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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맞춤과 가래침 사이에서 | '시청 앞의 키스'와 머리 깎인 어린 엄마의 사진

전후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단을 '역사 바로세우기'의 모범적인 사례로 칭송하는 이들의 나이든 입술을 볼 때면 나는 이 사진을 생각한다. 나는 아기를 끌어안은 팔을 생각한다. 머리가 깎인 여인들의 텅 빈 눈빛을 생각한다. 쏟아지는 가래침과 주먹질을 생각한다. 두 제국주의 국가가 격돌했고, 어느 한편이 패배했다가, 다시 승리했다. 그리고 승리한 쪽은 자신의 역사를 바로세운다고 선언한다. 그것이 그리도 부러운가. 제국주의 국가의 '역사 청산'을 피식민 국가의 후손들이 추어올리는 것이 조금 이상한 풍경은 아닌가. 더 나은 것을 상상하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 김현호
  • 입력 2016.02.18 05:53
  • 수정 2017.02.18 14:12

* <말과활 10호>에 함께 실린 글입니다.

1.

로베르 두아노Robert Doisneau, <시청 앞의 키스Le Baiser de l'hôtel de ville>, 1950.

이 사진은 1950년의 어느 봄날에 파리 센 강의 좌안에서 태어났다. 잿빛 하늘은 흐리고 빛은 부드럽다. 이 사진을 찍은 로베르 두아노는 이런 부드러운 확산광을 '파리의 전형적인 빛'이라 부르곤 했다.

파리의 봄빛이 키스하는 연인의 목과 뺨, 맞닿은 코와 이마, 옷깃과 어깨를 타고 부드럽게 흐른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직 그들만이 멈추어 있는 듯하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어린 연인이라는 것을 알아보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당시 유행하던 더블 재킷을 입고 머리를 멋지게 세운 남자는 애인의 어깨를 부드럽게, 하지만 단단히 쥐고 있다. 날씬한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도 손가락 마디는 굵고 억세다. 허공에 약간 어색하게 멈춰진 남자의 왼손과 여자의 오른손은, 그들이 입맞춤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들의 뒤에는 어렴풋이 파리 시청 건물이 보인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고답적인 건축물이다. 이곳은 파리의 관공서와 회사가 밀집된 비즈니스 지구다. 즉, 어린 연인이 키스하기에 그리 잘 어울리는 장소는 아니다. 특히 센 강을 건너기만 하면 젊은이들의 영토인 카르티에 라탱이 나온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출신의 젊은 사진가 에드 반 데어 엘스켄이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그곳에서 찍은 사진을 모은 <생 제르맹 데 프레의 사랑Een liefdesgeschiedenis in Saint-Germain-des-Prés>에 묘사되는 젊은이들의 삶과 사랑은 거침없고, 또 거칠다.

그러나 로베르 두아노가 찍은 이 사진은 마치 철 지난 유행가처럼 우리의 마음을 간지럽힌다. 이 사진은 통속적인 음조와 가사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는 듯이 애틋하다. 서로의 숨결을 나누던 어린 연인들은 결국 입술을 떼었을 것이고, 각자의 몸 안에서 천천히, 혹은 빠르게 늙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 속의 그들은 입을 맞춘 채로 정지되어 있다. 카메라는 어린 연인들의 키스 뿐 아니라 권위적인 건축물, 굳은 얼굴을 한 채로 오가는 사람들, 심지어 가로등과 자동차까지 함께 동결시킨다. 사진 속에 갇힌 그들은 1950년 봄의 파리가 낭만과 사랑의 공간이었음을 온몸으로 증언하는 듯하다.

2.

1944년 8월, 파리 남서부의 도시 샤르트르에도 해방이 왔다. 미군 제24군단의 전차가 나치를 몰아내고 샤르트르에 입성한다. 밝게 빛나는 태양 아래 프랑스 공화국의 삼색기가 당당히 나부낀다. 군중들은 마치 축제날처럼 즐겁게 떠들고, 웃고, 박수를 치며 거리를 행진한다. 젊은이와 늙은이, 소녀와 중년의 남자 할 것 없이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바삐 걸음을 옮기는 두 여자가 있다. 머리는 거칠게 빡빡 깎였고, 한 여자는 배냇옷을 두른 아기를 안고 있다. 두려움에 가득찬 여자들은 차마 군중을 바라보지 못한다. 품속의 어린것을 감싸안은 여자의 팔은 서글프다. 안경을 쓴 오른편의 여인은 아이의 외할머니다. 역시 머리를 깎인 그녀는 딸의 왼팔에 자신의 오른팔을 대고 있다. 서로를 감싸안거나 팔을 걸지 못하는 그녀들의 체온은 무력하다. 누군가 억센 손으로 잡아끈다면 속절없이 떨어지고 말 것이다.

