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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독재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게다가 현재 국정 역사교과서는 모든 법적 절차를 무시하거나 어기고, 편찬기준도 저자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집필에 들어갔다.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한 교과서를 만드는 과정이 전혀 교육적이지 못하다. 이 과정을 학생들 역시 목도하고 있다. 학생들이라고 교과서만을 통해 지식과 통찰을 얻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이 사회의 권력 남용과 민주적 법질서의 문란을 목격하고, 이것이 현실에서 당연하고도 가능한 것으로 배우고 받아들이게 될까봐 우려스럽기도 하다.

  • 장수지
  • 입력 2016.02.04 09:20
  • 수정 2017.02.04 14:12
ⓒYOUTUBE

2015년 10월 12일 교육부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행정예고를 발표한 이래 필자는 이렇게까지 역사학도로서의 정체성을 강렬하게 자각한 때가 있었던가 싶은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직 '학자'라고 불리기에는 부족한 상황이지만 역사를 배우고 연구하는 일을 업으로 삼기로 한 사람으로서, 이른바 국정교과서 사태는 내가 이 업을 지속하는 이유까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도록 만들었다.

"역사학자의 99%가 좌파"라는 식의 선동은 이미 몇년 전 '영화계를 좌파가 장악했다'던 모 교수의 발언과 같은 케케묵은 색깔론의 재탕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소련이 해체되고 대학 시절부터는 포스트모던 이론서들을 읽으며 공부한 내 또래의 세대가 좌파에 선동당해 역사학계에 발붙이고 있다는 그들의 가정(또는 상상)은 다시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다. 그러나 별다른 근거조차 없는 그러한 가정을 마치 당면한 현실인 양 규정한 채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국정화를 밀어붙이는 현 정부의 태도를 보면서 무력감도 느낀다. 이 무력감은 이 사회의 정치적 결정에 내 힘이 닿지 못한다는 데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이는 학자들의 수년 혹은 평생에 걸친 연구 행위와 업적이 단지 권력자가 그 연구에 정당성이 없다고 주장한다는 이유만으로 일말의 전문성도 없는 자들에 의해 묵살되거나 매도당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실망감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역사학계와 시민을 무시한 국정화 강행

역사학 연구는 역사상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발굴하고, 발굴한 사실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리고 기록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사회의 사건과 이슈들도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한 법인데, 과거의 일이라고 해서 더 간단하게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역사학자는 자신의 판단을 증명하기 위해 최대한 다양한 사료를 수집하고, 자신의 능력이 닿지 못하는 부분은 선학과 동료 연구자들의 견해나 기존 연구를 참고하게 된다. 어떤 사관(史觀)에 매여 과거의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현재의 학계에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편향이 존재한다고 하면 그것은 시대적 한계거나 혹은 지배적인 가치관으로 인한 것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그 편향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역사학의 지평을 넓혀온 것은 역사의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한 주변적 존재들의 노력 혹은 그들에 대한 관심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위해 역사학계의 편향과 그에 따른 '균형'을 주장하는 자들의 요구는 학문적으로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99%의 역사학자들'이 이미 인정한 사실에 대한 왜곡을 요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현재 국정 역사교과서는 모든 법적 절차를 무시하거나 어기고, 편찬기준도 저자의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집필에 들어갔다. 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한 교과서를 만드는 과정이 전혀 교육적이지 못하다. 이 과정을 학생들 역시 목도하고 있다. 학생들이라고 교과서만을 통해 지식과 통찰을 얻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이 사회의 권력 남용과 민주적 법질서의 문란을 목격하고, 이것이 현실에서 당연하고도 가능한 것으로 배우고 받아들이게 될까봐 우려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시기를 지내면서 고무적인 점은 역사가 권력에 의해 재단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느끼는 시민들의 다채로운 목소리가 학교, 거리, 온라인 등 여러 곳에서 지속적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역사학이 이 사회에서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는 것, 또한 권력이 일방적으로 역사를 서술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널리 동의를 얻고 있음을 방증해준다.

쏟아지는 반대 목소리에서 희망을 보다

역사연구자들과 교육자들 역시 이 사태를 좌시하지 않았으며, 작년 10월부터 거리집회나 역사학대회 등에서 국정화 반대 의견이 지속적으로 쏟아져나왔다. 그러던 중 역사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이 직접 국정화 문제에 대면하고 함께 저항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만인만색(萬人萬色) 연구자 네트워크'를 만들게 되었다. 이 단체는 처음에는 행정예고 기간에 교육부에 국정화 반대의견서를 제출하는 활동으로 시작하여, 국정화 반대 집회 당시 길에서 만나는 시민과 국정교과서와 관련해서 직접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고, 인터넷 언론에 글을 싣기도 했다. 지난 1월 23일 정식 출범 이후로는 국정화에 대한 저항뿐 아니라 본인들의 연구를 교류하고 다양한 통로로 전파하기 위한 활동을 준비하고 있다.

학문 연구의 결과가 의미를 가지려면 학계에서 인정받고 다시 사회구성원들에게 가치있는 지식, 세계관, 사고방식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 '만인만색'은 연구주제의 온라인 연재나 팟캐스트 방송, 출판 등의 다양한 매체를 통해 역사학을 '전파'할 예정이다. 그 목표는 역사 연구의 결실을 대학 강의실이나 학계 내부를 넘어 더 다양한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다. 역사학(나아가 모든 분야의 학문)의 자유롭고 다양한 연구와 공유가 전체 사회의 발전 및 성숙에 필수적이라는 데 동의하는 시민이 많아질수록 국정 교과서가 표방하는 '올바른 역사관'과 같은 독선적인 태도가 무력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필자는 청소년들이 적극적으로 국정화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면서, 앞으로의 역사 기록이 이 자유롭게 발언할 줄 아는 세대의 힘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도 가지게 되었다. 교육을 받는 자들마저 거부하는 교육이야말로 정부가 그토록 좋아하는 세계화, 자유주의와 상치되는 주입식 세뇌일 뿐이다. 게다가 오늘날처럼 각종 지식을 다양한 통로로 얻을 수 있는 사회에서 획일적인 역사교과서로 과거에 대한 어떤 허상을 심어줌으로써 나라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한다는 기획 자체가 실현 가능한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지금 당장은 국정교과서를 배포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국정교과서는 학계를 향한 폭력과 독재적인 세뇌교육 시도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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