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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싶을 때 자 본 적이 없네"

"어떤 여성 생산자는 모임을 하다가 전화를 받고는 남편이 부른다고 일정 안 채우고 돌아간 적도 있어요. 여성들이 바깥 활동을 할 수 있게 해 줘야 해요. 아, 정말 농촌에서 여성으로 사는 게 만만치 않아요. 다 할 줄 알아야 해요. 날도 볼 줄 알고 살림도 하고 호미질이며 농사도 하고 모든 걸 다. 나는 자고 싶을 때 자 본 적이 없어요. 낮에 드러누워 본 적도 없고. 여자들에게 만능을 요구하는 게 시골에서는 더해."

충북 청주 초정공동체에서 로메인·브로콜리·토마토 기르는 이명숙 씨

한때 풀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던 농부였다. 살갗이 풀에 스치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나고 가려웠다. 그가 풀을 밀어낸 만큼 풀도 그를 밀어냈다. 도시에서 생활하다가 충북 청주 비중리로 농사지으러 오는 게 흔쾌하지 않았다는 이명숙 씨 마음이 몸으로 드러난 걸까. 왜인지 모를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나더니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왜인지 모르게 잠잠해졌다. 로메인·브로콜리·토마토 농사를 즐기게 되어서일까. 그는 이제 풀밭에 드러누워도 두렵지 않다.

글 김세진(살림이야기 편집부) | 사진 류관희

이래저래 눈치 보이는 시골살이

이명숙 씨는 1991년 이곳에 농사지으러 왔을 때 베짱이로 오해를 받고는 했다. 도시에서 살 때부터 혈압이 낮아 자주 어지러웠고 툭하면 머리가 아팠다. 인근 충북 진천에서 머슴을 몇이나 두고 담배농사를 크게 짓던 집에서 자랐지만 이명숙 씨는 농사일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어쩌다 일이라도 돕는 날이면 난리가 났다. 그를 일하게 했다고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성화였다. 몸이 약한 그를 염려해서인지, 5남매의 막내인 그를 어리게만 여겨서인지 모르지만 귀한 딸로 자란 건 분명하다. 그 때문에 어려서 농사일을 몸에 익히지 못했다. 게다가 파밭이든 무밭이든 들어가서 풀에 스치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솟으니 그는 귀농한 몇 해 동안 밭에 들어갈 엄두를 못 냈다.

청주 시내에서 설비를 하던 남편 나진찬 씨가 2년 동안만 농사짓고 다시 도시로 나가자 했고 이명숙 씨는 그동안 초등학교 4학년과 6학년인 아들 둘을 잘 돌보면 된다고 생각했다.

"살던 곳도 청주이고 이곳도 청주지만 그곳은 도시이고 여기는 시골이에요. 차로 20분 거리이죠. 여기 오기 몇 년 전부터 아저씨(남편)가 오토바이를 타고 매일 아침저녁 소를 먹이러 오갔어요. 당시에 소 17마리를 길렀는데, 눈을 뜨면 소 먹이러 가고 하루를 마무리하기 전에 소 먹이러 다녀오고 그랬지요. 아저씨는 진즉 농사짓고 싶었던 것도 같고. 지나고 보니 의심스러워요. 당시에 잠시 2년만 살자던 게 일단 오게 하려고 그렇게 말한 건지, 아닌지."

막상 왔지만 이명숙 씨는 적응하기 힘들었다. 한발 양보해서 농사는 짓더라도 이 마을로 오지는 말자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비중리는 남편 나진찬 씨의 문중이 모여 사는 나씨 집성촌으로 말 그대로 '시월드'이다. 가뜩이나 시골은 남의 집 숟가락 사정도 속속들이 알 만큼 소문도 빠르고 일거수일투족 낱낱이 드러나는 곳인데 더구나 그곳에 친척이 새로 자리 잡았으니 시댁 어른들 관심이 얼마나 집중되었을까. 남편은 밭에서 고생하며 일하는데 아내는 나와 보지도 않고 집에서 아이들만 돌본다고 '서방 등골 빼먹는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그날 이명숙 씨는 펑펑 울었다.

설이 막 지난 날 왔다고 이명숙 씨는 객인 우리에게 떡만둣국을 주었다. 둘째인 도예가 나기정 씨가 직접 빚은 그릇에 소담하게 담아 음식을 먹고 차를 마시니 제대로 대접받는 것 같았다. 집에서 해 먹는 자잘한 채소들은 이명숙 씨가 직접 기르진 않지만 옆에 사는 농부들과 서로 바꿔 먹고 주기도 하면서 서로의 밥상을 풍성하게 한다고 했다.

