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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마라 1956 | 병신년(丙申年)의 선거

1956년의 선거전은 대통령 이승만과 남은 실질적인 유일한 야당 후보인 진보당의 죽산 조봉암 선생님 간의 대결로 좁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못살겠다, 갈아 보자"며 이승만 독재의 종식을 소리 높혀 외쳤던 제1야당 민주당은 이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어처구니없게도 민주당은 투표용지가 이미 인쇄되어 이름이 올라가 있지만 불귀의 객이 되신 자신들의 대선 후보인 고(故) 해공 신익희 선생님에게 '투표'하라고 한다.

  • 바베르크
  • 입력 2016.02.08 05:15
  • 수정 2017.02.08 14:12

오늘은 음력으로 설날이다. 음력으로 해가 바뀌는 것은 입춘(立春) 때부터라는 말도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안 그래도 한 달도 더 전에 양력 새해를 맞으며 신년인사를 나눴다가 이번에 또 설인사를 나눌 판인데, 거기에 입춘이 새해의 시작이라는 주장까지 추가해, 스콜라적 늪에 빠진 논쟁을 벌이는 것은 아닌듯 싶어서 이 글에서는 오늘 음력으로도 새해가 되었다고 치고, 올해 즉 병신년(丙申年)에 관한 썰이나 좀 풀어볼 생각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육십갑자(六十甲子)인지라 60년마다 같은 명칭의 해가 돌아 오기에, 2016년 직전의 병신년(丙申年)은 지금부터 60년 전인 1956년이다. 이 글의 주제는 바로 1956년에 일어난 사건들이 되겠다.

1. 전조(前兆) (1): 창조적 수학(응?)을 강조한 대통령

응답도 안할 듯한 1956년은 무려 자유당 때로 국부(國父, 풉) 이승만이 대통령이던 시절이었다. 이 해도 올해처럼 선거의 해로 제3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이미 두 번이나 대통령을 해먹었으나 당시 헌법이 금지한 3선 출마를 하려고 이미 두 해 전인 1954년에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을 통해 자신의 3선 출마의 길을 열어 놓은 상태였다.

사사오입 개헌이란 무엇인가? 1954년 당시 국회에서 이승만의 3선 개헌안 통과에 필요한 3분의 2 선이 그 무렵 국회의원 총수 203명을 감안하면 136표였는데, 불과 한표가 부족한 135표의 개헌 찬성표가 나와 개헌안이 부결이 되었다. 그러자 당시 여당은 낙담하고 야당은 환호하는 사태가 조성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국회에서 개헌안 부결된 다음 집요한 노인네 이승만은 수학자를 불러서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이므로 사사오입하면(!) 결국 135가 되니까 개헌안이 통과된 것이라고 우긴 것. 다시 열린 국회본회의에서 이리 희한불금의 주장을 내세워 부결된 3선 개헌안이 실은 통과된 것이라 억지를 부리니 이것이 바로 어처구니없는 사사오입 개헌의 전말이었다. 솔로몬의 재판도 아니고, 사람인 국회의원을 사사오입하며 버리는(응?) 웃픈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다.

2. 전조 (2): 유력한 대선 주자를 끝내 품지 못하고 내친 민주당

당연히 이런 여당인 자유당의 폭거에 당시 야당 의원들은 맹렬히 반발하니 그들이 일단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며 결성한 것이 호헌동지회(護憲同志會)였다. 즉 이승만이 억지를 부려 사사오입 개헌으로 3선이 가능하게 뜯어 고치기 전의 구(舊)헌법을 지키는 동지들의 모임이라는 뜻인 셈. 당시 야당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독재자 이승만의 이런 폭거가 야권 세력들을 단결시켰으니 그래서 이 호헌동지회에서 출발해 그 이듬해인 1955년에 탄생한 것이 통합야당인 민주당 되겠다. (작년에 더불어민주당이 창당 60주년이라고 주장했던 것은 바로 이렇게 민주당의 창당이 1955년에 이루어진 것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런데 이 민주당에 꼭 들어가고 싶어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유력한 대선주자급 정치인이 있었으니 바로 대한민국의 초대 농림부 장관과 2대 국회에서 국회부의장을 지냈으나 나중에 이승만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한 비운의 정치인 죽산 조봉암 선생님이었다. 죽산은, 해방 직후에, 남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의 두목인 셈이던 조선공산당 당수인 박헌영을 매섭게 비판한 전향한 공산주의자로 대한민국 정부에 참여했고 이승만에 의해 초대 농림부장관을 지내며 토지개혁의 기초를 닦은 공이 있었다.

