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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 젊은 사람이 정말 필요해요"

얼마 전 후배에게 귀농을 고민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긍정적으로만 말해 줄 수 없었단다. "농사를 시작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요. 하늘과 동업하는 거라 항상 마음처럼 잘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1~2년 하다 말면 너무 손해라 선뜻 권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그는 "농촌에 젊은 사람이 정말 필요하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귀농을 고민할 때 붙잡을 건 오직 자신의 소신. "자기가 생각한 대로 끝까지 할 수 있다는 마음만 있다면 되지 않을까요? 돈을 벌겠다고 오면 정말 어려울 것 같아요. 가치를 보고 와야 버틸 수 있을 거예요."

충남 부여 소사공동체에서 딸기 농사지으며 토박이씨앗 지키는 김지숙 씨

"채종포를 공동경작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도, 토박이씨앗을 지키는 게 가치 있고 필요한 일이라는 데 모두 동의한 거죠.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자기 농사일로도 바빠 죽겠는데 내 시간, 내 힘을 쓰기가 쉽지 않아요. 저도 농사지은 지 햇수로는 10년 됐지만 하우스 농사만 해서 텃밭 농사를 잘 몰라요. 그래서 '언니'들이 '풀 매자' 하면 했지 제가 먼저 끌고 가지 못했죠. 올해에는 텃밭농사를 잘 아는 분을 영입해서 더 잘해 볼 거예요."

글 이선미(살림이야기 편집부) \ 사진 류관희

"농촌에 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딸기 비닐하우스 앞 농막에서 김지숙 씨를 만났다. 논산에 있는 육군항공학교에서 헬리콥터 나는 소리와 인근 고속도로에서 차가 달리는 소리가 자주 들렸다. 시끄럽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곳이 너무나도 익숙한, 더 이상 '귀농자'가 아닌 주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대학 다닐 때 이곳 부여로 농활을 왔었다. 그리고 2006년 2월 졸업한 후 그해 3월에 아예 살러 왔다.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에서 활동하며 농민운동을 제대로 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농활을 왔는데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부분이고 혼자 사는 할머니들도 많이 계신 거예요. 젊은 사람이 농촌에 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사회에 농업이 필요하고, 농촌에는 젊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귀농했기 때문에 농사일이 힘든지 안 힘든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막상 해 보니 생각한 것보다 훨씬 힘들긴 했지만.

같은 해 12월에는 결혼도 했다. 남편 권혁주 씨는 2000년 부여로 귀농해 김지숙 씨가 농활을 왔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가 귀농을 결심하고 농촌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할 때, 남편 역시 농민회 활동을 하고 있어 통하는 게 많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주변 사람들이 그렇게 남편과 이어 주더란다. 가정을 이루고, 그는 본격적으로 농사에 뛰어들었다.

처음 정착한 동네에 한살림 생산자가 많았던 덕분에 주변의 추천을 받아 귀농한 해부터 바로 한살림 농사를 짓게 됐다. "처음 제안을 받았는데 취지가 너무 좋은 거예요. 환경도 살리고 안정적으로 농사지을 수 있으니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죠. 행운이었어요." 관행농사짓다가 농약중독으로 힘들어 유기농으로 바꾸는 사람도 많은데 그는 관행농사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당시 살던 신암리가 한살림 딸기 주산지다 보니 농사를 처음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쭉 딸기를 키워 왔다. 농사라고는 아무것도 모르던 때에는 주변 사람들한테 일을 배웠다. "옆에 다들 딸기 농사를 지으니까요. '보미야, 꽃 솎아야 돼' 하면 꽃 솎고, '노란 잎은 떼어야 돼' 하면 떼고 그랬죠." 자체교육도 받고 딸기작목반에서도 많이 배워서, 10년차인 지금은 비닐하우스 여섯 동(7천 ㎡)에 심는 딸기 모종을 직접 기른다. "5년 전부터 자가 육묘를 했어요. 모종을 사서 여기 다 심으려면 1천만 원은 넘게 들 거예요."

그런데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2년 연속 딸기 농사가 좋지 않다. "지금쯤이면 딸기가 주렁주렁 맺혀야 하는데.... 한참 많이 딸 때는 하루에 150~200㎏씩 따도 딸기가 많아서 새벽에 나와서 따도 다 따질 못했어요. 그런데 지난해엔 일반 농약을 쳐도 잘 안 죽는 벌레가 어디서 들어와서 뿌리를 갉아먹는 걸 전혀 잡지 못했어요. 올해는 땅속 양분이 불균형해서 농사가 잘 안되나 싶어 흙이랑 물이랑 다 검사를 의뢰했고요. 원인을 찾아야 해결을 하니까요. 농사가 일 년만 뻐그러져도 몇 년이 힘든데 연타를 맞아서 쉽지가 않아요. 올해는 농사일에 더 매진해야죠."

비닐하우스 한 동에는 대파를 길러 인근 지역 초등학교에 친환경급식 식재료로 내고 있다. "충남은 학교급식에 친환경농산물을 많이 사용하기 위해서 애쓰는 편"이라고.

