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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도서, 열풍을 일으키다(그래픽)

“페미니즘이 돈이 된다는 걸 보여주자!!”

지난해 12월 말, 여성혐오 반대 사이트인 ‘메갈리아’에 게시물 하나가 떴다. 20세기 초 영국에서 ‘전투파 여성 참정권 운동’을 벌인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현실문화)에 대한 북펀딩이 온라인 서점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메갈리안들은 댓글로 화답했다. “(북펀딩) 다녀왔다” “(팽크허스트가) 존경스럽다” “대모님 책에 이름이 들어가는 영광까지… 안 할 이유가 없다”.

북펀딩은 이례적으로 사흘 만에 모금액 목표 500만원을 꽉 채웠다. 현실문화 허원 편집자는 “메갈리안들의 폭발적 반응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팽크허스트의 운동전략에 대해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상당히 관심을 갖는 것 같다”고 그는 덧붙였다. 팽크허스트는 “돌을 던지는 것이 더 효과적인데, 왜 여성들이 의회 광장에서 매를 맞고 욕을 먹어야 합니까?”라며 급진적이고 저돌적인 여성참정권 운동을 벌인 것으로 유명하다.

페미니즘 도서들이 출판계에서 판매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페미니즘 입문서 격인 <이갈리아의 딸들>(황금가지)은 지난해 11~12월 불과 두달 만에 4000권이 팔려나갔다. 남녀 성역할을 바꾼 사회를 상상한 이 책이 여성혐오 발언에 맞선 ‘미러링 발화’로 유명한 메갈리안들의 필독서였기 때문이다. 황금가지 김준혁 주간은 “메갈리아 사이트가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따와 명명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작년 극심한 출판계 불황 속에서도 무려 20년 전 초판이 발간된 책이 이처럼 큰 인기를 얻어 독자들의 호응에 상당히 놀랐고 고무되었다”고 말했다.

인터넷 서점 알라딘 여성학 분야의 도서판매는 2010년에 견줘 2.5배 증가했다. 교보문고에서도 여성학 분야 도서 판매량이 전년에 견줘 48% 넘게 늘었다. 예스24에서도 2014년 주춤했던 여성/페미니즘 카테고리의 2015년 도서 판매량이 전년도에 견줘 9% 정도 많았다. 분류가 달라 이 카테고리에 포함되지 않는 책들을 포함하면 수치는 더 늘어난다.

페미니즘 도서 돌풍 현상의 배경에는 ‘일베’의 여성혐오 발화와 그 현상에 맞대응한 ‘여혐혐’(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지난해 2월 시작된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해시태그 페미니즘 운동(#나는페미니스트다) 등이 있다. ‘여혐’에 대한 역풍이다.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오는 10일까지 페미니즘 도서 기획전을 펼치고 있는 온라인 서점 알라딘의 박태근 인문 엠디는 “여혐, 여성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것은 안타깝지만 그 덕에 페미니즘의 가치가 드러나고 책을 통해 사회 변화의 가능성이 폭발한 것은 반가운 일”이라며 “작년 초여름 사회과학분야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50위권 안에 페미니즘 도서가 20권씩 올라 있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특히 지난해 5월 출간되어 한국 사회에 ‘맨스플레인’(man+explain)이란 신조어를 유행시킨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리베카 솔닛, 창비)는 10개월 만인 3월 초 현재 1만5000권 넘게 판매되면서 페미니즘 책 돌풍의 견인차 구실을 톡톡히 했다. 솔닛은 침묵을 강요받는 여성들의 내면을 ‘전쟁’에 비유했다. “자신이 잉여라는 생각과의 전쟁이고, 침묵하라는 종용과의 전쟁이다.”

지난 1월 출간된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창비)는 반응이 더 폭발적이어서, 두달 만에 1만권 넘게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지은이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나이지리아 출신의 미국 페미니스트 소설가로, 이 책의 바탕이 된 그의 ‘테드’ 강연은 유튜브에서 250만에 가까운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 책의 구매자들은 20대가 42%, 30대가 32%로 전체 구매자의 74%를 차지한다. <남자들은…> 또한 20~30대 여성들의 구매 비율이 높아 20대 38%, 30대 32%였다. 창비 최지수 편집자는 이런 반응을 두고 “사회 초년생들 또는 경력을 쌓기 시작한 2030세대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차별이나 섹슈얼리티 문제 등 페미니즘 관련 문제를 몸으로 느낀 듯하다”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사회과학 분야 도서 구매를 책임지던 40~50대 남성 독자들을 제치고 이제 20~30대 여성들이 페미니즘, 여성학, 젠더라는 키워드로 사회과학 분야 베스트셀러 흐름을 주도한다.

