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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남자는 장님이다

  • 박세회
  • 입력 2016.01.28 07:03
  • 수정 2016.01.31 13:29

우리 부부는 결혼 전 아내가 살던 효창동 투룸에서 1년 동안 동거를 했다. 짐을 가지고 그녀의 집에 들어간 지 3일쯤 되었을 때 아내는 퇴근한 내게 물었다. "뭐 바뀐 거 없어?"라고. 이 질문은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하는 질문이라고 과대 포장되어있지만 우리는 절대 이 질문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다만 싫어할 뿐이다. 지나치게 어려운 시험 문제를 싫어하지 무서워하지는 않지 않나? 하여튼, 시황을 살피는 증권사 애널리스트의 눈빛으로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핀다. 오랜 경험상 섣부른 오답은 감점이다. 그러나 뭔가가 보일 리가 없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모든 남자는 장님이다. (나만 장님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모든 남자'라고 믿으면 좀 든든하다.)

여자들에게는 잘 보이는 걸 잘 못 보는 남자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나는 특출나게 아내가 유독 잘 보는 걸 잘 못 보는 편이다.

그녀가 말했다. "수국! 저렇게 큰 수국 꽃다발이 떡하니 테이블에 놓여 있잖아!" 그녀가 씻으러 간 사이 수국 다발을 바라보며 우리의 미래가 이런 식이라면 그다지 밝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우린 사귄 지 1년 반 만에 결혼했다. 사귀자마자 동거에 들어간 셈인 건 써놓고 보니 비밀이다. 데코레이션 장님에게 신혼은 정말이지 새로운 도전이었다. 아내는 신혼집에 꽤 빨리 정을 붙이고는 소품으로 거실과 방을 꾸미기 시작했다. 퇴근하면 신발장 앞에 소포 상자 꾸러미가 몇 개씩 정렬되어있었다. 아내는 매일 팔을 크게 벌리며 외쳤다. '짜잔'. "예쁘지?" 수학의 정석 실력 편을 펼쳐놓고 눈가리개로 눈을 가리고 풀어보라는 주문을 받은 심정. 소포 꾸러미의 개수가 그나마 힌트였다. 5개. 대리석으로 된 디퓨저. 솔방울 모양으로 만들어진 캔들 홀더(나중에 발바닥을 찧어 보고서야 쇳덩이로 되어있다는 걸 알았다), 바다에서 주워온 것 같지만 실제로는 돈을 주고 샀다는 돌멩이(이게 문진일 줄이야.), 유리병에 들어있는 파란 이끼(알고 보니 수생 식물 '마리모'라고 한다), 말린 천일홍(다 죽은 걸 왜 대체 돈을 주고 사는 걸까?).

모든 게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고 대체 어떻게 쓰는 건지 어림짐작도 할 수 없었으며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신혼을 첫 한 달 동안 나의 점수는 대략 40점 안팎이었을 것이다. 그제야 나는 이 질문이 진짜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뭐 바뀐 거 없어?" 어떤 시험에서도 나는 그런 점수를 받아본 적이 없다.

나는 안경을 쓰고 시력 검사판 제일 아래 두 줄에 있는 비행기와 나비를 구분할 수 있다. 스포츠 신문에 실린 다른 그림 찾기도 그다지 못하는 편이 아니었고 최근에 인터넷에서 유행했던 팬더 찾기도 20초 만에 완수한 바 있다. 그런데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어제와 달라진 집의 데코레이션은 찾아낼 수 없었다. 데코 뿐이 아니다. 신혼은 공감각적 경험이다. 내 후각은 좋은 편이다. 양고기를 살 때면 냄새로 선도를 체크하고 로즈마리와 딜을 향만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디퓨저의 향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어때? 향 좋지?" 라고 물어보는 아내에게 난 단 한 번도 진심으로 '좋아'라고 얘기한 적이 없다. 내 '좋아'라는 대답 속에는 '나는 이게 어제의 디퓨저와 다른 향인지 전혀 모르겠지만, 당신이 좋은 향을 샀을 테니 나도 좋다고 믿는다'는 뜻이 포함되어있었다. 결혼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계약이고 믿는다는 건 결국 종교다. '이게 무슨 향인지 모르겠지만 저는 좋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게 결혼한 남자의 결기다. 하얗고 동그랗게 생긴 무인양품의 가습기(알고 보니 이게 디퓨저라고)가 집에 들어오고 나서는 정말이지 내 후각에 대한 신뢰가 싹 사라졌다. 인건 인지심리학의 영역이다. 과연 저 하얀 연기에서 정말 어제와 다른 냄새가 나는가?

신혼은 내게 데코성 시각장애와 향수성 후각상실증 진단만을 내린 게 아니었다. 이 병은 정말 우연한 계기로 발견되었다. 나는 감정 맹인이었다. 결혼 후에 '언프리티 랩스타'라는 음악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다. 여성 래퍼들이 대결을 펼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아내도 그 프로그램을 즐겨봤다. 당시 다니던 잡지사에서도 기획 회의에 종종 언프리티 랩스타의 출연진 인터뷰가 거론되곤 했기에 어쩔 수 없는 심정으로 아내와 본방을 사수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봐도 그 프로그램이 재미가 없었다. 치타가 키썸에게 '어이구 내 새끼'라고 하며 어르고 달래고, 제시는 육지담을 친동생처럼 아끼는 모습이 조금 이상했달까? 23살짜리 병장에게 21살짜리 이등병이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군대의 악습이 생각나는 장면이었다. 게다가 허세로 가득 찬 제시라는 여자에게 왜 다들 열광하는가?