생활에도 어려움이 닥쳤다. 1995년 정부에서 농가에 '하우스 신축 지원 사업'을 했고 마을의 네 가정이 뜻을 함께해 하우스를 짓고 토마토와 오이농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해 유류 가격이 폭등했다. 하우스가 워낙 커서 하룻밤에 기름 너덧 말이 필요한데 토마토 5kg짜리 한 상자를 팔아도 기름값 한 말이 안 나왔다. 이명숙 씨와 나진찬 씨 부부는 겁 없이 덤볐다가 큰일 날 것 같아서 겨울에 하우스 농사 규모를 대폭 줄였다. 기름을 덜 쓴 덕분에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다른 가정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피해가 한 해로 끝나나 했는데 1999년 불현듯 사건이 터졌다. 하우스 신축 지원을 받기 위해 네 가정이 서로 물리고 물려 연대 보증을 섰는데, 그들 중 당시 유일하게 땅을 가지고 있던 나진찬 씨가 결국 모든 책임을 물게 되어 땅과 집 등이 압류될 위기에 처했다. 하루아침에 길바닥에 나앉게 된 것이다. 몇 년 뒤 다행히 수습하여 이명숙 씨네 가정이 다시 농사지을 땅을 확보했지만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귀농할 때 넓지 않았던 땅을 성실하게 농사지어서 조금씩 늘려놓았어요. 그 1천400평 땅이 그렇게 사라졌어요. 살던 집도 내놓고 있을 데가 없어서 가족이 봉고차에서도 생활하고 하우스 한쪽 귀퉁이에서도 생활했어요. 농촌에서 1년 농사를 망치면 단번에 회복 불가능해서 10년 동안 고생하는 일이 다반사예요."

이명숙 씨와 나진찬 씨는 서로 아줌마, 아저씨라고 불렀다, 아내와 남편이라고 부르는 게 쑥스러워서일까. 호칭은 거리감 있는 척해도 두 사람은 일할 때도 마주보며 일하는 사이다. 100m 길이 고랑을 따라가며, 로메인을 따면서도 마주한다기에 "왜?"인지 묻자 "심심하잖아"라고 대답한다.

농약 뿌린 작물, 안 뿌린 작물 따로따로

2001년 나진찬 씨는 목욕탕에서 기운을 잃고 쓰러졌다. 막 농약을 치고 목욕탕에 간 참이었다. 나진찬 씨는 그전에도 농약을 치면 머리가 아프고 구토를 하곤 해서 보건소에 가서 해독제를 받아 먹곤 했다. 그리고 동네 어른들을 봐도 농약의 독성을 알 수 있었다. 어른들 중에 병원에 다니는데도 병을 못 고치고 머리카락도 다 빠진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과거에 동네에서 집집마다 다니면서 도맡아 농약을 치던 사람들이었다.

"농약이 안 좋다는 걸 몸으로 알게 되니 불안하더라고요. 그래서 미안하지만 우리 가족이 먹는 오이와 토마토, 고추에는 농약을 안 쳤어요. 그리고 치더라도 다른 밭에 두 번 하면 우리 밭에는 한 번 하고 이런 식으로 했죠. 그런데 죄의식이 생기더라고요."

나진찬 씨는 '내가 살자고 농사짓는 거냐, 죽으려고 농사짓는 거냐. 살자고 먹는 거냐, 죽자고 먹는 거냐'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이걸 곁에서 지켜본 농부 나기복 씨가 친환경 농사를 짓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농약과 비료를 대신할 친환경 제재를 만드는 기술이 없으니 이런저런 시도를 하고 배우러 다녔다.

은행추출물과 고삼, 낙엽 등을 긁어서 흙과 섞어 땅을 비옥하게 하고 담배 훈증으로 벌레를 잡으려고 해 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미세하게 농약이 검출되었다면서 주변 관행농사짓는 곳에서 물이 흘러들어왔냐고 물었다. 원인은 담배농사를 지을 때 뿌린 농약이었다. 그걸 모르고 그 담뱃잎을 말려서 우려서 희석해서 뿌린 것이다.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며 농사를 지었는데 판로가 마땅찮았다. 당시에 유기농 물품을 유통하는 어느 생협과 거래했는데 두 집에서 하루에 70접(7천 개)가 나오는 오이를 하루에 세 접(300개)밖에 가져가지 않았다. 그래서 저장고에 넣어놓았다가 폐기처분하기도 하고, 안 되겠어서 친환경 농사지은 것이지만 서울 가락시장에 보내기도 했다. 100개가 든 상자를 100상자 보내면 28만 원을 받았다. 힘들게 농사지은 오이 하나에 28원 꼴이었다.

다행히 어느 급식 업체에 오이를 공급하게 되었다. 날마다 조금씩 가져가는데 결제가 깔끔하지 않았다. 생산자 쪽에서 입고장을 들이밀면서 확인을 요청하면 그제야 돈을 반이나 덜 준 것을 인정하는 식이었다.

"친환경 농사를 짓고도 3년을 허송세월 했어요. 힘들게 농사지었지만 그걸 어디에서 가져가야 말이죠. 그러다가 한살림을 만났어요. 그렇게 애쓰고 팔 데가 없어서 고민이었는데 내가 농사지은 걸 받아서 먹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방황하다가 주기적으로 가져가겠다는 사람이 생기니 목숨 걸 수밖에. 기다려 주는 사람이 있다니까 그게 나를 발전시키는 관계가 되는 거죠. 5년, 10년 내가 쌓아온 가치로 평가받는 거야."