이 사진을 찍은 로버트 카파는 기쁨에 가득한 시민들이 자신을 끌어안고 키스를 퍼부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두 여인들에게는 따귀와 침 세례가 비처럼 쏟아졌다고 했다. 겁에 질린 엄마는 아기에게 날아오는 가래침을 모두 막아줄 수 있었을까. 아마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여인들의 죄목은 나치에 부역했다는 것이었다. 어린 엄마는 스물세 살, 품 속의 아기는 고작 석 달이 된 갓난쟁이였다. 아기의 아빠는 독일인, 그러므로 그녀는 매춘부, 밀고자, 잡종의 어미였다. 종전 후 2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프랑스 곳곳에서 머리가 깎이고 린치를 당했다. 레지스탕스 소년병들은 화사하게 웃으며 여자들의 이마에 나치의 철십자 문장을 그려넣었다. 특히 독일 남자와 살거나 매매춘을 했던 여자들은 전쟁 전의 이웃들에 의해 옷이 벗겨지고 몸에 타르로 글씨가 씌어진 채로 거리에 내몰려 두들겨맞으며 끌려다녀야 했다.

전후 프랑스의 나치 부역자 처단을 '역사 바로세우기'의 모범적인 사례로 칭송하는 이들의 나이든 입술을 볼 때면 나는 이 사진을 생각한다. 물론 사진 속 사람들의 웃음에도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저 여인들 역시 한때 저렇게 낄낄대고 웃었을지도 모른다. 이웃을 밀고하거나, 소중한 무언가를 갈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아기를 끌어안은 팔을 생각한다. 머리가 깎인 여인들의 텅 빈 눈빛을 생각한다. 쏟아지는 가래침과 주먹질을 생각한다. 두 제국주의 국가가 격돌했고, 어느 한편이 패배했다가, 다시 승리했다. 그리고 승리한 쪽은 자신의 역사를 바로세운다고 선언한다. 그것이 그리도 부러운가. 제국주의 국가의 '역사 청산'을 피식민 국가의 후손들이 추어올리는 것이 조금 이상한 풍경은 아닌가. 더 나은 것을 상상하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아닐까.

로베르 두아노와 로버트 카파의 카메라는 전후의 프랑스라는 동일한 시공간을 찍었지만, 그들이 본 광경은 전혀 다르다. 그렇다면 당시의 프랑스는 대체 어떤 곳이이었을까. 머리가 깎이고 알몸이 된 여자들이 개처럼 질질 끌려다니는 잔혹한 곳이었는가, 어린 연인들이 거리에서 입맞추는 낭만의 장소였는가.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두 장의 사진이 이루는 간격을 우리는 한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우리는 가급적이면 로버트 카파를 잊고 로베르 두아노를 기억하려 한다. 과거는 지나갔으므로, 최대한 아름다워야 하므로. 로베르 두아노의 <시청 앞의 키스>는 최소한 250만 장 인쇄되었고, 엽서만도 50만 장 이상 팔려나갔다.

3.

로베르 두아노의 사진 속에서 정지한 채로 있던 어린 연인이 세상에 다시 등장한 것은 1992년이었다. 그들의 이름은 프랑소아 보르네와 자크 카르토였다. 프랑소아는 예순두 살, 자크는 예순다섯 살이 되어 있었다. 그들을 불러낸 것은 그 사진의 식지 않는 인기였다. 두아노는 사진 속의 인물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수천 통의 전화와 편지에 시달렸다. 심지어 장과 드니 라베른이라는 노부부는 두아노를 고소했다. 자신들의 사진을 몰래 찍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때까지 로베르 두아노는 '사람들의 꿈을 깨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사진의 내력과 정황에 대해서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파리 시민들은 그런 두아노를 사랑했다. 그는 1차대전 때 아버지를 잃은 고아였고, 어렸을 때 보내진 공예 학교에서 배운 석판술과 판화 기술로 레지스탕스에게 가짜 신분증을 만들어 주던 젊은 전사였다. 무엇보다도 파리를 가장 아름답고 관능적으로 찍은 사진가이기도 했다. 언젠가 두아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삶을 있는 그대로 찍고 싶지는 않아요. 삶이 이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방식으로 찍죠."

그런 아름다운 사진이야말로 뉴욕에게 이미 세계 문화와 예술의 수도를 넘겨준 파리 시민들이 바라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두아노는 독일 남자와 잤다는 이유로 머리를 깎이던 여자를 사진찍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두아노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조적으로, 네 살 위의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데사우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여성 나치 부역자를 찍었다. 브레송은 훗날 두아노에게 자신의 사진 에이전시인 매그넘에 가입할 것을 권했지만 두아노는 거절했다.

