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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와 샌더스의 부상은 포퓰리즘의 힘이 아니다

  • Cas Mudde
  • 입력 2016.03.03 08:49
  • 수정 2017.03.04 14:12
ⓒThe Huffington Post

언론인들과 전문가들이 오랫 동안 기다려왔던 일이 일어났다. 샌더스와 트럼프가 나란히 여러 경선에서 승리한 것이다. 그러면 몇 달 전에 샌더스와 트럼프가 유력한 후보로 부상했을 때 벌써 냈던 '포퓰리즘의 부상' 기사를 다시 써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뉴햄프셔 경선 결과가 나오자 과연 그들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트럼프와 샌더스의 부상이 유럽의 포퓰리즘 부상과 유사한 점'부터 '뉴햄프셔 경선 결과는 포퓰리즘의 힘을 보여준다', '포퓰리스트들이 정상에 올랐다'까지, 메시지는 아주 분명했다. 포퓰리즘이 새로이 등장해 미국 정치 경선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게 새로운 일, 뉴스거리일까?

늘 그렇듯, 그 대답은 어느 정도는 포퓰리즘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논평가들 대부분은 포퓰리즘을 정의하지 않고 주로 '반-기득권 위치'와 '지나치게 단순화된 해결책'을 언급한다. 즉 선거 운동이라는 말이다. 물론 이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그렇다. 그러니 포퓰리즘을 더 광의의 현상인 민중 선동과 선거 운동에서 분리시킬 수 있는 정의를 사용하자. 포퓰리즘은 사회가 궁극적으로 두 개의 동질하며 서로 적대적인 집단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보는 이데올로기이다. 그 두 집단은 '순수한 사람들'과 '부패한 엘리트'이다. 포퓰리즘은 정치는 대중(people)의 전반적인 의지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정의는 미국의 역사가 마이클 카진이 영향력 있는 저서 '포퓰리스트 설득: 미국 역사'에서 사용한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포퓰리즘 학자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카진은 19세기 말의 인민당(포퓰리스트 당)을 포퓰리스트 운동의 시초로 본다. 카진은 포퓰리스트 정서가 늘 미국 사회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으며, 주류 정치인들(리차드 닉슨의 '침묵하는 다수'를 생각해 보라)과 신인 포퓰리스트(텍사스의 억만장자 로스 페로가 가장 유명하다) 양측 모두 써먹었다는 걸 보여준다.

21세기에는 전세계에서 포퓰리즘이 폭발적으로 퍼지며, 라파엘 코레아와 우고 차베스 같은 라틴 아메리카의 좌파 대통령들부터 유럽의 우익 포퓰리스트당 포르자 이탈리아와 국민 전선당까지 다양한 세력이 등장했다. 미국 역시 21세기에 포퓰리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불과 몇 년 전에 오큐파이 월 스트리트와 티 파티를 두고 (지금 포퓰리즘을 이야기하는) 논평가들은 '포퓰리즘의 부상'을 선언하지 않았는가!

여러 모로 볼 때 샌더스와 트럼프는 부분적으로 이 두 가지 운동의 정치적 목소리다. 두 사람 모두 두 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아주 비슷한 정서를 표현하며, 두 운동에 참여했거나 최소한 지지했던 사람들의 응원을 받는다. 대침체에서 은행이 했던 역할과 돈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비판하는 샌더스의 여러 주장은 주코티 공원에서 나왔던 말들과 비슷하다. 공화당 기득권층과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트럼프의 비판 상당수는 티 파티의 핵심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트럼프는 티 파티 풀뿌리의 목소리에 더 가까운데, 이들은 기업이 지배하는 가짜 시민 운동들보다 늘 더 권위주의적이고 이민 배척주의적이었다.

그렇지만 여러 유사성이 있지만, 샌더스와 오큐파이 월 스트리트, 트럼프와 (풀뿌리) 티 파티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포퓰리즘과 관련되어 있다. 오큐파이와 티 파티는 근본적으로 포퓰리스트 운동이었지만, 샌더스와 트럼프는 포퓰리스트가 아니다. 그렇다, 샌더스도 트럼프도 포퓰리스트가 아니다!

