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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도시를 창조하다 | 뉴52 고담의 스카이라인

솔로몬 웨인이 생각하는 도시는 기독교 문명을 찬란하게 꽃피우며, 야만성으로부터 그것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성채와 요새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 어느 날 그런 그의 앞에 사이러스 핑크니라는 건축가가 나타난다. 이 건축가는 자신의 이름으로 지은 건물이 하나도 없는 말 그대로 무명 건축가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원대한 비전이 있었는데, 바로 대도시를 설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큰 교각이 강을 가로지르고 높은 빌딩이 솟아 있는 도시의 모습을 스케치북에 여러 장 그려서 가지고 다녔다.

  • 이규원
  • 입력 2016.02.01 13:10
  • 수정 2017.02.01 14:12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19] 어둠의 도시를 창조하다

─ 뉴52 고담의 스카이라인

뉴52 배트맨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올빼미 법정』. 2011년 런칭한 뉴52 배트맨 시리즈의 강점은 새로운 배트맨의 이야기를 표방하면서도 75년을 넘게 쌓아 온 배트맨 세계의 진수들, 오랜 세월 수많은 작가가 마치 집짓기 블록처럼 하나하나 정성을 다해서 쌓아 올린 배트맨 세계의 한층 한층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뉴52 배트맨 시리즈를 처음 읽을 때는 더 풍성해지고 세련되어진 고담과 배트맨 세계관에 한번 놀라고, 다시 읽을 때는 그 안에 구석구석 감추어진 옛 배트맨의 자취에 다시 놀란다. 기존의 배트맨을 버리지 않고 전설의 요소요소를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품어 원형을 최대한 그대로 보존하려고 애쓰는 작가진의 마음, 그들이 품고 있는 존경심이 페이지마다 묻어 나오는 것이다.

도시를 파괴하고 어둠의 고담을 세우다.

한 예로 고담 타워와 고담의 스카이라인에 대한 묘사가 그러하다. 『올빼미 법정』 전반부에 보면 브루스 웨인이 옛 고담 타워에 올라가 혈전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슈로 치면 뉴52 《배트맨》 2호에 해당되는 이 부분은 고담의 스카이라인으로 시작해 고담의 스카이라인으로 끝나는 챕터다.

이 챕터의 원전은 우선 1992년 《배트맨》, 《레전드 오브 다크 나이트》, 《디텍티브 코믹스》 3개의 배트맨 타이틀에 걸쳐 진행되었던 '디스트로이어'라는 이름의 한 스토리 아크로 거슬러 올라간다.

3개의 배트맨 타이틀에 걸처 진행된 '디스트로이어' 스토리 아크의 표지들.

왼쪽부터 《배트맨》, 《레전드 오브 다크 나이트》, 《디텍티브 코믹스》.

(이미지 출처 왼쪽: http://dc.wikia.com/wiki/Batman_Vol_1_474?file=Batman_474.jpg, 가운데: http://dc.wikia.com/wiki/Batman:_Legends_of_the_Dark_Knight_Vol_1_27?file=Batman_Legends_of_the_Dark_Knight_Vol_1_27.jpg, 오른쪽: http://dc.wikia.com/wiki/Detective_Comics_Vol_1_641?file=Detective_Comics_641.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솔로몬 웨인, 도시의 건설자

'디스트로이어'는 고담에 대형 빌딩이 연이어 폭파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배트맨이 고담의 탄생과 관련된 옛 이야기 하나를 알게 되는 내용이다. 이야기의 중요 인물은 2명인데, 한 명은 브루스 웨인의 조상인 솔로몬 웨인이라는 인물이다. 솔로몬 웨인은 보스턴 태생이고,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후 고담에서 판사로 재직한다. 젊은 시절 솔로몬에게 고담은 동쪽에는 대서양이, 서쪽에는 큰 강이 펼쳐져 마치 뉴욕 같은 지형 조건을 갖춘, 대도시가 형성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솔로몬은 이곳이 큰 도시로 성장할 수 있다는 믿음과 자신이 도시의 개척자가 되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재능으로 제일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고담이 물질적, 도덕적으로 모두 풍요로운 도시로 발전하도록 법과 질서를 제대로 확립하는 일이었다. 그리스 신화 속 정의의 여신 디케는 한 손에는 법전, 또 한 손에 저울을 들고 정의를 수호하였지만, 솔로몬 웨인은 왼손에는 법전, 오른손에 성경을 들고 기독교적인 도덕과 법률을 바탕으로 재판하였다. 범죄자들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은 너그럽지도 가혹하지도 않았고 언제나 원칙대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사이러스 핑크니, 도시의 설계자

솔로몬 웨인이 생각하는 도시는 기독교 문명을 찬란하게 꽃피우며, 야만성으로부터 그것을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성채와 요새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 어느 날 그런 그의 앞에 사이러스 핑크니라는 건축가가 나타난다. 이 건축가는 자신의 이름으로 지은 건물이 하나도 없는 말 그대로 무명 건축가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원대한 비전이 있었는데, 바로 대도시를 설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큰 교각이 강을 가로지르고 높은 빌딩이 솟아 있는 도시의 모습을 스케치북에 여러 장 그려서 가지고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솔로몬 웨인이 사이러스의 그림을 보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사이러스는 자신의 건물이 단순한 건물이 아닌 도시의 수호신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의 고담 타워 디자인에는 주위를 둘러서 가고일 상이 박혀 있는데, 이 가고일은 먼저 시민의 눈에 공포스럽게 비침으로써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어서 감히 악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하고, 또 하나는 전통적으로 악령과 귀신을 막는 수호 석상처럼 외부로부터 도시에 들어오는 악한 기운을 막고, 또한 도시에서 악의 세력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기능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것은 중세 건축에서 가져온 개념이긴 했는데, 핑크니는 이를 바탕으로 도시 전체를 꾸미려 했다.