내가 이렇게 얘기하자 아내는 말했다. "자긴 이 프로그램을 완전히 잘못 보고 있다"고. 이 프로그램을 보는 목적은 여자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 그 각본 없는 드라마를 보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그녀는 내게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육지담과 키썸은 왜 제시와 치타를 '언니 언니' 하면서 따라다니는가? 그녀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강한 우두머리의 오른팔로 생존을 연장하려는 보호본능이라고 설명해 줬다. 제시가 왜 인기가 많은가? 그녀는 흑역사가 있는 육지담을 첫눈에 끌어안은 제시의 모습에서 한 살 많은 선배의 같지도 않은 술주정을 면박주는 삼수생 언니의 아우라를 느껴보라고 권했다. 출연진들이 산이를 왜 그리 얄미워하는가? 그녀는 산이가 바로 촬영장의 분위기를 좌지우지하는 헤어 실장님이라고 설명했다. 에디터로서 바로 이해가 됐다. 화보 촬영을 할 때 한 시간 동안 연예인의 머리를 만지며 단독으로 말을 걸 수 있는 헤어 실장님의 입술에 그날 촬영의 모든 성패가 달려있기 때문이다. 헤어 실장님이 마음만 먹으면 촬영 끝장내는 건 시간문제다. 아내의 설명을 듣고 나자 언프리티 랩스타가 비로소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감정 인지장애라고 고급지게 얘기했지만 사실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나는 눈치가 없다. 그 증거는 내가 태어나서 눈치가 없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이다. 눈치가 없는 줄 모른다는 게 눈치가 없는 사람의 가장 큰 단점이다. 아내에게 '어쩌면 내가 눈치가 없는지도 모르겠다'고 고백했을 때 아내가 나를 보던 놀란 눈빛이 아직도 선선하다. "설마 그걸 몰랐던 거야?" 나는 같은 논리로 눈치가 없는 사람은 자신이 눈치가 없다는 걸 모르니 그때그때 설명해줘야 한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물었다. 그런데 대체 내가 언제 눈치 없게 굴었어?

아내는 잠시 얼이 나간 듯 눈에 초점을 잃더니 "어디부터 시작할지 생각 좀 해볼게"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장모님과 가구 단지에 혼수를 고르러 갔을 때 거대한 3인용 전동 리클라이너 소파에 앉아 "역시 소파는 가죽 리클라이너"라며 해맑게 웃던 나는 정말 눈치가 없었다. 그녀가 옆에서 "그런데 너무 디자인이 추하다"고 눈치를 줬지만 나는 계속 맘에 쏙 든다고 우기며 "자기 맘에 안 들면 다른 거로 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장모님은 "저렇게 좋아하는데 다른 걸 어떻게 사니"라며 결국 그 거대하고 추한 소파를 사줬다. 우리 부모님이 신혼집에 처음 오셨을 때, 아내가 부엌에 가서 커피를 찾는데 못 찾고 헤매자 내가 "하긴 부엌은 주로 내가 쓰니까 뭐가 어딨는지 잘 모르는구나"라고 면박을 줬다고 한다. 물론 나는 전혀 기억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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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제는 전부 장가를 간 대학 시절의 동기 5명을 만나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눴다. 우리 중에 거실에 있는 소품을 세 개 이상 기억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대학 시절이었다면 새벽 5시까지 이어졌을 술자리는 속전속결로 각 두 병씩 비우고 오후 11시에 파했다. 결혼은 6시간 어치 사람다운 모습으로 친구들을 귀가시켰다. 완성된 남편은 세상에 없다. 모든 여자는 장님인 남자를 데려와 조금씩 보듬어 가며 키워야 한다. '환불 불가. 교환 가능'. 처음에 아내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와우! 오늘 바꾼 디퓨저의 향기가 새로 산 드라이 플라워랑 정말 잘 어울리네"라고 외치는 남편을 구하지 못했다는 데 실망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점차 나의 장애를 개선해야 할 단점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의 현상 내지는 존재하는 풍경 정도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저기에는 인테리어 소품을 보지 못하고 향수의 향을 못 맡는 남자가 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애석하게도) 나의 남편이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우리는 한 달에 한두 번 친구들을 불러 식사를 한다. 아내는 나보다 직장이 멀어서 집에 항상 조금씩 늦게 들어오느라 평일에 손님을 맞을 때면 데코레이션의 완성은 나의 차지다. 집안의 형광등은 모두 끄고, 켜야 하는 초는 전부 4개. 방마다 있는 디퓨저를 틀고 화장실에도 항초를 피운다. 꺽다리같이 키가 큰 거실의 조명은 직사가 아니라 벽면에 반사되게 방향을 바꾸고 벽에 붙여둔 테이블은 식당의 중앙으로 옮긴다. 나는 이걸 다 적어 놨다. 이건 일종의 컨닝 페이퍼다. 그렇게 몇 번을 하고 나니 우리 집에 있는 소품들의 위치를 다 외우게 되었다. 이제는 꽃이 바뀌면 바로 알아챌 수 있다. 내 친구들과 있을 때는 그다지 큰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아내의 친구들과 있을 때는 술을 줄이고 말을 아낀다. 웃음의 타이밍은 한 템포 늦게. 모두가 웃을 때 웃는다. 눈치가 없다는 걸 최대한 숨기기 위한 전략이다. 아직 디퓨저의 냄새는 구분하지 못하지만, 이것만으로 나는 내가 나아졌다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은 베이비에 기고한 글을 수정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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