오큐파이 월 스트리트의 포퓰리스트 메시지의 핵심은 '99%'와 '1%'로 나뉜 사회의 간극만이 아니었다. 그 간극의 도덕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99%는 선하고 순수하며, 1%는 악하고 부패했다는 것이었다. 오큐파이는 99% 안에서의 차이도 인지하고 있었으며 특히 젠더와 인종을 인식했지만, 동질한 1%에 대해 맞서는 중대한 도덕적 싸움에서 이러한 차이는 결국 2차적이었다. 오큐파이는 궁극적으로 이익이 아닌 가치의 싸움이었다.

샌더스가 수시로 '1%'를 비난하기는 해도, 자신이 '99%'에 속한다는 말은 거의 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샌더스의 담론에서 주된 간극은 계급 간의 투쟁과 같은 이익의 싸움이지, 도덕의 싸움이 아니다. 그가 미국 사회의 최상위 0.1%가 하위 90%와 맞먹는 부를 소유하고 있다고 비판할 때, 그는 0.1%가 아닌 이러한 상황의 도덕성을 개탄한다. 그는 탄탄한 연구에 기반해서 그렇게 한다. 그의 비판은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구조에 대한 것이다. 그는 '기업 미국'과 '월 스트리트'의 '탐욕'에 맞서겠다고 말한다. 그가 '민주주의적 사회주의'라고 잘못 부르는, 그의 이데올로기의 큰 서사에 딱 맞아 들어가는 말이다. 이는 계급의 이익을 토대로 하는 이데올로기다.

트럼프 역시 티파티의 포퓰리스트 메시지 일부를 차용해서 민주당과 공화당 기득권층을 무능하고 거액 기부자들 손바닥에서 논다고 비난한다. 그는 진보적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을 상정하고 비난하기도 한다. 그리고 불법 이민 같은 '정치적 터부'를 깨겠다고 우긴다. 2010년 아리조나 SB1070부터 시작해서 여러 반 이민 법률을 놓고 우린 벌써 몇 년 째 이민 배척주의 담론을 벌이고 있는데 말이다. 닉슨과 레이건 대통령 등 예전의 여러 다른 공화당 정치인들이 그랬듯, 트럼프는 '우리 나라를 되찾고' 싶어하는 '침묵하는 다수'를 대변한다고 주장한다(누구에게서 되찾는다는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그러나 트럼프가 민주당원과 공화당원을 별로 구분하지 않으며 동질한 엘리트의 부패를 욕하지만(무능함을 더욱 욕하기는 한다), 그는 대중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생각할 때만 '대중'을 언급한다. 전반적으로 그는 '대중'의 선함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트럼프가 계속해서 입에 올리는 것은 트럼프다. 포퓰리스트 지도자들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자처하지만, 트럼프는 트럼프의 목소리다. 그는 대중의 지혜, 동질한 대중의 전체적인 부분을 따른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독특한 기술과 경험을 지닌 자신이 '미국'을 위한 최고의 CEO라고 주장한다.

전형적인 엘리트주의 스타일로 도널드는 (평범한) 대중과 다르고 더 낫다고 주장한다. 지난 달 기자 회견에서의 발언을 보라. "나는 보수지만 대중과 잘 어울린다." 자기가 보수라는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주장은 제쳐두고, 그는 자신을, 더 넓게 말하면 보수를 대중과 분리시킨다. 트럼프는 (진짜) 포퓰리스트처럼 자신이 '대중의 하나'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대중은 자신이 그들과 다르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가 지칭하는 대중은 암묵적으로 그의 주요 지지층인 백인들이지만, 그는 히스패닉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등 소수 인종을 이야기할 때도 비슷한 말을 쓴다. 모두 그를 '사랑'한다고 말이다(그가 그들과는 다르지만).

샌더스와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전혀 포퓰리즘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일부는 포퓰리즘 때문이다. 오큐파이 월 스트리트와 티 파티가 몇 년 전 유발시킨 더 넓은 운동을 반영한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샌더스와 트럼프는 포퓰리스트 정치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샌더스는 미국과 유럽 진보 정치의 전통을 혼합한 미국 사회 민주주의자고, 트럼프는 최신 미국적 비즈니스맨 구세주다. 적어도 마이클 블룸버그가 선거에 뛰어들기 전까지는 그럴 것이다. 그러니 포퓰리즘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그들의 선거 운동에 생채기를 내고 신문을 파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두 사람의 진정한 정강을 이해하는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허핑턴포스트US의 The Power of Populism? Not Really!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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