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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이 사먹던 '덕선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tvN/한겨레

▶ 드라마는 힘이 셌다. 많은 사람들이 드라마가 불러낸 향수에 울고 웃었다. 드라마의 힘은 지나간 시절의 오롯한 ‘재현’에 있었다. 재현이 온전하지 못했다면 드라마의 힘도 약했을지 모른다. 1980년대의 향수가 가득한 ‘쌍문동 10통 2반’ 골목길을 찾아가 봤다. 대규모 재개발은 없었지만 떡볶이 집도, 덕선이가 다닌 학교도 실재했다. 쌍문동 사람들은 드라마가 불러낸 1980년대를 회상하며 그리워했다.

케이블채널 티브이엔(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지난 16일 마지막회인 20화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평균 시청률 19.6%, 순간 최고 시청률 21.6%(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로, 2010년 <슈퍼스타K 2>이래 5년여 만에 케이블 최고 시청률을 새로 썼다. 지상파를 포함해 통상 10% 안팎에 불과한 최근 드라마 시청률에 견줘도 이례적이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마지막회 ‘선우-보라 커플’의 결혼이 1995년 10월이었다)를 시기적 배경으로 하는 <응답하라 1988>은 그야말로 복고 열풍을 가져왔다. 김필과 김창완이 함께 부른 <청춘>을 비롯해 당시의 명곡들이 음원차트 상위권을 장악했고, 생산이 중단된 옛 맥주와 ‘추억의 과자’ 등이 다시 판매됐다. 드라마를 본 이들은 향수에 빠져들었다. 특히 공간적 배경이 된 서울 도봉구 쌍문동 주민들은 이 드라마가 더욱 각별했다.

실제 촬영지는 경기도 의정부와 인천, 충남 서산 등지였지만, 드라마 속 여러 설정들이 당시의 쌍문동 상황을 충실히 재현했기 때문이다. 지난 20일 쌍문동에서 만난 주민들은 하나같이 “나의 이야기”라고 했다.

쌍문동엔 주인공들이 다닌 쌍문여고와 쌍문고가 없다. 1988년 당시 쌍문동엔 인문계 고등학교가 단 하나뿐이었다. 주인공 ‘성덕선’이 다닌 쌍문여고는 실제 이 정의여고에 해당한다(촬영은 인천 신명여고에서 했다). 남자아이들이 다닌 학교는 굳이 따지자면 선덕고등학교다. 정의여고는 1976년 현재의 자리에 설립됐고, 선덕고는 이보다 늦은 1983년에 설립됐지만 우이동에서 개교했다 1990년 정의여고 인근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드라마의 배경인 1988년 쌍문동엔 남자 고등학교가 없었으니, 쌍문고는 그야말로 가상의 학교로 봐야 한다.

실제 인터넷엔 정의여고와 선덕고 출신들이 자신들의 얘기라며 드라마 감상평을 올려놓은 사례가 많다. “1988년 당시 정의여고 2학년이었고 아버지가 한일은행에 다녔다”며 “주인공 성덕선이 나를 모델로 한 것 아니냐”는 블로거도 있었다. 쌍문동엔 드라마에 등장하는 ‘브라질떡볶이’나 ‘감포면옥’ 등이 실명 그대로 정의여고 주변에 실재했거나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었다.

1986년부터 이 학교에 재직했다는 류남숙 교감은 “제작진 중 누군가가 실제 이곳에 살지 않았다면 몰랐을 설정들이 많다. 학교 앞을 오가던 20-2번 버스가 드라마에 나왔을 땐 정말 놀랐다”고 했다. 그는 특히 “정의여고 학생들이 덕수상고와 함께 1988년 올림픽 개막식 길놀이에 참여했는데, 그때 상으로 받은 탁상시계가 극중 라미란의 집에 놓여 있더라. 이후 드라마를 더 유심히 보게 됐다. 어젠 우리끼리 봉황당 골목이 어딜까 얘기하기도 했다”고 했다.

손님들이 직접 요리해 먹는 ‘신당동떡볶이’ 스타일의 브라질떡볶이는 일대에서 유명한 분식집이었다. 브라질떡볶이가 있었다는 정의여고 옛 정문으로 통하는 도봉로 121길엔 분식집들이 여럿 들어서 있었다. 동행한 임연희(28) 도봉구청 주무관은 “학창 시절 근처에 살았는데 일부러 친구들과 분식을 먹으러 이 골목에 오곤 했다”고 말했다. 브라질떡볶이는 1990년대 중후반 문을 닫았고 지금은 주차장으로 변했다.