페미니즘 도서 돌풍에는 남성들도 한몫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월 창비가 진행한 <남자들은…> 독자 모임에 참석한 60명의 독자 가운데 25% 정도가 20~50대 남성들이었다. 최근 이 책을 사 읽었다는 남성 직장인 김아무개(32)씨는 “한국 상황에서 남자에게 주도적인 역할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어 아직은 다소 혼란스럽긴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세상이 달라 보인다. 주변 여성들을 대할 때도 ‘여자 입장에선 이 말과 행동이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조금 더 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해 우리말로 옮겨져 나온 미국 퀴어 이론가 게일 루빈의 단독 저서 <일탈>(현실문화)은 900쪽 가까운 ‘벽돌책’임에도 출간 한달 만에 1500부가 소진되었다. 발간 초기 구매자들의 성별을 분석한 결과, 60%가 남성인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1~2년 동안 페미니즘의 이론과 견해가 업데이트되어 나온 사전류도 꾸준히 여성학 분야 주간 베스트에 오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페미니즘의 개념들>(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엮음, 동녘, 2015)<젠더와 사회>(한국여성연구소 엮음, 동녘, 2014)이다. 기존에는 전공자들이나 대학교재로 사용되던 책들이 왜 요즘 들어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된 것일까? <여/성이론> 박이은실 편집주간은 여성들의 ‘자력갱생’을 원인으로 꼽았다. “처음에는 여성혐오에 대한 반대급부로 여성혐오 발언에 맞섰던 여성들이 이제는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정면대응할 필요성을 느끼며 스스로 정치화하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대학 안에서 페미니즘, 여성학 강좌가 줄어든 것도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페미니즘을 학습하도록 하는 원인”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출판계는 여성혐오 현상이 계속되는 한 페미니즘 도서 열풍도 지속되리라 본다. ‘여혐혐’ 시각으로 기획된 책들도 속속 발간 채비를 마쳤다. 우선, 에멀린 팽크허스트의 자서전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가 3월 둘째주에 발간돼 북펀딩의 반응을 이어갈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아이티계 미국 페미니스트 작가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사이행성)도 출간 전부터 주목받는 책이다. 천편일률적이지 않은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존재를 긍정하고 ‘나만의 페미니즘’을 선언하는 이 책은 출간 뒤 미국 페미니즘 분야 1위를 기록했고 패션지와 시사지를 막론하고 각종 매체의 호평을 받았다. 사이행성 김윤경 대표는 “여성 인권, 젠더, 섹슈얼리티 부분을 포괄하며 인종 문제까지 세상의 약자를 대변하는 용기 있고 힘차며 따뜻한 목소리”라고 말했다. 평화연구자 정희진이 감동 어린 추천사를 썼다. 그밖에도 자유기고가 노정태의 <남자를 위한 페미니즘>(이마)이 5월 출간되며, 출판사 대여섯곳에서 모성과 어머니 되기, 퀴어 이론에 대한 대중서 등을 준비중이다.

사실 여성의 독서는 오랜 금기이자 억압이었다. 독일 작가 슈테판 볼만의 <책 읽는 여자는 위험하다>(웅진)를 보면, 18세기 이후 책 읽고 글 쓰는 여자들이 늘어나자 일부 남성 보수주의자들은 독서가 여성 생식기에 치명적 영향을 준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따로 있었다. 여성이 책을 읽고 생각하는 것은 곧 ‘언어’를 획득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도서 돌풍은 ‘소비자의 힘’을 보여주는 사례다. 2008년 여초 사이트들이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를 주도하고 다양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힘을 과시한 바 있다. 분명한 것은 페미니즘 도서 돌풍이 단순히 ‘돈의 힘’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지난해 연말 국내 최대 불법 음란사이트인 ‘소라넷’에 대해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엄격한 수사와 폐쇄를 촉구하고 강신명 경찰청장이 폐쇄를 약속한 사실이 알려지자 메갈리안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후원금 1000만원이 진 의원의 계좌에 쇄도하기도 했다. 책은 실천을 낳는다. 독서는 정치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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