그러나 6.25 때 피난 온 죽산을 부산에서 이승만이 만났을 때 (적(敵)이 점령한) "서울에서 인민위원장이 되었다던데 왜 여기 나타났느냐?"고 반문했다던 어처구니없는 일화가 보여주듯이 죽산은 좌익 전력 때문에 당시 남한 정계에서 끊임없이 의심을 받았다. 그래서 죽산이 이승만 독재에 반대하는 정치인들이 모두 모여서 만든 민주당에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참여하겠다"고 하였으나 남한이 미국 군정청의 지배를 받던 시절 군정청의 경무부장을 지냈던 조병옥과 같은 민주당의 구파(舊派, 친일 지주 중심의 한국민주당 세력)를 중심으로 한 죽산 비토 세력의 반대가 강경했다. 그래서 죽산의 민주당 합류는 불가능해졌고 할 수 없이 죽산은 제3당인 진보당을 창당해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이른바 혁신계 인사들을 규합하게 된다.

이렇게 이승만의 독재를 종식시켜야만 한다는 크나큰 대의를 앞에 두고서도 1956년 병신년(丙申年)은 제1야당인 민주당이 유력 정치인 조봉암을 포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당인 자유당에 두 주요 야당인 민주당과 진보당이 맞서는 대선 정국으로 열리게 되었다.

3. 기이한 도입부: 전국을 뜨겁게 달군 관제데모의 열기

그런데 이승만 이 꼴통 노인네는 선거를 불과 두어 달 앞두고서 자신을 대선후보로 선출할 여당인 자유당에 폭탄선언을 한다. 즉 앞에서 보았듯이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꼼수를 써놓고서도 갑자기 이승만은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 이승만은 뜬금없이 미국도 국부 조지 워싱턴이 재선 임기만 채우고 물러났고 자신은 늙어서 이제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젊은 사람을 뽑으라며 불출마 선언을 떠억 한 것ㄷㄷㄷ 도대체 이 노인네가 대통령을 무려 세 번씩이나 해먹겠다고 사사오입이라는 무리를 해가면서까지 헌법을 바꿔놓는 난리를 쳐놓고서는 이제와 뜬금없이 불출마라니 1956년 병신년(丙申年) 정국은 갑자기 소란해졌다. 야당들은 이 노인네가 무슨 꿍꿈이일까 싶으면서도 일단 만시지탄이나 환영한다고 하였고, 여당인 자유당은 오히려 멘붕 분위기가 되었다.

그런데 슬슬 이상한 조짐이 나타났으니 국부(풉) "이승만 박사를 다시 모셔야 한다"는 '자발적인' 서명운동이 맹렬히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이승만의 3선 출마를 촉구하는 관제 데모가 들불처럼 일어났고, 경찰의 방관(웃음) 중에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앞에서는 울부짖고 혈서를 쓰며 이승만 박사의 번의(飜意)를 촉구하는 '시위대'가 연일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의외로 이승만의 불출마 의사는 요지부동이었다.

과연 이승만은 왜 때문에 불출마 선언 쇼를 한 것이었을까?