극중 동룡이가 2호점을 개업한 감포면옥도 정의여중 입구 사거리에 실재했다. 브라질떡볶이가 있던 자리에서 멀지 않았다. 1972년에 개업한 감포면옥은 일대에선 유명한 음식점으로, 한때 보령면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다시 옛 이름을 찾았다. 1990년대 초반부터 도봉구에서 근무했다는 권철원 도봉구청 홍보전산과 팀장은 “옛날엔 주변에서 가장 큰 식당이었고, 이곳에서 회식도 자주 했다. 한때 드라마에서처럼 수유리 쪽에 분점을 냈었다”고 전했다. 감포면옥에서 만난 홀 매니저는 “식당의 외관이 50년 가까이 그대로다 보니 오랜만에 오신 분들은 ‘옛날과 똑같다’며 한마디씩 하신다”고 했다.

드라마의 공간적 중심은 ‘쌍문동 10통 2반’으로 설정됐다. 1988년 당시 쌍문동 10통 2반이 현재의 어느 곳인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도봉구청 다른 관계자는 “통반 주소체계가 주기적으로 변하다 보니 지금의 10통 2반이 당시에도 그 주소였을 거란 보장이 없다”고 했다. 1988년 당시 쌍문동은 3개의 동으로 나뉘어 있었다. 지금은 쌍문4동이 추가됐다. 10통 2반은 동마다 하나씩 있다. 정의여고에서 가까운, 쌍문3동의 10통 2반을 찾아가 봤다. 동주민센터에 들러 지도상의 위치를 확인해 3분가량 걸었다. 10통 2반엔 4층짜리 연립빌라 3개동이 들어서 있었다.

1985년 만들어진 서울 지하철 4호선 쌍문역에서부터 쌍문시장을 지난 곳이었다. 이 일대는, 단독주택들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지만 ‘빌라’ 등 다세대주택으로 새로 지어진 곳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쌍문동 5인방’의 10통 2반 골목도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듯했다(드라마 6화에서 우편물에 적힌 덕선이의 집 주소가 스치듯 공개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다. 공개된 주소의 번지는 쌍문시장 내에 있었고 도봉구청에 확인한 결과 1999년 통반 주소 개편 이전 10통 2반이었다).

드라마에선 대규모 재개발 바람이 불어 10통 2반 골목이 사라진 것으로 그려진다. 중년으로 접어든 성덕선(이미연 분)은 “그곳에 주상복합이 들어섰다”고 했지만 실제 쌍문동엔 주상복합 건물이 많지 않은데다 모두 드라마의 배경 시기 이전에 지어졌다.

덕선이들이 살았을 법한 정의여고와 쌍문역 주변 지역엔 대규모 재개발이 없었다. 오히려 옛 모습이 비교적 잘 보전된 편이다. 정의여고 뒤편, 쌍문4동 쪽으로 아파트 단지가 대거 들어서 있지만 이곳의 아파트들은 1988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 지어졌다. 역시 시기가 맞지 않는다. 드라마에서 잠시 공개된 덕선의 주소지인 쌍문시장 옆 골목길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쌍문동 재개발은 드라마의 극적 설정이었던 셈이다.

쌍문동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1948~1970)이 살았던 동네이기도 하다. 그가 청계피복공장에서 일하던 시절 피곤한 몸을 이끌고 아침 8시에 출근해 밤 11시 마지막 버스에 맞춰 퇴근하던 보금자리가 바로 정의여고 뒤편 쌍문동 208번지(현 56번지)였다. 이곳은 1985년 재개발이 이뤄져 현재 삼익세라믹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르포작가 오도엽이 쓴,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자서전(<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을 보면, 대구에서 올라온 전태일의 가족은 남산동 50번지 판자촌에 셋방을 얻었다가 화재로 집을 잃고 쌍문동 208번지로 쫓겼다.

