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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한 여행인가?

우리는 나를 발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 비슷하게 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는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남들이 하는 여행 코스에 사람만 바뀐 것이다. 가령 오늘날 가장 흔한 문학양식이 여행기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직업 작가가 아닌 일반인이 각종 SNS에 쓰는 글의 상당수가 여행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여행기(리뷰 등)들이 모두 비슷하다는 것이다. 출발 전 정보 공유 및 수집, 그곳에서의 여흥거리, 면세품 쇼핑, 먹을거리 등.

ⓒ연합뉴스

글 | 서광진 박사

중세 시대에도 여행은 존재하였지만, 이는 순례의 형식이 대부분이었다. 교회와 관련된 '신성한 곳'에 신앙심을 확인하거나 교회와 관련된 일을 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중세 문학의 가장 중요한 장르 중 하나인 순례기는 바로 이에 기인한 것이다. 따라서 순례기에서 가장 먼저 확인되는 바는 무엇보다도 신앙심이었다. 오늘날 세속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중세의 순례기는 갈 길이 정해져 있으며 그 목적은 자신이 알고 있거나 믿고 있는 것을 확신․재확인하는 여행이었다. 따라서 순례기의 레토릭은 대체로 정해져 있었다. 개인의 여행기이되 문체에서부터 구성까지 개별 작품 간의 개성이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가령 이들 작품은 "저는 신의 도움으로 집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아멘!"과 같은 말로 마무리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더 멀리 갈수록 더 많이 보게 되고 더 많이 알게 된다'라는 명제는 중세의 세계관과 무관한, 즉 새로운 시기의 여행 모토였다. 르네상스 이후에서야 이 명제는 지식과 교육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이 시기는 중세 말기, 신에서 인간에게로 관심을 돌리기 시작한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이 강력한 세계관으로 자리 잡는 때였다. 신의 영혼이 아닌 인간의 영혼에 대한 관심이, 천국의 지도가 아니라 지상의 지도에 대한 관심이 세계관의 저변에 침투해 자리 잡은 것이다. 이에 따라 이념형에 가까웠던 중세의 T-O형 세계 지도는 실측에 기반 한 세계 지도로 바뀌고 있었고, 전문 '탐험꾼'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17세기 말을 거쳐 18세기에 들어서자 유럽은 계몽주의 열기에 사로잡힌다.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 이성에 기반 한 사회 발전에 대한 믿음은 국가의 경계나 민족의 경계 혹은 지리적 경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이성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으며, 무한히 계발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 여행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대항해 시대, 혹은 지리상의 발견의 시대는 당시 유럽의 최대 강대국이었던 포르투갈, 스페인 등에 의해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후진국도 이 대열에 동참하게 된다. 지식과 정보의 축적, 이성의 단련은 후진국의 상태를 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중세의 순례와 '지리상의 발견'의 시대를 지나 18세기의 여행은 또 다른 의미와 역할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가 영국이었다. 이른바 '그랜드 투어(Grand Tour)'의 탄생이었다. 가장 좁은 의미의 그랜드 투어는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추어야 했다. 첫째, 영국의 젊은 남자 귀족 혹은 젠트리가 여행 주체이다. 둘째, 전체 여행을 책임지고 수행하는 동행 교사가 있다. 셋째, 로마를 최종 목적지로 삼는 여행 스케줄이 있다. 넷째, 평균 2-3년에 이르는 장기 여행이다.

위의 조건으로 볼 때, 당시에 존재했던 여러 여행 형태 중에서도 그랜드 투어가 특히 주목 받은 이유를 역사학자 설혜심의 말을 빌려 설명하자면 이렇다. 그랜드 투어는 '엘리트 교육의 최종 단계'로서 지식인과 귀족 자제들의 필수 코스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행에 대한 새로운 감각은 18세기 유럽에서 크게 유행하였다.

British Gentleman in Rome, c.1750

(출처: Yale Center for British Art, Paul Mellon Collection, USA)

러시아에서도 여행이 유행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그 양상은 영국의 경우와는 달랐다. 영국에서는 귀족들이 자국의 교육 환경에 불만을 품고 스스로 여행에 나섰다면, 러시아에서는 황제, 즉 국가가 직접 여행을 장려하였다. '그랜드 투어'의 가장 열성적 지지자이자 이로 인해 그 자신이 가장 혜택을 많이 받은 인물이 다름 아닌 러시아 근대화의 아버지인 표트르 1세였기 때문이다. 그는 황태자 시절부터 그랜드 투어라고 불리울 만한 여행을 수차례 감행하였다. 영국, 독일, 네덜란드 등을 수년간 수차례 자신의 수행원(교사)들과 여행하면서 직접 보고 배웠다. 그리고 그 결과 위로부터의 근대적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후 황제가 된 표트르는 유망한 젊은이들을 유럽으로 유학 보냈다. 일종의 국비유학이었다.

이와 동시에 젊은이들은 아무런 목적 없는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러시아 지성사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이 되었다. 적어도 17세기까지의 러시아인은 여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망가거나 이주를 위해 먼 길을 떠나거나, 혹은 단지 편력했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한 여행이든, 세속적이거나 심지어는 불경스러운 것들을 찾는 여행은 하지 않았다. 순례나 출장, 이민이 아닌 여행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목적 없는' 여행이다.

칸트의 말처럼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 취미판단 혹은 판단력(미학)의 근대적 기반이라면,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근대적' 여행은 18세기 이후에야 고안된 것이다. 이러한 목적 없는 여행(출장이 아니라!)을 통해 우리의 삶은 매일 새로워지고 다채로워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여행을 통해 나를 발견한다고 생각하지만, 근대적 여행의 시발점에는 유행과 특정 목적 - 예를 들어 교육과 식견의 확장 등 - 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는 여행이 순전히 '개인적'일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나를 발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남들과 비슷하게 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난다는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남들이 하는 여행 코스에 사람만 바뀐 것이다. 가령 오늘날 가장 흔한 문학양식이 여행기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직업 작가가 아닌 일반인이 각종 SNS에 쓰는 글의 상당수가 여행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장 쉽고 흥미 있게 '문학창작활동'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여행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다. 연인, 가족, 친구들과 함께 했던 미식 여행이나 관광, 데이트에 대한 온라인 글쓰기가 가장 손쉬운 문학창작활동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여행기(리뷰 등)들이 모두 비슷하다는 것이다. 출발 전 정보 공유 및 수집, 그곳에서의 여흥거리, 면세품 쇼핑, 먹을거리 등. 나아가 느끼는 감정이나 수사도 비슷해지고 있음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어느새 개성과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내가 속해 있는 사회를 확인하기 위해(혹은 다른 사회로 편입하기 위해) 여행을 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여행을 통해 과거의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를 재확인할 뿐이다. 매우 개인화되었다고 생각하는(혹은 비판받는)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똑같은 여행을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동일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역설 앞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중세의 순례기와 무엇이 다른가? 신앙고백의 대상(신에게서 물신으로!)? 여행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겠지만, 우선은 허울만 좋은 '자아 발견의 여행(그러니까 힐링 여행!)'이 중세 순례기의 새로운 버전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할 것이다.

* 이 글은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 홈페이지에도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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