한살림 생산자가 되려면 생산자 5명 이상이 모여 공동체를 꾸려야 하고, 또 그 공동체도 몇 년 동안 교육을 받아야 한다. 초정공동체는 농산물을 내기 전에 소비자 조합원을 맞이하는 것부터 배웠다. 아직 정식 생산자 공동체가 되기 전에 미호천에서 정월 대보름 잔치가 열렸는데 그곳에 가서 설거지를 하고 조합원을 맞이했다. 누가 먹는지 알고 농사짓는 게 얼마나 좋은지 그렇게 알게 되었다.

로메인이 피어 있는 모습이 한 송이 꽃같다. 밭에 봄을 전해 주는 푸른 꽃이 만개했다.

차곡차곡 포갠 로메인 빛깔이 내 눈에는 참스럽기만 한데 이명숙 씨는 나진찬 씨에게 이번에 왜 약간 누런 빛깔을 따는지, 무언가 부족했는지 묻는다. 도시내기 나에게는 없는 색 감각이 있는 게 분명하다.

남자들도 급하면 다 한다

"관행농사를 지을 때 허망할 때가 많았어요. 가락시장에 물품을 보내면서 얼마에 팔릴지 모르고 다음날 새벽 5시 경매할 때야 알아요. 그런데 한살림은 일 년 전에 생산량과 가격을 정해서 그대로 지키잖아요. 열심히 농사지으면 소득이 보장되어요. 미리 예측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어느 한 해인가 조합원과 만나면서 막 웃고 떠들었더니 당시 한살림청주생협 오상근 상무가 '올해 기후 때문에 농사 망쳤다면서 뭐가 좋아서 이렇게 웃냐'고 물어요. '농사는 내년에 잘 지으면 되지만 소비자를 놓치면 누구에게 주느냐'고 우리가 말했어요. '욕심 내지 말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있는 그대로 즐기라'고 제가 많이 말해요. 또 내가 즐거이 농사지으면 먹는 사람도 즐거이 먹고, 그 시너지 때문에 분명히 농사짓는 나도 즐거울 거예요."

가까이서 지켜보는 아들의 눈에 부모의 모습이 좋았던 모양이다. 삼십대 후반인 아들 나기창 씨가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농사를 함께 짓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이명숙 씨는 농사가 미래를 지킨다고 생각한다. 그가 기르는 "로메인은 당장 오늘 지나고 내일이나 모레가 되면 먹을 수 없지만 농사 자체가 후세를 지키는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이명숙 씨는 후세가 또 후세를 지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명숙 씨는 여성 생산자들에게 변화가 일어나면 좋겠다. 더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고 외부 활동도 했으면 좋겠다. 그는 한살림생산자연합 여성위원회 위원장으로, 한살림생산자연합회 부회장으로 활동한다. 잦은 회의와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면서 그는 새벽 서너 시에 일어나 작업을 미리 해 놓는다.

이명숙 씨가 알아서 빈 자리를 채워 놓고 가기도 하지만 남편 나진천 씨가 그 일을 막지 않아서 가능하다. 눈이 많은 지역에 아내를 데려 온 그가 답답할지도 모르는 아내를 배려하는 법이기도 하다. 이명숙 씨는 생산자 남편들이 아내가 바깥 활동을 더 잘 하도록 배려하면 좋겠다. 또 아내도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내가 나가도 다 해. 남자들도 급하면 다 해. 처음엔 밥 다 해 놓고 갔는데 이제 안 그래. 우리 아저씨도 처음엔 라면도 안 끓여 먹더니 이제 국수도 말아 먹고 다른 집에서 얻어먹기도 하고. 어떤 여성 생산자는 모임을 하다가 전화를 받고는 남편이 부른다고 일정 안 채우고 돌아간 적도 있어요. 여성들이 바깥 활동을 할 수 있게 해 줘야 해요. 아, 정말 농촌에서 여성으로 사는 게 만만치 않아요. 다 할 줄 알아야 해요. 날도 볼 줄 알고 살림도 하고 호미질이며 농사도 하고 모든 걸 다. 나는 자고 싶을 때 자 본 적이 없어요. 낮에 드러누워 본 적도 없고. 여자들에게 만능을 요구하는 게 시골에서는 더해. 농사짓는다는 우리 큰애 결혼해도 누가 와서 이 고생을 할지 참 안쓰러워. 정말 농사에 뜻이 있거나 서로 정말 사랑해서 농사를 감수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 고생을 못 버텨."

로메인, 포기 로메인, 잎상추, 토종상추, 등이 막 떡잎을 내고 있다. 나진찬 씨는 그 모습만 봐도 사랑스러운지 연신 싱글벙글이다. "관행농사지을 때는 농사 잘 짓는다는 말도 듣곤 했는데 친환경 농사지으면서 통 그런 말을 못 들어요. 옆집은 참 잘도 짓는 것 같은데. 우리도 다른 생산자처럼 정말 열심히 노력해요. 그래도 때로 벌레가 먹고 크기는 작고. 유기농사지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인데. 아주 가끔 그걸 몰라주는 소비자를 만나면 서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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