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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샌더스의 부상은 포퓰리즘의 힘이다

ⓒASSOCIATED PRESS

비록 버니 샌더스가 슈퍼화요일 선거에서 힐러리 클린턴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아이오와 주에서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들이 정말로 강력한 후보라는 걸 입증했다. 뉴 햄프셔에서는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정치 아웃사이더들의 부상은 미국에서만 보이는 현상은 아니다. 구대륙에서 포퓰리스트 정당들이 성장하는 것을 반영한다: 그리스의 시리자와 황금새벽, 스페인의 포데모스, 오스트리아의 자유당, 이탈리아의 오성운동당 등, 비슷한 예가 많다.

이 사람들과 운동들 사이의 차이점이 워낙 커서 그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두는 포퓰리즘의 부상의 징후로 보아 마땅하다.

역사적으로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는 미국과 미국 이외의 곳에서 다른 의미를 가졌기 때문에 보다 명확히 말할 필요가 있다. 이런 종류의 포퓰리즘가 보는 주류 정치는 좋게 본다 해도 파탄이 났으며, 최악의 경우 부패했다. 정치 권력은 기득권과 엘리트가 장악했고, 보통 사람들은 권리를 빼앗겼다는 것이다. 샌더스는 아이오와와 뉴 햄프셔의 결과가 '정치적 기득권층, 경제적 기득권층, 또한 매체 기득권층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보냈다'라고 말하며 정확히 이런 단어들을 사용했다. 이러한 진단에 포퓰리즘은 해결책을 제시한다. 상식과 정의를 상징하는 개인들이나 정당들이 대중에게 권력을 되돌려주면 된다는 것이다.

트럼프와 샌더스는 이 틀에 완벽히 맞아 들어간다. 심지어 유럽에 닮은 꼴들도 있다. 트럼프는 포퓰리스트의 물결이 부상하리라는 초기 조짐의 미국판이다: 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다. 조금이라도 지적인 사람이라면 이 두 사람을 돈 많은 어릿광대라고 조롱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매력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지식인이 아니라는 것을 좋아한다. 지식인들은 비현실적이고 고상한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트럼프와 베를루스코니가 성인(聖人)은 아닐지 몰라도 일 처리는 해내는, '정치적 올바름'의 신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 평범한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센더스는 정치적으로 영국의 제레미 코빈과 쌍둥이다. 둘 다 자존심 강하고 개조되지 않은 사회주의자로, 대기업과 싸우고 사회의 넘쳐나는 부를 소수가 아닌 다수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한다.

모든 포퓰리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아마추어리즘은 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들이 정직하다는 것, 말만 번지르르하지 않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다른 정치인이었다면 마이너스가 되었을 실수도 포퓰리스트들에겐 도움이 된다. 그들이 노회한 기성 정치인들보다 인간적이라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베를루스코니는 여러 이탈리아인들을 움찔 놀라게 만든 '농담'을 여러 번 했다. 자신이 핀란드의 여성 총리에게 '플레이보이의 매력'을 사용했다는 말, 유럽 의회의 독일 의원을 '수용소 경비'라고 불렀던 것 등이었다. 트럼프의 얼토당토 않은 선언들이 그의 인기에 별 해가 되지 않았듯, 베를루스코니의 이런 발언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지한 매체와 정치적 기득권층이 포퓰리스트들의 부상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두려워할 만한 대상이라는 증거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있다. 문제의 분석에 있어서나 해결책에 있어서나 모든 포퓰리즘은 예외없이 단순하다. 멕시코와의 국경에 벽을 세우고, IS를 혼쭐을 내주겠다는 트럼프의 계획은 위험할 정도로 잘못되어 있다. 샌더스의 계획은 그만큼 무모하지는 않지만, 기업에 대한 세금을 엄청나게 늘려서 공공 지출을 잔뜩 늘리겠다는 발상은 조세수입을 늘리기는 훨씬 어렵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에 기초한 경제학에 위배된다.

