' 개념을 바탕으로 한『크라이시스 온 인피닛 어스』와 『그린 랜턴: 시크릿 오리진』의 표지.

(사진 제공: 시공사)

크립톤의 조수 로봇들

두 번째 문명 크립톤은 멸망한 행성이긴 하지만 오아급의 오랜 역사와 찬란한 과학 발전을 이룬 문명이었다. 특히 크립톤에서 가장 발전한 기술은 생명 공학이었는데, 결국 생명의 유한성을 초월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강제로 인구를 통제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한다. 그로 인해 결혼이나 출산은 애정 없이 이루어지는 세포 결합의 절차로밖에 치부되지 않는다. 이런 크립톤에서 조엘이라는 이름의 한 과학자가 인간이 가진 사랑, 자식에 대한 감정 등을 깨닫게 되고, 행성이 파멸에 이르기 직전에 아들을 '아기 공장'에서 구해내 지구로 대피시킨다. 그 아이는 훗날 슈퍼맨이 되는데, 영화 「맨 오브 스틸」 등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만화 속 크립톤의 세계에서는 수많은 조수 로봇이 주인의 활동을 도와 정보를 찾고 일을 한다. 특히 크립톤인들은 고도의 문명에 도달하자 타인과 거의 교류하지 않고 저마다의 '고독의 요새'에 홀로 기거하며 각자의 연구와 과제 등을 수행하는데, 그때 이들 인공지능 로봇들이 마치 영화 「아이언맨」에 나오는 토니 스타크의 인공지능 조수 자비스처럼 주인의 말상대를 하며 명령들을 수행한다. 크립톤에 관해서는 국내 정발작 중 『슈퍼맨: 버스라이트』 등에 짤막하게 등장하는데, 1987년 『헬보이』의 작가로 유명한 마이크 미뇰라가 그린 『월드 오브 크립톤』 시리즈에 아주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무엇이 캔자스 출신 시골 소년으로 하여금 온화한 기자와 슈퍼 히어로의 이중생활을 시작하도록 만들었는가? '강철의 사나이'의 기원과 활동 초기 에피소드를 그린 『슈퍼맨: 버스라이트』의 표지.

(사진 제공: 시공사)

뉴 가즈의 마더박스

세 번째 문명인 뉴 가즈 또한 오랜 역사를 지닌 종족인데, 그 역사는 우리에게는 『토르』로 익숙한 북유럽 신화와 비슷하다. 과거 우주의 중심부에 신들의 세상이 존재하고 있었고, 어느 날부터인가 그곳에 살던 인간형 생명체들이 신과 같은 지위에 오른다. 고도로 발달된 문명이 수백억년 지속된 끝에 전쟁으로 멸망하면서 옛 신들의 세상은 절반으로 쪼개어지는데, 반으로 쪼개어진 별은 하나는 뉴제네시스라는 이름의 낙원 행성이 되고, 다른 하나는 아포콜립스라는 지옥의 행성이 된다. 다크사이드라는 자가 철권통치를 하면서 궁극의 무기인 '반생명 방정식'을 찾으려 하는 이 지옥의 행성에, 뉴제네시스의 히어로들은 '마더박스'라고 하는 특별한 인공지능 컴퓨터를 이용하여 맞선다. "핑핑"하는 독특한 소리를 내는 마더박스는 많은 정보를 검색하거나 공간이동 장치인 붐튜브를 생성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한다. 마더박스에 관해서는 국내 정발작 중에 『세븐 솔저스 오브 빅토리』, 『파이널 크라이시스』, 『뉴52 저스티스 리그』 등에서 만나볼 수 있다.

뉴제네시스인이 만든 살아있는 컴퓨터, 마더박스와 반생명 방정식으로 지구 침략을 시작한 다크사이드의 스토리가 담긴 『세븐 솔저스 오브 빅토리』, 『파이널 크라이시스』 표지.

(사진 제공: 시공사)

배트맨과 인공지능, 친구인가 적인가?

