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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立場) 없는 정치

고(故) 신영복 교수가 남긴 말 중에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의 형태"라는 말이 있다. '입장'이 아니라 칼자루 쥔 권력자와의 거리감이나 충성 여부로 정치가들의 소속이 분류되는 나라에서 무리를 이룬 집단 구성원 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며, 국민은 오직 선거 때만 필요할 것이다. 신영복식으로 다시 말하면 그것은 '관계의 최저 형태' 혹은 무관계다. 그들은 오직 자기를 위해 정치한다는 말이다.

  • 김동춘
  • 입력 2016.01.27 06:26
  • 수정 2017.01.27 14:12
ⓒ연합뉴스

며칠 전 타계한 고(故) 신영복 교수가 남긴 말 중에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의 형태"라는 말이 있다. 같은 입장을 갖는 것, 그것은 같은 철학과 가치관을 갖는 사람들이 동일한 목적을 향해서 함께 일하는 관계, 즉 동지(同志)라고 부르는 사이이며 주로 사회운동이나 정치활동을 함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그런데 최근 야당의 분열, 특히 과거 새정련에 몸담았다가 안철수의 국민의 당으로 가거나 심지어 여당인 새누리당으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그 전에 어떻게 같은 당에 있었는지 의심스럽고, 한국에서 정당은 입장이 동일한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권력을 위한 도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90년 3당 합당과 같은 정당정치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건도 있었지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하에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아무런 해명도 없이 여당으로 들어간 일도 흔하다. 정치 선진국 같으면 모두가 당장 퇴출당할 대상이지만, 그들은 재선, 삼선의 관록을 자랑한다.

정견도 소신도 없이 이익과 권력을 쫓아

논어에 '군자(君子)는 화이부동(和而不同)하고 소인(小人)은 동이불화(同而不和)'라는 말이 있다. 군자는 남과 어울리지만 입장과 주관을 지키고, 소인은 무리를 지어 다니지만 불화를 일삼는다는 말이다. 즉 소인은 입장보다는 이해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이므로 그들의 아첨이나 충성을 믿지 말 것이며, 군자의 주관과 소신을 무겁게 여기라는 말로 들린다.

이렇게 보면 한국 정치는 언제나 입장을 가진 '군자'를 보기 어렵고, 이익에 따라 이리 붙고 저리 붙는 '소인'이 살아남는 구조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입장'을 내세운 자기편 당 대표까지 따돌리고 내치지 않았는가 친박, 진박, 비박, 친노, 반노, "진실한 사람, 의리 있는 사람, ... 배신, 의리" 도대체 이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형용사들이며, 후진적 풍경인가

'입장'이 아니라 칼자루 쥔 권력자와의 거리감이나 충성 여부로 정치가들의 소속이 분류되는 나라에서 무리를 이룬 집단 구성원 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며, 국민은 오직 선거 때만 필요할 것이다. 신영복식으로 다시 말하면 그것은 '관계의 최저 형태' 혹은 무관계다. 그들은 오직 자기를 위해 정치한다는 말이다.

한 언론사의 조사에 의하면 이번 총선 후보로 등록한 1,022명 중, 기업인은 노동자의 5배나 되고, 성공한 엘리트가 전체의 55%를 차지한다고 한다. 경제활동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 자영업자 중에서 후보로 등록한 사람은 전체의 10%도 미치지 못한다. 결국 55%의 후보자들, 명문대 졸업장 고위관리나 전문직 경력, 그리고 몇억 원 이상의 돈을 조달할 수 있는 사람이 또다시 국회의원이 될 것이다. 선거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보인다. 그런데 이런 경력과 조건을 가진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되면 '입장'의 차이가 드러날까 여.야로 갈라져 있다 한들 실제 얼마나 다를 것이며, 경제, 노동 복지 사안에 대해 다른 정책이 나올 수 있을까 결국 '입장 없는 정치'는 '다른 입장이 진입할 수 없는 정치'의 결과일지 모른다. 그것은 엘리트 독재요 민주주의의 죽음이고, 민중의 항구적인 배제다.

화장과 말에 현혹되면 평생 노예 신세

정치가들의 탓만은 아니다. '입장'을 보기보다는 자신과의 친소관계, 지역·연고를 중시해온 한국 유권자들의 행태가 이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생각과 사상,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봉쇄하고, 노동운동을 불온시한 이 불모의 분단 냉전 체제, 거대 여야의 정치 독점과 단순다수의 선거제도가 보다 근본적인 원인일 것이다. 정치이념의 스펙트럼 중 한쪽만 열어 놓았으니 정치나 사회에서 학벌과 출신 지역이 제일 중요해지고, 무정견, 무입장, 복종형 인간만이 살아남게 된 것이 아닐까?

이런 나라에서 정당정치의 활성화, 소신과 정견을 가진 정치 리더의 등장도 기대할 수 없고, 국가의 백년대계 구상은커녕 당장 '헬 조선' 극복도 어렵다. 입장이 분명한 몇 소수정당이 힘 있는 제3당이 되거나, 제1야당이 획기적으로 변해야 세상이 바뀔 것이다.

그러나 당장 투표를 해야 하는 유권자들은 어찌할 것인가 철학과 이해가 충돌하는 사안에 대해 후보자가 어떤 과거 '입장'을 취했는지, 그들의 경력을 보면서 그 입장이 그냥 머리에서만 나온 선거용 구호인지 '마음이나 발(체험)'에서 나온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화장한 얼굴과 현란한 말'에 현혹되면 평생 노예 신세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 글은 다산연구소의 다산포럼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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