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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 우리는 유려해지지 말자

필리버스터 한 번으로 더 나은 민주주의가 달성될 리도 없고, 테러방지법을 막을 수도 없다. 당신도 그걸 알고 필리버스터를 지지했으리라 믿는다. 모르고 지지했다 해도 이제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두드러지는 것은 냉소와 혐오다. 냉소와 혐오는 편리하다. 그리고 편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쉽게 유려해질 수 있다.

  • 주영준
  • 입력 2016.03.01 14:09
  • 수정 2017.03.02 14:12
ⓒ연합뉴스

10년 하고도 몇 년 전쯤의 이야기다. 3월의 대학에서는 어김없이 교육 투쟁이 시작되었다. 등록금 동결에서 시작하여 정권 퇴진, 사회주의 혁명을 아우르는 수많은 정치적 구호가 담긴 플래카드가 캠퍼스를 수놓았다. 학생들은 대학의 본관을 점거하고, 거기서 교육권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하고, 노래를 부르고 그랬다. 한바탕 축제가 끝나고 나면 적당한 등록금 인상폭이 합의되고, 본관 점거가 끝나고, 일상이 시작되었다.

아니, 일상은 그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 시절 본관 점거란 일종의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것이었다(몇 년이 지나자 더는 그렇지 않게 되었다). 본관에 근무하는 교직원들은 본관 점거가 시작되기 전부터 다른 사무실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합의된 등록금'이란 사실상 학교 측이 선심 쓰듯 몇 푼 깎아준 돈에 불과했다. 제1야당에 비견될 수 있는, 학생회 수권 운동 정파는 이를 승리적 결과라 발표했고, 기타 야당에 속할 다른 계열의 운동 정파들은 그들을 타협적이라고 공격했다. 그리고 여기 별로 관심이 없는 친구들은 3월부터 뭐 하는 짓들이냐고, 저런다고 뭐가 바뀌냐며 냉소를 보내곤 했다. 이듬해, 다른 계열의 운동 정파가 학생회 선거에 당선되고 상황은 완전히 똑같았다. 다만 입장이 달라졌을 뿐이지. 세 경우 다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10년이 넘도록 이해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쉽지 않다. 다들 복잡한 사정들이 있는 거겠지.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는 단순한 친구들도 있었다. 두어 번쯤 점거한 본관을 구경하러 나오더니 갑자기 극좌 모험주의자나 전향한 민주 투사에 빙의하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동일한 문장으로 자신의 입장을 시작한다. '거 봐, 내가 해봤는데 세상은 역시 안 바뀐다니까.' 그리고 자신의 원대한 망상을 바탕으로 유려한 훈수를 둔다. '지금의 투쟁은 촌스럽다. 자, 나의 천하삼분지계를 보도록 하자.' 다행히도 세상은 간단하지 않다. 본관 점거에 두어 번 참석하는 것으로 교육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쯤 학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두어 번 들여다 본 것만으로 천지만물의 신묘한 조화에 통달하게 된 친구가 입안한 천재적인 기략이 우리를 승리로 이끌 리도 만무하다. 아마 당시 유행하던 삼국지 혹은 은하영웅전설의 폐해가 아닌가 싶다. 현실의 세계에서 너는 장씨의 셋째 아들 나는 이씨의 넷째 아들인데 언어의 세계에서는 너는 제갈량 나는 양웬리다. 그들에게 제갈량과 양웬리의 시대와 독서량이 없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물론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무엇이 교육 투쟁을 승리로 이끌어 가는지 모르겠다. 다만 말보다는 행동이, 자칭 천재성보다는 자칭 굳건함이 중요하지 않을까 정도로 생각한다. 때로 뉴스에서 그 시절 알게 되었던 '촌스러운' 친구들, 선배들, 후배들의 이름을 보곤 한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존경과 미안함을 느끼고는 한다. 그들은 삶의 일부를 희생하며 여전히 어딘가에서 싸우고 있다. 그리고 그 많던 제갈량들은 누가 다 먹어버렸는지 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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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 한 번으로 더 나은 민주주의가 달성될 리도 없고, 테러방지법을 막을 수도 없다. 당신도 그걸 알고 필리버스터를 지지했으리라 믿는다. 모르고 지지했다 해도 이제는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두드러지는 것은 냉소와 혐오다. 일단 냉소를 좀 거두도록 하자. 중학교 3학년 담임에게 중2병 완치 판정을 받은 이후로 냉소가 유려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어떤 친구들은 아직도 냉소가 꽤나 유려한 무엇이라고 믿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냉소가 '나오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냉소는 방귀 같은 것이다. 참으려 해도 속이 뒤틀리니 결국 삐져나오고 만다. 하지만 굳이 대중 앞에서 방귀를 크게, 예술적으로 뀌어보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필리버스터가 이렇게 끝날 줄 알았다'고 냉소적으로 내뱉는 것이 증명하는 것은 당신의 찬란한 지성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당신이 얼마나 경박한 자인지를 증명할 뿐이다. 정치 토론회에서 당신을 만났다면 나는 충분한 시간을 두고 당신의 경박함을 공격할 생각이다. 당신이 손님으로서 내 바에 나타났다면 나는 바텐더로서의 열정과 직업윤리를 다해 당신에게 즐거운 시간을 선사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앞 문장에서 했던 당신의 경박함 운운한 것을 취소하고 사과하며 이런 제안을 던지고 싶다. 우리는 유려해지지 말자고. 견뎌보자고. 화가 나고 냉소가 나는 것은 나도 당신도 마찬가지라고.