그 이유는 (사실이든 아니든, 믿거나 말거나) 반도 정치의 영원한 흑막이자 최종 보스, 종결자,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 바로....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과 소련 간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냉전이 한창 진행되던 1950년대, 자유민주주의의 챔피언을 자임하던 미국이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어마어마한 전비를 들이고 5만명 넘는 미군의 희생 끝에 지켜낸 남한이 이제 헌법을 뜯어 고쳐 세 번씩이나 대통령을 하겠다는 노인네의 통치를 받는 꼴이 되게 생겼으니 미국은 이승만에게 당시 국무장관인 덜레스를 보내어 불출마를 종용하려고 했던 것. 그런데 이미 이승만이 3선 불출마를 선언해 놓은 상태였으니 대선에 이미 안 나가겠다고 한 사람에게 나가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머쓱한 일이 있겠는가. 그래서 덜레스는 불출마 얘기는 꺼내지도 못하고 떠나간다(이 부분 이야기는 이병주 선생님의 소설 [산하]에 의함).

그리고, 덜레스가 떠나가자 이승만은 기다렸다는 듯이 일주일도 안 되어서, 열화와 같은 민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우웩-) 대선에 출마하기로 했노라고 번복한다.

이제 이런 능구렁이 같은 독재자 이승만을 저지하는 것은 결국 국민들이 투표로서 심판하는 방법밖에 남지 않게 된 것이다.

4. 헛된 희망이 된 "못 살겠다, 갈아 보자!"

1956년 대선에서는 여당인 자유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이승만, 부통령 후보로 이기붕이 나왔으며, 제1야당인 민주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신익희, 부통령 후보로는 장면이, 그리고 제2야당인 진보당에서는 대통령 후보로 조봉암, 부통령 후보로 박기출이 출마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지금처럼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으면서도 지금과는 달리 부통령을 두고 있음이 눈에 띈다. 또한 부통령의 선출 방식은 지금의 미국처럼 이른바 티켓(ticket) 방식, 한 정당의 대통령과 부통령을 하나로 묶어 유권자들이 투표하는 방식이 아니라(즉 미국의 지난 대선에서는 민주당의 바락 오바마 대통령 후보-조 바이든 부통령 후보를 한 묶음으로, 공화당의 미트 롬니 대통령 후보-폴 라이언 부통령 후보를 한 묶음으로 하여 유권자들은 양자택일을 하였었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따로따로 뽑는 방식이었다. 즉 이론적으로는 유권자들은 대통령은 자유당의 이승만을 찍고,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을 찍는 방식으로도 투표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이런 시스템의 차이는 뒤에서 보듯이 이 해의 선거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해방 직후 오랜 미국에서의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국부라는 칭송을 받으며 귀국했던 이승만이었으나 그의 편협하고 독선적인 성격은 '군사적인 편의'에 의해 그어졌다는 38선이 정치적 경계선으로 바뀌어 조국의 분단을 초래하는데도 영향을 끼쳤다. 더구나 이승만은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때는 3일 만에 서울을 버리고 도주하면서도 서울시민들에게는 계속 항전하라는 '녹음방송'을 남기고, 하나뿐인 한강인도교를 끊는가 하면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이 수복되고 난 다음에는 적반하장격으로 적치하에서 3개월이나 죽을 고생을 한 서울시민들을 북한의 소위 인민군에 부역했다며 조사하겠다고까지 하였으니 이렇게 분단과 전쟁, 그리고 더딘 전후 복구를 거치며 1956년쯤 되어서는 이승만의 인기는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

그러니 당시 제1야당인 민주당이 들고 나온,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유명한 선거 구호 중의 하나가 된 "못 살겠다, 갈아 보자!"는 분단과 전쟁, 독재, 그리고 궁핍에 찌든 당시 국민들에게 큰 호소력을 지녔었다. 그래서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 해공 신익희 선생님의 한강 백사장에서의 유세에는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30만 인파가 몰려들어 당시 국민들의 정권 교체의 열망을 보여 주었다. 그 무렵 신문은 이 집회가 한강 백사장에서 열린 것에 착안하여 당시 군중 수가 사상(史上) 최대이자 사상(沙上, 즉 모래 위) 최대라고 하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국민들은 독재정권의 숨통이 끊어지나 하고 기대하였다.