포퓰리스트의 막다른 골목으로 치닫는 것을 막으려면 우리는 포퓰리스트가 매력을 갖는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걸 인지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샌더스가 아이오와 코커스와 뉴 햄프셔 경선이 끝났을 때마다 말했던 '부패한 선거 자금 시스템'과 '조작된 경제' 이야기에는 일리가 있다. 지금의 주류 정치가 민주주의 세계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엄청난 진실이 담겨 있다.

서방 정부들은 무역을 자유화 하고 시장을 개방한다는 훌륭한 목표를 추구하면서 대기업, 그리고 트럼프를 포함한 부유한 개인들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주었다. 스윙 투표자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그들은 다른 모든 사람들, 특히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이익을 등한시했다. 선거 유세를 전문화하면서 그들은 풀뿌리와의 연결과 진정성을 잃고 단조로운 브랜드가 되었다.

현실적 정책을 제시하는 주류 정당들은 포퓰리스트들의 옷과 정책을 훔칠 게 아니라 자신들도 발가벗은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줌으로써 포퓰리스트들에게 응답해야 한다. 이 두 가지 사이에서의 선택이 바로 지금 미국에서 극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공화당 쪽에서는 포퓰리스트 티 파티 운동이 효과적으로 중심을 옮겨서 모든 앞서가는 후보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포퓰리스트 정책을 읊어대고 있다.

트럼프의 포퓰리즘의 보다 현실적인 버전을 제시하고 있는 마르코 루비오와 테드 크루즈는 트럼프의 포퓰리즘에 맞서는 게 아니라 트럼프의 방식으로 싸우고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최근 ABC 텔레비전 토론을 보면, 테드 크루즈는 포퓰리스트의 반 기득권 수사를 빌려와 "나는 언제나 워싱턴의 양당주의 부패에 맞서 미국인들과 함께 하겠다."라고 말했다. 유럽에서도 포퓰리즘의 가장 우려스러운 면은 득표율이 아니라 그들이 중도를 이동시킨다는 점이다.

그러나 힐러리 클린턴은 상당히 다른 방식을 시도하고 있다. 샌더스의 지지자들의 불만이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샌더스가 해결책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뉴 햄프셔 이후 클린턴은 "사람들은 화를 낼 권리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중요한 '하지만'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들은 굶주리고 있다. 그들은 해결책에 굶주려 있다." 샌더스에겐 해결책이 없다는 암시였다. 클린턴은 성인의 정치는 샌더스의 주장처럼 쉽지 않지만, 자신 역시 샌더스가 원하는 것과 똑같은 것들을 여럿 원한다고 조용히 주장했다. 그래서 아이오와에서 결과가 나왔을 때, 클린턴은 자신이 '현 상태가 충분히 좋지 않다'고 믿은 '미국의 개혁자들의 긴 계보에 서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포퓰리즘이 지적하는 우리 정치의 깊은 문제를 인정하는 동시에, 음모론적일 때가 많은 세부 사항과 단순하고 실행 불가능한 해결책은 거부하는, 균형을 잡는 행동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퓰리스트들은 감당할 수 없다며 내쳐서도, 그들에게 너무 많이 내줘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사회는 보다 온건하고 다수가 동의하며, 지루한 주류 정치를 받아들여야만 통합과 진전이 가능하다는 걸 주장해야 한다.

지금 미국의 문제는 이러한 노선의 가장 중요한 지지자들이 사람들이 증오하는 기득권층의 너무나 핵심적인 사람들이라, 신뢰를 얻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포퓰리스트 물결이 2016년에 그치고, 다음 대선 때에는 독립적인 정신을 지닌 진실된 새로운 세대의 주류 정치인들이 반격을 이끌 수 있게 되는 상황이다.

미국은 유럽이 아니다. 그걸 기뻐할 일로 여기든 애도할 일로 여기든, 그 사실은 한 대륙에서 일어나는 일만 관찰하고 '서방'이라고 일반화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유럽 정치의 포퓰리즘에 관한 유사성은 굉장히 두드러진다. 미국과 유럽의 민주주의에 아주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여기에 대해 반응하려면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관찰해야 한다.

허핑턴포스트US의 How Rising Trump and Sanders Parallel Rising Populism in Europe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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