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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파고 1탄 | 예지적 인간의 황혼

흔히 바둑은 단순한 계산이 아니라고 합니다. 초반의 포석과 중반의 행마 때문입니다. 두터움, 맛, 기풍, 감 이런 설명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계산력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예지력이 작용한다는 거지요. 그러나 순수계산력, 즉 신경망모형을 이용한 학습력과 몬테카를로 롤아웃 방법을 이용한 탐색력을 갖춘 구글 알파고는 예지적 천재의 대표적 기사인 이세돌 9단에 맞서는 능력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겼습니다. 그 모호한 예지력이라는 게 사실은 '학습모형을 갖춘' 계산력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지적 인간의 황혼'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 이준웅
  • 입력 2016.03.10 04:50
  • 수정 2017.03.11 14:12
ⓒ연합뉴스

저는 이세돌 9단이라서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학습형 인공지능에 대항할 인간지능이 만약 이창호 9단 같은 계산형 기풍이라면 힘들 거라고 생각했죠. 초반에 먼저 벌어놓고 후반에 타개를 하는 조치훈이나 빠르게 전개하고 수습하는 조훈현도 불안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단 판이 짜이고 나면 인공지능을 당하기 어렵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쌍방 간 득실을 따지기 힘든 초반 포석이 지나자마자, 상대방의 혼을 빼는 강펀치를 날려서 승세를 잡는 이세돌이나 구리와 같은 스타일이 승산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제1국을 보니 과연 이세돌 9단은 예상대로 우상귀를 정리하자마자 공격에 나서더라구요. 그런데 알파고의 카운터가 만만치 않은 겁니다. 만만하고 말고 한 정도가 아니라 이세돌 9단의 변칙행마를 응징이라도 하듯이 맞받아치는 파괴력을 보여서 정말 놀랐습니다. 대국을 해설한 유창혁 감독도 그 '들여다보고 끊는 장면'과 '건너붙여 끊는 장면'에서 진심 놀라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알파고가 이세돌 기보를 너무 연구한 나머지 이세돌류의 전투형 기풍을 갖추게 된 것은 아닐까?' (오버피팅?)

유창혁 감독이 그랬죠. 구글 본사에서 인간이 두고 있는 것은 같다구요. 만약 그렇다면 커제나 구리가 둔 겁니다. ㅎㅎ 이 대국을 본 커제나 구리도 가슴이 철렁했겠죠. 바둑이 끝나는 무렵에 알파고가 '이창호 식 끝내기'를 보이더라구요. 이제 여기부터는 어떻게 두어도 내가 이길 테니, 이 정도에서 마무리합시다는 식의 끝내기요. 저는 그때 뭔가 세상이 바뀌는 느낌을 강하게 느꼈습니다.

오늘부터 '인간의 황혼'을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겠구나. 그렇습니다.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에서와 마찬가지로 창조자가 피조물에 놀라는 시대가 된 겁니다. 창조자가 피조물의 천진한 개성과 자유로운 의지를 보면서 어쩔 줄 모르는 시대가 된 겁니다. '제한된 세계 내의 게임'이지만 이미 피조물이 창조자의 능력을 넘어 창조적으로 보이는 시대가 됐습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쓴 <명인>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20세기 초 혼인보 슈샤이의 은퇴대국을 주제로 한 겁니다. 세습형 명인인 혼인보 슈샤이가 현대 바둑기전의 천재인 기따니에게 패하고 쓸쓸하게 은퇴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말이 소설이지 역사적 사건을 기록 삼아 남기며 감상을 더한 글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명인> 가운데 이런 감상이 나옵니다. 바둑이야 말로 동양적인 도, 정신, 예술의 정수라 할 수 있는데, 비록 그 발상지는 중국이지만 역시 일본에서 최고 경지를 이루었도다는 식의 감상. 제가 이 책을 읽을 당시에 세계 바둑계를 한국 기사들이 휩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와바타가 다시 살아 온다면, 기따니와 세고에 아래서 배운 제자들이 스승의 나라 기사들을 뛰어 넘어 동양적 정신과 예술의 정수를 발휘한다고 생각할까라고 궁금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소설 <명인>에는 이런 장면도 나옵니다. 지금 제 옆에 그 책이 없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가와바타가 서양인은 바둑 두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장면입니다. '서양인은 역시 동양적 정신과 예술을 구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실제로 서양에서 아직 조훈현이나 이세돌 급의 정상급 기사가 아직 탄생하지 않았으니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생각이 영 틀린 것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이런 식의 생각은 역시 오늘로 완전히 역사가 되어 버린 겁니다.

흔히 바둑은 단순한 계산이 아니라고 합니다. 초반의 포석과 중반의 행마 때문입니다. 두터움, 맛, 기풍, 감 이런 설명하기 어려운 요소들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계산력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예지력이 작용한다는 거지요. 그러나 순수계산력, 즉 신경망모형을 이용한 학습력과 몬테카를로 롤아웃 방법을 이용한 탐색력을 갖춘 구글 알파고는 예지적 천재의 대표적 기사인 이세돌 9단에 맞서는 능력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겼습니다. 그 모호한 예지력이라는 게 사실은 '학습모형을 갖춘' 계산력의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지적 인간의 황혼'은 이미 시작됐습니다.

# ‎이세돌‬ 9단은 2국에서 어떤 스타일을 보일까요? 기풍을 바꾸면 더 위험하지 않을까요?

알파고 2탄 | 의지를 가진 '선택기계'

알파고 3탄 | 생각하는 기계의 자기 이해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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