메탈멘과 로봇의 인권

이들 엄청난 문명에 비한다면 미미한 문명에 지나지 않는 지구. 그러나 지구에서도 특별한 인공지능들이 존재하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공지능으로는 '메탈멘(Metal Men)'을 꼽을 수가 있다. 메탈멘은 로봇 공학자인 윌리엄 매그너스 박사가 만든 인공지능 로봇으로 '황금', '납', '철', '수은', '주석', '백금', '구리', 등 종류도 아주 다양하다. 메탈멘의 역사는 일찍이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1967년 《브레이브 앤 볼드》 74호에서는 고담의 거리가 로봇 범죄로 위협을 받는 가운데 메탈멘들이 배트맨을 도와 고담을 지키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들과 함께하면서 배트맨은 자신이 갖고 있었던 로봇에 대한 편견을 깨기 시작한다. 이후에도 《더 브레이브 앤 더 볼드》 시리즈를 통해서 연재된 배트맨과 메탈멘의 다른 이야기들을 보면, 메탈멘은 마치 마블 코믹스의 《엑스맨》을 연상시킬 정도로 인간과 다른 존재에 관한 편견, 차별 대우, 주인과 노예의 관계, 로봇의 인권, 평등이라는 주제에 매달렸다. 배트맨은 메탈멘과 힘을 합쳐서 고장을 일으킨 로봇들, 논리적으로는 옳아 보이지만 잘못된 결론을 도출한 인공지능을 물리치고, 로봇 가운데서도 바른 인격을 지니고 인간 이상의 정의감을 지닌 로봇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간다.

지성을 갖춘 인공지능 로봇 팀! 금속 사람들(Metal Men)이 출연한 《더 브레이브 앤 더 볼드》 74호 표지.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Brave_and_the_Bold_Vol_1_74?file=Brave_and_the_bold_74.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배트맨과 브라더 아이

미군이 이라크 아부 그라브 감옥에서 벌인 포로 학대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던 2004년, DC에서는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라는 만화책을 통해 히어로들을 미군과 같은 상황에 집어넣었다. 저스티스 리그 멤버의 정체가 악당들에게 노출되고, 그 결과 히어로의 가족이 악당들의 손에 강간과 죽임을 당하는 참극이 벌어진다. 히어로들은 이 악당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논의하는데, 이 악당의 머릿속에서 히어로에 관한 기억을 지우기로 하는 한편, 아예 인격까지도 개조해 버리기로 결정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지는 모르지만, 히어로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며 변명한다. 그리고 심지어 이런 개조에 반대하는 배트맨마저 그 기억을 지워버린다. 배트맨은 더 이상 동료 히어로를 믿을 수 없게 되고, 자신이 보유한 재력을 동원하여 초인들을 감시할 수 있는 최첨단 인공지능 위성 브라더 아이를 제작한다. 그리고 『인피닛 크라이시스』에서 브라더 아이는 자신을 만든 창조자들이 입력한 프로그램에 따라서 지구를 지키기 위해 초인 대학살을 감행하려 한다. 동료 히어로인 같은 인간들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브라더 아이에 의존했던 배트맨은 이후 브라더 아이를 추락시키고 다시 한 번 다른 히어로를 믿기로 다짐한다. 이 시기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모두 자신들이 과연 히어로인지, 오히려 위협을 가하는 악당인지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하는데, 『인피닛 크라이시스』를 통해 많은 희생을 겪으면서 다시 한 번 하나로 뭉친다.

『아이덴티티 크라이시스』로 불화에 빠진 배트맨, 원더우먼, 슈퍼맨 세 사람. 그들 앞에 나타나 아마존 부족원의 말살을 선포한 인공 지능 위성 브라더 아이.(브라더 아이 안쪽과 『인피닛 크라이시스』 표지 상단의 얼굴들은 브라더 아이의 살인 사이보그 오막이다.)

(이미지 출처 왼쪽: http://dc.wikia.com/wiki/Brother_Eye_(New_Earth)?file=OMAC_Project_Vol_1_1_Textless_OMAC_Variant.jpg 오른쪽: 시공사)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던 중, 이세돌 기사가 세 번의 패배 후에 알파고에게 승리를 거두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정말 값어치로 매길 수 없는 그런 1승”이라고 소감을 밝히며, 마지막 5국에서는 흑돌을 잡고 이기고 싶다는 포부를 전했다. 세계의 수많은 이목이 집중되고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혼란의 와중에서, 확실한 것은 이제 인공지능이 공상 속 이야기에서 인간의 호적수로 여겨질 정도의 현실로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수십 년간 수많은 작가들이 희망을, 때로는 우려를 담아 그려낸 DC코믹스의 인공지능들. 가까운 장래에 거의 확실하게 실현될, 인공지능과 공존하는 세계에 한발 앞서 만화 속에서 지적 유희를 즐겨 보는 것은 어떨까.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배트맨 #batman #DC코믹스 #그래픽노블 #만화 #세미콜론 #원더우먼 #슈퍼맨 #인공지능 #dc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