흰메수수, 반달콩, 제주참깨, 갓끈동부, 호랑이강낭콩.... 낯설지만 왠지 친근한 이름의 토박이씨앗을 정갈하게 모아 두었다. 이 씨앗들은 한살림 가을걷이 잔치한마당이나 농민회 행사, 지역 장터에서 무료로 나누어 준다.

놀라지 마시라. 남북 여성농민 교류에 따라 무려 북한 개성까지 다녀온 '귀한 몸' 되시겠다. 장목수수, 밭찰벼, 거창왜조 등 다양한 토박이씨앗들.

올해부터는 '1 여성생산자 1 토종 지키기'를 하기로 했다. 한 농가에서 한 작물씩 심어서 씨앗도 불리고, 가능하다면 한살림에 토박이 물품으로도 내고 싶어서다. 김지숙 씨가 맡은 건 개구리참외와 사과참외. 어떤 맛일지 궁금하다.

숨은 씨앗 찾기 토박이씨앗 지키기

딸기 농사와 함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건 바로 토박이씨앗 받기이다. 8년 전 전여농에서 시작한 토박이씨앗 받기를 재작년 한살림 부여연합회 여성생산자회에 제안했는데, 공동체 회원 '언니'들이 흔쾌히 찬성해서 함께하게 됐다. 처음 제안한 그가 자연스럽게 채종포를 담당하게 됐다.

그렇게 받은 토박이씨앗이 40가지가 넘는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라게 하고 싶어 값없이 나누는데, 씨앗을 그냥 준다고 해도 믿지 못하고 얼마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 "한살림 가을걷이 잔치한마당에서도 나누고 농민회 행사에서도 나눴어요. 토박이옥수수 중에 쥐이빨옥수수는 팝콘으로 만들 수 있는데, 모종을 키워서 어린이날에 아이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고요. 토박이씨앗은 키우기는 좋은데 수확량이 적어 잘 안 심는 것 같아요."

《토종곡식》(백승우·김석기, 2012)에 보면 토박이씨앗의 세 가지 장점이 나온다. 첫째, '유전적 다양성 유지'다. 기후변화에 맞서 그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유전자를 찾는 일도 다양한 토박이 씨앗이 살아 있으면 훨씬 수월할 것이다. 자연은 물론이고 인간사회도 잡스러워야 서로 균형을 이루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둘째, '농민의 농부권 확보'다. 현재 농민들은 씨앗회사에서 씨앗을 사다가 심는다. 씨앗을 육종하고 이어가는 일은 이제 개인의 차원을 넘어 기업에 의해서 주도되고 있고, 국가는 이를 산업으로 보호하고 육성한다. 그러한 과정에서는 농민의 권리, 곧 농부권이란 개념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셋째, '문화의 보존과 계승'이다. 여러 가지 토박이씨앗으로 농사짓는 집에서는 하다못해 요리만 해도 예전 맛을 살린 조리법 등을 활용해서 할 것이다. 농사짓는 방법도 새로운 품종으로 농사짓는 것과 달리 예전의 방식을 잘 살리거나 응용하여 농사지을 수도 있다. 또한 그러한 농사를 짓기 위하여 필요한 농기구들이며 농사력 등도 고유한 방식을 유지할 것이다. 이러한 모든 행위가 바로 문화이다.

올해부터는 '1 여성생산자 1 토종 지키기'를 하기로 했다. 한 농가에서 한 작물씩 심어서 씨앗도 불리고, 가능하다면 한살림에 '토박이 물품'으로도 내고 싶어서다. 2015년 한살림에 공급된 토박이 물품은 가지, 곰취, 냉이, 상추, 솔부추, 귀리, 피, 돼지감자, 생강, 순무, 여주, 조선오이, 찰옥수수, 풋고추, 쥐눈이콩콩나물, 선비콩, 아주까리콩, 청태콩, 풋울타리콩, 황태콩 등 60가지가 넘는다. 여기에 김지숙 씨와 '언니'들이 합류한다면 가짓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우리가 처음부터 토박이씨앗을 많이 심을 수는 없겠지만 몇 봉지를 수확하든 일단 시작하려고요. 토박이 물품을 내게 된다면 당연히 여성생산자 이름으로 나가야겠죠? 어떻게 보면 토박이씨앗을 심고 받는 건 여성생산자를 위한 일을 만드는 것이기도 해요."

토박이씨앗 실태를 파악하는 일도 중요하다. "숨어 있는 씨앗이 참 많아요. 하지만 어른들이 돌아가시면 씨앗도 사라져요." 2011년 겨울 부여군여성농민회에서 부여지역 토박이씨앗 실태조사를 했는데, 어느 어른이 팔 것과 먹을 것의 씨앗을 따로 갈무리해 놓았더란다. "같은 메주콩이라도 토박이가 더 '꼬숩고 맛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내 새끼들은 이걸로 메주 쒀서 보내 준다'고요. 번거로워도 씨앗을 따로 받아 둔 이유가 있었던 거죠."