혐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 혐오가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당신의 집 앞에 누군가 몰래 던져둔 쓰레기 덩어리 같은 것이다. 당신은 머리를 풀어헤치고 '아이고 동네 사람들 이 보소 이 동네 민도가 이것 밖에 안 되네 아이고 아이고'하고 소리를 지르며 쓰레기 덩어리를 발로 차서 동네를 난장판을 만들 수도 있고, 조용히 쓰레기를 치운 후에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맙시다'라는 표지를 써 둘 수도 있다. 물론 첫 번째 방법이나 두 번째 방법이나 현실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쓰레기 덩어리를 해체해서 어떤 주소에 사는 놈이 이 쓰레기를 여기 무단으로 버렸는지 확인하고 따지는 것이다.

당신 동네의 <어떤 놈>이 당신에게 똥을 던진 것이다. 당신 집 앞에 쓰레기를 무단 투기한 건넛집 양아치와 가끔 당신 집 앞을 쓸어주기도 하는 옆집의 사람 좋은 아저씨를 구분할 필요는 있다. 이를테면, 테러방지법에 찬성한 이자스민에게 소수자의 예를 물으며 필리버스터를 지지하자고 말하는 것은 좀 헛발질이 된다. 필리버스터를 중단한 더민당 <지도부>에게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를 외치며 무한한 신뢰를 보내려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정당 정치란 사회학의 기본 전제 중 하나인 '개인'과 '집단'의 구성을 근본부터 뒤틀어버리는 복잡한 것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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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소와 혐오는 편리하다. 그리고 편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쉽게 유려해질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에서 조선의 문인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노예들을 거느린 친구들은 얼마나 유려한 글을 써왔는가. 세상은 힘든 곳이다. 노예와 냉소와 혐오를 가져도 그럴 것인데 당신에게는 노예도 없고 이제 나는 냉소와 혐오를 버리는 게 좋지 않을까 이야기한다. 이는 안 그래도 힘든 당신의 세상을 더 힘들게 만들 것이며 당신을 촌스럽게 만들 것이다.

물론 일상의 당신은 유려해지는 것이 좋다. 첫 키스를 몇 시에 했는지 정확하지 기억하지 못하는 당신은 이제 유려한 연애를 해야 하는 나이가 된 것이다. 이름 모를 바에 갔을 때도 바텐더나 옆에 앉은 사람에게 유려한 편이 좋으며,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시민의 일원으로서도 되도록 유려한 편이 좋다. 하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편리한 유려함'을 선두에 두고 거기 안착하려 한다. 촌스러운 근성이 세상을 바꿔낼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내가 알던, 10년 전의 촌스러웠던 사람들은 여전히 어떻게든 무엇을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그보다 전 시절에 촌스럽게 학생운동이나 하던 사람들이 필리버스터를 멋지게 주도했다. 물론 그들 중 누군가는 억압자의 편에 서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편리한 유려함이 세상을 망치고 있는 것을 꽤 지겹게 보아왔다.

변화를 원한다면 촌스러워 보이는 정의를 지치지 않고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우리 것인 것 같은 민주주의를 다시 한 번 역설해야 하지 않을까. 가능하다면 당신이 지지하는 정당에 후원금을 내고, 촌스러운 깃발이 모인 촌스러운 장소에 가야 하지 않을까. 유려함에 대한 고민은 그 다음이 아닐까. 섣부르게 제갈량이 되려 하지 말자. 적어도 당신이 '올바르게 보이는 것'보다, '올바름'에 대해 더 관심이 많다면 말이다. 아, 물론 당신이 아무리 노력한다 하더라도 당신은 촌스러워 보일 것이지만, 하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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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쯤 전, 이장욱 시인은 '정오의 희망곡'이라는 시집을 발표했다. 나는 그 시집에 있는 '근하신년-코끼리군의 엽서'라는 시를 무척 좋아한다. 사랑에 대한 정말 좋은 시다. 그리고 그 시는 이렇게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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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상공에

순간 정지한 비닐봉지.

비닐의 몸을 통과하는 무한한 확률들.

우리는 유려해지지 말자.

널 사랑해.

눈앞의 순간과 그곳의 나와 그리고 또 무한한 확률을 생각하자. 그리고 우리는 유려해지지 말자. 사랑하자. 좋은 시를 멋대로 왜곡하여 이런 글에 인용해서 시인에게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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