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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킷브레이커가 필요한 곳

수십쪽 수백쪽에 달하는 공약집에는 지킬 수 있는 약속보다는 선거권을 가진 이들이 보기에 좋은 내용들로 채우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목표는 선거에 이기는 것이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생기는 문제는 특별히 없기 때문이다. 다수의 표를 얻고 다수의 의석을 가진 다수당이 되고 정권을 얻고 나면 국민들은 어떠한 브레이크도 밟을 수가 없다. 국민의 반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납득하지 못해도 힘을 가지고 권력을 가진 대표자들을 막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 안승준
  • 입력 2016.03.02 09:10
  • 수정 2017.03.03 14:12
ⓒ연합뉴스

주식시장에는 서킷브레이커라는 제도가 있다.

주가가 단 시간 내에 폭락하게 될 경우 증권시장의 동요를 최소화 하기 위해 일정시간 동안 거래를 제한하는 완충장치 같은 것이다.

원래는 전자회로의 과열을 방지하기 위한 부품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내 느낌이긴 하지만 굉장히 적절하게 용어가 인용된 사례라고 생각된다.

전자레인지나 다리미 같은 전열기가 빠른 시간 내에 가능한 한 많은 열을 내는 것도 좋겠지만 기기나 주변상황이 감당할 범위를 넘어서게 되면 기기 자체가 폭발하거나 소각될 수 있는 것처럼 증권시장에서도 거대 자본가나 다수의 자본이 과도하게 움직이다 보면 증권시장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다는 면에서 말이다.

다수의 생각이나 결정이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못한다는 것은 증권시장이 아니라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는 것 같다.

어릴적 교과서에서 배운 '도편추방법' '중우정치' 같은 역사까지 언급할 필요도 없이 여럿이 모이면 하는 ox 퀴즈만 보더라도 우루루 몰려있는 확신에 찬 무리가 항상 정답은 아니지 않았던가?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이라는 그럴듯한 이름 아래 숱하게 벌어지는 다수결 원칙의 폐혜들을 보면서 서킷브레이커는 생각보다 많은 곳에 필요한 제도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대의민주주의와 대통령제를 채택한 공화국에서 우리는 4년 혹은 5년마다 수십만명 혹은 수천만명을 대신할 대표자를 선출한다.

정말 심각한 결격사유가 없다면 정해진 기간 동안 취소하거나 정정할 수 없는 선거라는 제도도 1명이라도 더 많은 쪽이 이기는 다수결의 원칙을 채택한다.

피선거권자들은 선거법에 위반되지 않는 선에서 오로지 그 한 표 한 표를 얻기 위한 방법만을 연구하는 것 같다.

수십쪽 수백쪽에 달하는 공약집에는 지킬 수 있는 약속보다는 선거권을 가진 이들이 보기에 좋은 내용들로 채우는 것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목표는 선거에 이기는 것이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생기는 문제는 특별히 없기 때문이다.

다수의 표를 얻고 다수의 의석을 가진 다수당이 되고 정권을 얻고 나면 국민들은 어떠한 브레이크도 밟을 수가 없다.

국민의 반이 아니라 국민 모두가 납득하지 못해도 힘을 가지고 권력을 가진 대표자들을 막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정치적 성향이나 관점에 따라 논쟁의 여지가 있는 사안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위안부', '국정교과서', 세월호' 같은 가장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문제들마저 국민의 생각과 결정자의 생각은 많이도 다른 것 같다.

최근 국회에서는 필리버스터가 진행됐다. 합법적 의사진행방해는 법을 통과시키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만 궁극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소수가 지지 않을 수는 있지만 이기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테러방지법' 이 옳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해 보더라도 여당과 야당, 진보와 보수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 논란의 중심에 있는 그런 법을 직권으로 상정한다는 것은 다수의 횡포로밖에 볼 수 없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기로는 직권상정은 이럴 때 사용하라고 준 권한은 아닌 것 같다.

다수결만을 맹신하고 국민을 위한 정치보다는 선거에 이기는 방법의 전문가를 꿈꾸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서킷브레이커가 진정 필요한 곳은 여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자기가 약속한 공약이 무엇인지 어떤 법안을 냈는지조차 모르는 정치인들을 보면서 정치권에 서킷브레이커를 강력하게 제안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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