수줍음이 많았던 로베르 두아노는 <시청 앞에서의 키스>를 마냥 좋아하지는 않았다. 피상적이고, 잘 팔리는, 창녀 같은 사진이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사진은 의심할 여지 없이 두아노의 대표작이었다. 두아노가 만든 책과 전시에서 여러 번 표지로 사용되었고, 액자가 되어 세계 곳곳에 걸려 있다. 지금도 그 사진은 끊임없이 계속 태어나고 있다

법정은 로베르 두아노에게 사진의 모델과 그 정황에 대해 해명할 것을 명령했다. 두아노는 입을 열었다. 파리에서 키스하는 연인들을 찍어달라는 <라이프>지의 의뢰가 있었다. 법적 문제가 걱정되어 배우를 고용했다. 배우, 배우라고? 이 사진이 연출이었다는 말인가? 파리 시민들은 동요했다. 어린 숨결과 숨결이 맞닿은 그 아름다운 키스는 사실 돈을 받은 배우들의 연기였다는 말인가? 비난이 쏟아졌다. 사진 속에서 입맞추던 자크와 프랑소아는 갑자기 나타나 약삭빠르게도 사진을 팔아서 받은 수익 중 9만 프랑을 배분해 달라는 소송을 걸었다. 두아노가 직접 프린트하고 서명해서 증정한 사진이 증거로 제시되었다. 두아노는 승소했지만, 이미 이 사진은 예전처럼 아름답고 신비롭지는 않게 되었다.

자크와 프랑소아는 실제로 연인이었지만, 그들의 관계는 아홉 달만에 끝났다. 프랑소아는 무명이었지만 계속 배우 일을 한 반면, 자크는 연기를 포기하고 와인 생산자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왕년의 어린 여배우는 꽤 능글능글하게 대답할 줄 아는 나이든 여자가 되어 있었다. "두아노 씨는 우리가 멋지다고 했어요. 카메라 앞에서 다시 한번 키스해 달라고 부탁했죠. 물론 우리는 신경쓰지 않았죠. 계속 키스만 하고 있었거든요. 그때는 정말 하루 종일 키스만 했어요."

이 말은 <시청 앞에서의 키스>를 둘러싼 조작 논쟁을 복잡하게 만든다. 열대어처럼 계속 입을 맞춰대는 어린 연인이 있다. 카메라 앞에서 그걸 한번 해 달라고 부탁하면, 그것은 조작인가? 사진가가 부탁한 순간 그들의 키스는 가짜 키스가 되는가? 과연 사진이 기록하고 재현할 수 있는 동시대란 무엇인가? 복잡한 문제다. 알쏭달쏭한 말을 우리에게 남긴 프랑소아는 2005년에 열린 한 미술품 경매에 로베르 두아노로부터 선물받은 사진 프린트를 팔아서 15만 5천 유로를 받았다. 그녀가 일흔다섯 살이 되던 해였다.

4.

지금의 샤르트르는 레지스탕스의 영웅, 장 물랭이 투쟁하던 곳으로 기억되고 있다. 외르 에 루아르 주의 샤르트르 지사였던 그는 독일군을 거부하고 프랑스 망명정부와 교신하며 레지스탕스를 조직했다. 그러나 1943년, 동료의 배신으로 인해 체포되어 '리용의 학살자' 클라우스 바르비에게 고문당하다 죽었다. 고작 마흔네 살, 샤르트르 시가 해방되기 일 년 전이었다. 손톱이 수없이 짓찧어지고 쇠못이 박혔지만 위대한 장 물랭은 어떤 정보도 누설하지 않았다.

지금도 샤르트르 시 곳곳에서 장 물랭의 흔적을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당연히 사진 속의 여인과 아이가 그곳에 있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독일 방송국 ZDF의 저널리스트 귀도 크노프는 샤르트르에 가서 그들의 행방을 찾았지만 거대한 침묵에 부딪쳤다. 지방 신문에 낸 광고는 묵살당했고, 현관문은 코앞에서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는 사진 속의 어린 엄마가 십 년 동안 추방당한 후 샤르트르로 돌아왔다는 것을 간신히 알아냈다. 그녀는 이웃들의 따돌림을 견디다 1966년에 40대 중반의 나이로 죽었다. 딸은 숙모에게 맡겨졌다가, 파리로 떠났다. 성인이 된 그녀는 귀도 크노프에게 자신과 어머니에 대한 어떤 말도 해주지 않았다. 만약 지금도 살아 있다면, 배냇옷을 입은 사진 속의 어린 아기는 이제 일흔세 살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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