《내 손으로 받는 우리 종자》(안완식, 2007)에 따르면 충분히 잘 마른 씨앗을 병이나 비닐봉투 혹은 밀봉할 수 있는 용기에 담아 냉장고의 냉동실에 넣어 보관하면 작물에 따라 또는 저장 전의 종자 상태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5~10년 정도는 충분히 보존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발아율은 떨어지기 때문에 토박이씨앗을 심고 받는 일은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

온 가족이 모였다. 첫째 보미는 아빠 앞에, 둘째 서현이는 엄마 앞에 서고 막내 단이는 아빠 품에 안겼다. "우리 동네에서 초·중·고등학교 다 합해서 학교 다니는 건 우리 애들밖에 없어요." 아이가 귀한 농촌에서 김지숙 씨네 삼남매야말로 보물 중에 보물일 것이다.

귀농, 소신과 끝까지 할 수 있다는 마음이면 돼

얼마 전 후배에게 귀농을 고민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긍정적으로만 말해 줄 수 없었단다. "농사를 시작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요. 하늘과 동업하는 거라 항상 마음처럼 잘되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1~2년 하다 말면 너무 손해라 선뜻 권하기 어려워요."

하지만 그는 "농촌에 젊은 사람이 정말 필요하다"는 말을 여러 번 되풀이했다. 그가 "공동체에서 10년째 막내이고 어딜 가나 막내"라고 하니 심각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귀농을 고민할 때 붙잡을 건 오직 자신의 소신. "자기가 생각한 대로 끝까지 할 수 있다는 마음만 있다면 되지 않을까요? 돈을 벌겠다고 오면 정말 어려울 것 같아요. 가치를 보고 와야 버틸 수 있을 거예요."

그렇다면 막 귀농한 20대 후반의 김지숙 씨는 무엇이 힘들었을까? 그건 바로 '외로움'이었다. "젊은 사람들 모임이라고 가면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으로 저한테는 엄마뻘이었어요. 처음에는 운전도 못하고 그래서 신랑 없으면 집에만 있고, '서울 촌년'이라 깜깜하면 나가지도 못하고 한여름에도 문 꽝꽝 다 닫고 있었죠."

첫아이를 낳고 난 후 외로움은 덜해졌지만, 농촌에서 아이를 키우는 건 농사일보다 더 힘들었다. 부부 둘 다 서울 출신으로 주변에 연고가 없어 농사지을 때 아이를 봐줄 사람이 없었다. "여름에는 하우스 안이 너무 더우니까 오전 5시에 나갔다가 오전 10시까지 일하고 들어오고, 오후 3시에 다시 나가서 오후 8시에 들어오고 해요. 그런데 애는 아침 9시에 어린이집으로 가서 오후 4~5시에 오니까 아이를 돌보려면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죠. 그렇다고 돈이 많아서 품을 사서 다 하거나 돌보미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래서 하루는 이른 새벽 아이가 자는 동안 부부가 헤드랜턴을 달고 딸기를 딴 적이 있단다. 집과 하우스가 아주 가까울 때였다. "그날 따라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고양이 소리가 들리길래 '고양이가 왜 이렇게 우나?' 했어요. 그런데 집에 와 보니 애가 마당에서 울고 있는 거예요. 큰애밖에 없을 때인데, 그 다음부터는 절대 아이를 놓고 둘이 다 나와서 일하지 않아요."

농사지으면서 육아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둘만 낳고 안 낳으려고 했는데 막내둥이는 뜻하지 않은 선물로 찾아왔다. "지금은 애들이 10살, 8살, 5살로 좀 커서 그나마 나아요. 전에는 농사일과 육아를 같이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냥 버틴 거죠." 농촌의 생활사이클에 맞는 복지가 절실한 이유다.

농사지으랴, 농민회 활동하랴, 아이 키우랴 정신이 없다 보니 부부 둘이서는 농사를 다 못 짓는다. 그래서 캄보디아 출신 이주노동자 두 명을 고용해 함께 일하는데도 시간이 늘 부족하다. "주변에서 '농민회 활동하면 굶는다, 집안 꼴이 이게 뭐냐'고도 하시지만 같이 활동하거나 지지해 주는 분들도 있고 이해도 많이 해 주세요."

농민회 활동은 그를 농촌으로 이끈 '첫 마음'이자 힘의 원천이다. "'행복바우처'라고 문화생활을 하기 어려운 여성농민들이 미용실이나 영화관에서 일정 금액을 쓸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있어요. 이런 정책을 제안하기도 하고 토박이씨앗을 지원하는 조례 제정이나 직불금 보조 등을 요구하기도 해요. 농민회 활동으로 직불금이 생기는 걸 보면서 힘을 얻어요."

김지숙 씨는 농민운동을 하고 싶어서 농촌으로 와 한살림 생산자가 됐다. 그러면서 생명을 살리는 농사를 짓게 됐고, 농민의 삶을 살리는 활동도 더욱 안정적으로 할 수 있게 됐다. 그의 안에서 '살림'은 이렇게 연결된다. 돌아오는 길에 토박이상추씨앗을 조금 얻어 왔다. 조만간 나도 이 씨앗을 싹 틔워 '살림의 연결고리'에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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