하지만 이제 승리를 다지기 위해 호남 유세에 나서려고 야간 열차에 몸을 실었던 해공 신익희 선생은 그 해 5월 5일 열차 안에서 급서(急逝)한다.

..........................

정권 교체의 열망을 한몸에 모았던 유력 야당 후보가 어이없게도 선거 유세 기간 중에 사망한 것이었다.

1956년 선거에 나선 민주당 신익희 대통령 후보와 장면 부통령 후보의 포스터. ©국가기록원

5. 어처구니없는 결말: 죽은 신익희는 산 이승만을 이길 수 없건만...

이제 1956년의 선거전은 대통령 이승만과 남은 실질적인 유일한 야당 후보인 진보당의 죽산 조봉암 선생님 간의 대결로 좁혀지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못살겠다, 갈아 보자"며 이승만 독재의 종식을 소리 높혀 외쳤던 제1야당 민주당은 이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

어처구니없게도 민주당은 투표용지가 이미 인쇄되어 이름이 올라가 있지만 불귀의 객이 되신 자신들의 대선 후보인 고(故) 해공 신익희 선생님에게 '투표'하라고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죽산이 민주당 창당 무렵 합류하겠다며 애원하였으나 민주당은 이를 차갑게 거절한 적이 있는데, 이제 와 죽산이 실질적으로 유일한 야당 후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은 "죽은 사람에게 투표하라!"는 세계 선거 역사상 전무후무할 어처구니없는 방침을 발표함으로써 다시 한 번 죽산에 대한 뿌리 깊은 원한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원한이 이승만 독재를 끝장내야만 한다는 자신들이 그동안 계속해서 외쳐왔던 대의보다도 우선한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만 것이었다.

죽산은 민주당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방침을 비판하며 남은 선거 운동 기간 백방으로 뛰었으며, 자당의 부통령 후보인 박기출을 사퇴시키기까지 하며 민주당의 이성에 호소하였으나 민주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선거 결과는?

이승만이 5백만 가까이 이상을 획득하여 3선에 성공하였고, 죽산은 200여만 표를 얻으며 분전하였으나 낙선.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돌아가신 해공 선생에게 돌아간 이른바 추모표가 백수십만표나 되었다. 죽은 사람에게 '투표'하라는 어처구니없는 민주당의 '선거운동'이나 이에 동조한 당시 유권자들의 행태나 그저 깊은 한숨만 나오게 하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민주당이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대선 후보는 사망하여 이미 당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죽산에 대한 사무친 반감 때문에 "추모표를 던지라"(라고 쓰고 죽산에게 투표하지 말고 이승만 독재가 연장되어도 우리는 상관 없다)"라고 하지 않았다면 선거 결과 자체가 충분히 바뀔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러한 가상 시나리오는 대통령 선거와 같이 행해진 부통령 선거의 결과를 보면 더욱 분명해지는데 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당의 장면이 자유당의 이기붕을 꺾고 당선되었던 것.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부질없는 상상이고, 1956년 병신년(丙申年)의 대통령 선거는 독재자 이승만에게 세 번째 임기를 선사해 주고 이렇게 황당하게 막을 내렸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이승만은 이렇게 해서 4년을 더 집권하였고, 1960년에는 기어코 네 번째로 선거에 나와서 이번에는 전면적인 부정선거 후 '당선'되었다가 4.19 혁명으로 쫓겨났다. 죽은 사람에게 투표하라는 어처구니없는 '선거운동'에 분루(憤淚)를 삼켜야 했던 죽산은 이승만이 쫓겨나기 불과 반년 전 간첩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당하였다. 이번에도 민주당은 죽산의 구명을 위해 나서지 않았다. 민주당은 4.19 혁명에 나섰던 국민들의 핏값 덕에 드디어 정권을 잡았으나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인 독재자 박정희가 일으킨 5.16 군사쿠데타에 어이 없이 무너져 정권을 잃었다.

60년 만에 돌아 온 병신년(丙申年)에 치러지는 올해의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제발 이런 1956년 선거에서와 같이 안타깝고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진보당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죽산 조봉암(왼쪽).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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