당시 묘지였던 이곳에 남산 판자촌 화재로 집단 이주해 온 서른 가구가 모여 살았다. 이재민들은 무덤 옆에 천막을 쳤고, 겨울이 되자 시멘트 블록을 사다 무허가 집을 지었다. 쌍문동 시절 전태일은 통금(야간 통행금지) 시간이 지나 새벽에 오는 일이 잦았다. 여동생 또래의 시다들에게 버스비로 풀빵을 사주고 걸어오다 통금에 걸려 파출소에서 자고 온 것이다. 삼익세라믹아파트 106동 옆엔 도봉구가 ‘전태일 열사 옛집터’ 안내판을 세워놓았다. 누군가 ‘열사’라 쓴 곳을 긁어낸 흔적이 보였다.

드라마에 묘사돼 있진 않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쌍문동은 구로·성수·문래·화곡동과 함께 서울에서 대기오염이 가장 심한 지역이었다. 미세먼지나 오존주의보가 발령될 때마다 항상 쌍문동이 포함됐다. 환경부가 쌍문동에 내리는 눈과 비의 산성도가 높아 신맛이 느껴진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권철원 팀장은 “지금 구청 자리에 미원 공장이, 창동 쪽에 샘표간장 공장이 있었다. 인근 자원회수시설에서 정화되지 않은 부유물질이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턴 깨끗하게 바뀌었다”고 했다. 1989년 12월에 발간된 도봉통계연보를 보면, 1988년 쌍문동 인구는 1동부터 3동까지 합쳐 1만8708가구에 7만4304명이 살았다.

지금은 8만4천명(2012년 말 현재)가량으로 조금 늘었다. 한동안 꾸준히 늘던 쌍문동 인구는 강남과 노원 마들평야(현 상계동 일대) 개발 등으로 흩어져 지금 수준으로 자리잡았다.

드라마의 배경이 된 시기, 쌍문동 주민들처럼 우리의 주거지는 단독주택에서 다세대주택으로, 다시 아파트로 변모해갔다. 박철수 서울시립대 교수(건축학)가 쓴 <아파트>를 보면, 1970년 아파트는 전체 주택의 0.77%(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불과했지만 25년 뒤이자 선우-보라 커플이 결혼한 1995년엔 37.4%로 늘었다. 이어 15년 뒤인 2010년엔 절반을 넘긴 58.4%가 됐다. 인구의 다수가 아파트에 거주하는 ‘아파트 공화국’이 됐다. 1975년부터 1996년 사이 희망 주거유형의 변화를 보아도 이미 아파트에 사는 사람의 절반 이상이 1987년부터, 단독주택 거주자의 절반 이상은 1993년부터 다음 거주 희망 주택의 유형으로 아파트를 꼽았다. 드라마 속 쌍문동 식구들은 판교 등으로 이주해갔지만 현실에선 판교신도시 재개발을 통해 호화롭게 지어진 아파트에서 살 가능성이 높다.

1980년대 3저 호황기에 이어, 1990년대 7~9%의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아파트는 서서히 우리 사회 물신주의가 투사된 부의 상징이 됐다. 박철수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아파트를 매개로 모든 판단을 화폐단위와 재화의 가치로 치환하다 보니 결국 남는 것은 ‘아파트 브랜드와 평수로 사람들을 서열화시키는 무리지음과 서열화의 정치학’뿐”(22쪽)이라고 썼다. 아파트로 상징되는 물신주의 아래 드라마 속 공동체는 조금씩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갔다. 이제 우리는 옆집에 사는 이가 누군지도 모르고 말을 섞지도 않는다.

서울시는 2011년 이후 도시계획의 패러다임을 ‘전면철거형 재개발’에서 마을 단위 도시재생으로 전환하기로 했다. 대규모 재개발이 마을공동체를 와해시켰다고 봤기 때문이다. 도봉구도 마을공동체 활성화를 위해 70개가량의 주민모임을 지원하는 등 ‘함께그린(Green)마을’ 지원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인근 빈터 폐가를 고쳐 짓고 텃밭 등을 경작하며 마을공동체를 일군 도봉구의 주민모임 ‘숲속애’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에서 주요 혁신사례로 꼽았다. 마을공동체 복원 시도가 곳곳에서 이어지지만 현실의 다수는 아직 드라마 속 옛 공동체의 정취를 그리워한다. 쌍문동 덕선이들은 모두 어디로 흩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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