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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의 '악수'는 실수가 아니었다

상대가 인공지능이라서 좀 더 충격적이긴 하지만, 지금 프로 기사와 바둑 팬들이 느끼는 당혹감과 좌절감은 본질적으로는 이창호 9단이 등장했을 때 선배 기사들이 느꼈던 감정과 다르지 않다. 계산하기 어려우니까 선택의 문제, 기풍(스타일)의 문제로 치부했던 영역이 사실은 정밀한 계산이 가능함을 당시의 이창호 9단이나 지금의 알파고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국에서 알파고의 실수로 생각됐던 수들도 결국은, 상당히 리드하고 있으므로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역전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고 판을 정리해가는 수법들로 봐야 한다.

  • 감동근
  • 입력 2016.03.11 04:42
  • 수정 2017.03.12 14:12
ⓒ연합뉴스

2국도 알파고의 승리로 끝났다. 1국을 패했을 때보다 충격이 훨씬 컸다. 1국에서 알파고는 작년 10월에 비해 엄청나게 발전된 모습을 보여줬지만 적지 않은 실수들을 저질렀다. 그런데 이세돌 9단이 더 큰 실수들을 하는 바람에 졌다고 생각했다. 1국에서 이세돌 9단은 역사적인 대국의 중압감 때문에 극도로 긴장된 모습을 보였다. 또한, 월간바둑 이세나 편집장에 따르면, 최근 농심배 세계대회 등 연이은 중요 대국 일정으로 체력적인 어려움을 호소했다고 한다. 그래서 2국에서 컨디션을 잘 추스르고 평상심만 유지한다면 알파고를 능히 이길 수 있으리라 기대됐다.

2국에서 이세돌 9단은 과연 세계 초일류 기사답게 전날의 패배로 입었을 심리적인 타격을 잘 극복하고 거의 100%에 가까운 기량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둑은 73수 이후에는 이세돌 9단이 유리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큰 실수는 없었음에도 쭉 밀리다가 진 것이다. 방송 해설을 하던 프로 기사들은 중반 한 때 형세를 유리하게 보기도 했다. 현대 바둑은 이창호 9단의 등장 이후로 종반에 가까워지면 한 수의 가치를 거의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 다만 초, 중반 두터움을 집으로 환산하는 것은 현대 바둑 이론으로도 어렵기 때문에 흐름으로 형세를 판단한다. 즉, 이 바둑에서 알파고는 사람이 보기에 나빠 보이는 수를 두 차례(15수, 41수) 정도 둔 반면에 이세돌 9단은 눈에 띄는 악수를 두지 않았으므로 이세돌 9단의 형세가 당연히 좋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30년 전, 이창호 9단이 등장했을 때 그의 수법들 중 상당수는 선배 프로 기사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기존의 바둑 이론에 부합하지 않는 수법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수법들을 구사해서 역전을 허용하지 않고 딱 반 집, 한 집 반 씩만 이겨가는 경우가 많아지자 바둑 이론에 새 지평이 열렸다.

상대가 인공지능이라서 좀 더 충격적이긴 하지만, 지금 프로 기사와 바둑 팬들이 느끼는 당혹감과 좌절감은 본질적으로는 이창호 9단이 등장했을 때 선배 기사들이 느꼈던 감정과 다르지 않다. 계산하기 어려우니까 선택의 문제, 기풍(스타일)의 문제로 치부했던 영역이 사실은 정밀한 계산이 가능함을 당시의 이창호 9단이나 지금의 알파고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국에서 알파고의 실수로 생각됐던 수들도 결국은, 상당히 리드하고 있으므로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역전의 기회를 허용하지 않고 판을 정리해가는 수법들로 봐야 한다.

확정가 뿐만 아니라 두터움까지 정밀하게 계산할 수 있는 알파고. 그렇다면 오늘과 같이 박영훈 9단 스타일로 가서는 남은 세 판에서도 이세돌 9단의 승리는 어려울 것이다.

알파고의 가치망보다는 정책망이 그래도 허술해보이니 수읽기 싸움을 걸어야 한다! 알파고의 계산 능력으로도 아직 바둑을 완전히 풀어낼 수(solved game)는 없다. 인간의 창의력이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내야 한다.

실리를 잔뜩 확보한 뒤 타개에 승부를 거는 강동윤 9단 스타일이라든지, 또는 대마가 얽힌, 타협이 불가능한 싸움으로 몰고간 다음 독수 한 방으로 끝내는 최철한 9단 스타일이라든지. 3국에서 뭔가 실마리를 찾기를 기대한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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