도시를 선과 악의 싸움으로 본다는 점에서 핑크니의 이런 생각은 솔로몬의 도시에 대한 생각과 묘하게 맞아떨어졌고, 그래서 솔로몬은 이 디자인이야말로 앞으로 고담을 세계에 독보적인 스타일의 도시로 알릴 수 있는 고담의 미래라고 받아들였다. 솔로몬은 그 그림을 들고 고담의 지역 유지를 불러 모아 설득하여 도시 건설의 비용을 마련했고, 자신 또한 전 재산을 투자했다. 그렇게 건축된 최초의 빌딩이 바로 '고담 타워'였다는 것이다. 고담 타워에 붙어 있는 석상들에 대한 이야기는 『올빼미 법정』 2장 첫 부분에서도 자세하게 서술되고 있는데, 그 원전은 1992년의 '디스트로이어' 스토리 아크다.

『올빼미 법정』 33쪽에 그려져 있는 웨인 타워.

'데스트로이어' 스토리 아크에 등장한 원안을 충실히 따른 모습이다.

(이미지 제공: 세미콜론)

1989년 영화 「배트맨」이 고담을 바꾸다.

'디스트로이어' 스토리 아크에 나오는 고담 타워는 『올빼미 법정』의 타워와 똑같은 모양이다. 그런데 이 스토리 아크가 나온 1992년은 팀 버튼 배트맨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인 「배트맨 리턴즈」가 개봉한 해로, 팀 버튼이 그린 고딕풍의 음울한 고담에 전 세계가 열광하던 시기다. 사실 그 이전의 1970년~1980년대 배트맨을 보면 고담 시의 모습이 영화처럼 음침하게 그려지지 않았다. 가령 『배트맨 앤솔로지』 156쪽에 있는 1977년작 《디텍티브 코믹스》 474호를 보면 고담은 1977년 당시 미국 대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그리고 있지, 뾰족한 첨탑, 큰 굴뚝에 가고일이 있는 탑들로 가득한 모습이 아니다. 『배트맨 앤솔로지』 174쪽에서 이어지는 1980년작 《DC 스폐셜 시리즈》 21호에서 그려지는 스카이라인 역시 직사각형 반듯한 건물들이 서 있는 일반 도시에 가깝다.

1977년 《디텍티브 코믹스》 474호에 그려진 고담.

밝은 원색으로 그려진, 전형적 미국 현대 대도시의 모습이다.

(이미지 제공: 세미콜론)

1989년 당시에 팀 버튼을 도와서 「배트맨」 영화의 고담 시를 디자인한 인물인 안톤 퍼스트는 고담을 어두운 고딕풍의 도시로 그려냈고, 영화 이후 1990년대 초기의 고담은 이 분위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DC는 아예 '디스트로이어' 스토리 아크를 통해 안톤 퍼스트의 고담 스케치를 실제 배트맨 만화의 일부분으로 만들어 버리기로 했다. 당시 배트맨 만화 이슈를 보면 뒷부분에 다음 아크에 대한 예고형 광고를 실었는데, 거기에 안톤의 스케치를 배경으로 하는 광고들이 계속 실렸고, 실제 '디스트로이어' 스토리 관련 이슈들의 커버 역시 안톤의 스케치를 연상시키는 배경 위에 배트맨이 서 있는 모습을 그렸다. 그리고 '디스트로이어' 해당 이슈 중 하나의 끝부분에는 솔로몬 웨인과 사이러스 핑크니의 스토리를 요약한 내용과 함께 안톤 퍼스트의 스케치들을 여러 장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잔뜩 어두운 색을 머금은 고담을 그린 첫 대형 시리즈가 바로 『배트맨: 나이트폴』 3부작이었다. 『나이트폴 2부 밤을 지배하는 자』 19쪽과 『나이트폴 3부 기사들의 종언』 100쪽을 보면 둘 다 안톤 퍼스트의 스케치를 기반으로 그리고 있음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안톤 퍼스트의 영화 배트맨의 설정화에 영향을 받은

『배트맨: 나이트폴』의 고담.

(이미지 출처:

위 왼쪽: http://lifewithoutbuildings.net/wordpress/wp-content/uploads/2009/05/gotham-1.jpg,

위 오른쪽: http://4.bp.blogspot.com/-EImLaff9VOo/UY5TJu9M4gI/AAAAAAAAXlA/BlZAVT3dD1A/s1600/Oldgotham-3.jpg,

아래 왼쪽: 『나이트폴』 2권

아래 오른쪽: 『나이트폴』 3권, 세미콜론)

1990년대 말 들어서 DC에서는 '디스트로이어' 때처럼 다시 한 번 고담을 무너뜨리고 그 톤을 수정하는 작업을 하게 되는데, 바로 대지진이 일어나 고담이 파괴되고 도시를 다시 재건한다는 내용의 『배트맨: 노 맨스 랜드』다. 이때 재건된 고담의 이미지가 『올빼미 법정』 2장에 쓰인 고담의 스카이라인이다. 잘 보면 강가 부분만 검게 처리되어서 잘 안 보일 뿐, 나머지 건물이 전부 같다.

『배트맨: 노 맨스 랜드』에서 정립되어 『올빼미 법정』 까지 이어진 고담 시의 스카이라인.

(이미지 출처:

위 : http://batmangothamcity.net/wp-content/uploads/2012/05/post-quake-Gotham.jpeg, 아래: 세미콜론 )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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