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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로 산다는 것에 대한 릴리 워쇼스키 감독의 글(전문)

영화 ‘매트릭스’, ‘스피드 레이서’, ‘주피터 어센딩’의 공동 감독 중 한 명인 앤디 워쇼스키가 3월 8일, 자신의 성전환 수술 사실을 고백했다. ‘Windy City Times’를 통해 쓴 긴 글에서 그는 자신이 왜 계획에도 없던 커밍아웃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자신에게 취재요청을 한 '데일리 메일'이 트렌스젠더 이슈에 어떻게 반응해온 매체인지, 그리고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트렌스젠더'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래는 릴리 워쇼스키가 '‘Windy City Times’에 쓴 글의 전문이다.

“충격적 성전환- 워쇼스키 형제가 이제 자매가 되었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이런 헤드라인을 기다려 왔다. 지금 이 순간까지 몹시 두려워하거나 어처구니 없다며 화를 내면서 기다렸다. 그 ‘뉴스’는 벌써 몇 번이나 나올 뻔했다. 기사가 나오기 전마다 내 에이전트가 불길한 이메일을 보내왔다. 기자들이 ‘앤디 워쇼스키 성전환’ 이야기를 곧 낼 예정인데 성명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내 의지에 반하는 공개적 아우팅 협박에 대해 나는 성명서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오줌과 식초와 개솔린을 1:1:12로 섞은 성명서였다.

트랜스젠더를 아우팅하는 위험에 대한 정치적 의미를 담은 성찰이 많이 담겨 있었고, 트랜스젠더의 자살과 살인 비율에 대한 무시무시한 통계도 들어있었다. 여성의 지배를 강렬히 원했던 내 아버지가 아이를 임신시킬 때마다 고환에 사마귀 피를 주사해서 수퍼 여성을 낳으려 했다는 게 ‘밝혀졌다’고 살짝 비꼬며 결론을 내렸다. 그래, 살짝이 아니라 엄청 비꼬았다.

하지만 그 성명서는 발표되지 않았다. 에디터들은 내용은 외설적이기만 하고 치명적인 영향을 가질지도 모를 글은 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낙관주의자라, 그걸 기꺼이 진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어젯밤 저녁을 먹으러 갈 준비를 하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내 집 문 앞에는 내가 모르는 남자가 서 있었다.

“좀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영국 억양으로 말했다.

내가 한숨을 쉬었던 게 기억난다.

낙관주의자가 되기가 정말 어려울 때도 있다.

그는 자신이 '데일리 메일' 소속 저널리스트이며, 데일리 메일은 영국에서 가장 큰 통신사고 결코 타블로이드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내일, 아니면 모레, 아니면 다음 주에 함께 앉아서 내 사진을 찍고 너무나 감동적인 내 이야기를 해야 할 거라고 했다! 내셔널 인콰이어러 기자가 따라다니는 건 원하지 않으시죠? 아무튼, 데일리 메일은 결코 타블로이드는 아니니까요.

라나 언니와 나는 대체로 매체를 피해 왔다. 내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지루했고. 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이지 굴욕스러웠다. 언젠가는 공개적으로 커밍 아웃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커밍아웃한 트랜스젠더로 살면…… 숨기가 어렵다. 나는 마음을 정리하고 편안해질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결정은 내가 내리는 게 아니었나 보다.

그의 명함을 받고 문을 닫자 내가 '데일리 메일'이란 이름을 언제 들었는지 기억이 났다. 영국의 초등학교 교사인 트랜스 여성 루시 미도우스의 전국적 공개적 아우팅에 엄청난 역할을 한 ‘뉴스’ 매체였다. ‘타블로이드가 아닌’ 그 신문의 사설에서는 그녀가 아이들의 섬세한 천진함을 해친다고 그녀를 악마로 만들었고, ‘그는 잘못된 몸에 갇혀 있을 뿐 아니라 직업도 잘못 골랐다’고 요약했다. 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 그녀가 트랜스젠더였기 때문이 아니라, 데일리 메일 기사가 나온 지 3개월 후 루시가 자살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내 집에 찾아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여기 또 하나 있다! 탁 트인 곳으로 끌어내서 다같이 구경하자!”

트랜스젠더가 된다는 건 쉬운 게 아니다. 우리는 대다수가 강요하는 젠더이분법 세계에 살고 있다. 트랜스젠더는 공개적으로 적대적인 세상에서 여생을 살아야 하는 힘겨운 현실을 대면하고 있다는 의미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가족들의 도움을 받았고, 의사와 세라피스트를 고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과정을 거치고 살아남을 기회를 얻었다. 도움과 수단, 특권이 없는 트랜스젠더는 이런 사치를 누리지 못한다. 살아남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2015년에 트랜스젠더 살해 비율은 미국에서 역대 최고를 찍었다. 무시무시할 정도로 많은 숫자가 유색 인종 트랜스 여성이다. 이것은 기록된 사건들만이고, 트랜스들이 전부 살해 비율의 젠더이분법 통계에 깔끔하게 들어가는 건 아니니까, 실제 수치는 더 높다는 뜻이다.

‘양들의 침묵’ 이후 먼 길을 왔지만, 우리는 지금도 매체에서 악마화되고 비난을 받는다. 우리를 공격하는 광고들은 우리를 잠재적인 포식자로 보고, 심지어 빌어먹을 화장실도 못 가게 하려 한다. 미국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른바 화장실 법은 어린이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이 아니고, 트랜스젠더들이 구타 혹은 살인을 당할 수 있는 화장실을 쓰게 만든다. 우리는 포식자가 아니고 먹이다.

그래, 나는 트랜스젠더다.

그래, 나는 성전환을 했다.

나는 친구들과 가족에에게는 커밍 아웃을 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거의 다 안다. 다들 아무렇지 않다. 내 멋진 언니 덕분에 그들은 한 번 해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들이 환상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 아내와 친구들과 가족들의 사랑과 응원이 없었다면 나는 오늘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트랜스젠더’와 ‘전환’이라는 단어는 나로서는 힘들다. 두 단어 모두 주류에 흡수되며 복잡한 의미를 잃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의 뉘앙스가 없다. 트랜스젠더는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독단적인 두 종착점 안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그리고 ‘전환’은 한 종착점에서 다른 종착점으로 순식간에 옮겨갔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나의 현실은, 나는 계속 전환을 해왔고 앞으로도 평생 계속 전환을 할 것이다. 0과 1 사이의 무한과도 같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무한을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양분법의 단순함 이상으로 대화를 끌어올려야 한다. 양분법은 잘못된 우상이다.

지금은 젠더 이론과 퀴어 이론은 내 자그마한 두뇌를 괴롭힌다. 이런 단어들의 조합은 내 귀에는 자유 형식 재즈처럼 연결이 안 되는 불협화음으로 들린다. 나는 퀴어와 젠더 이론을 이해하기를 갈망하지만, 내 스스로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이 힘든 것처럼 힘들다. 내 사무실에는 내 좋은 친구가 준 호세 에스테반 무뇨스의 명언이 있다. 나는 가끔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한참 쳐다보곤 하지만, 마지막 문장의 울림은 오래 남는다:

“퀴어라 함은 본질적으로 지금 여기를 거부하고 다른 세상의 잠재력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계속해서 낙관주의자로 남아서, 진보를 위한 시즈프스의 투쟁에 내 어깨와 내 존재를 바치고, 다른 세상의 잠재력의 본보기가 되려 한다.

릴리 워쇼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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