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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1월 18일 07시 30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1월 18일 14시 12분 KST

'응답하라 1988'과 합리적 비평의 실종

많은 네티즌들이 근거 있는 비판과 근거 없는 인신공격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민주시민으로서 엄연한 결격사유일 뿐만 아니라 '명예훼손·모욕'에 해당하는 범죄다. 인격모독을 하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할 정도로 현저히 낮은 인권감수성을 지녔다. 무엇보다 '열등감' 운운하는 이들은 자신이 뿌리깊이 느끼는 콤플렉스를 모든 것의 판단기준으로 삼아 타자에게도 투사한다. 줄세우기식 서열주의 한국사회에 적응도가 높을수록 열등감 유무와 극복여부가 인간분류의 절대 잣대가 되나보다.

"석학 대접을 받는 미국 지식인 이름을 한 명 대 보시라. 그리고 그 나라 도서관에 가서 컴퓨터 단말기에 그 지식인의 이름을 두들겨보라. 아니 인터넷을 이용해도 될 것이다. 그 지식인이 쓴 논문과 저서의 몇 배가 되는, 그 지식인에 관한 논문과 저서의 이름이 수두룩하게 쏟아져 나올 것이다. 요컨대, 비판이 있어야 석학이 나오는 법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엔 그런 비판이 드물다. 아예 없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드물어도 너무 드물다. 비판이 있어야 방어를 위해서라도 자신의 이론을 더 정교하게 만들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런데 아예 비판이 없으니 발전이 있을 수 없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인물과 사상' 2권에 이 글을 쓴 것이 근 20년 전이다. 비단 학계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현 시점 한국사회에 정당한 비판, 합리적인 비평이 제대로 자리 잡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그 누구보다 치열해야 할 지식계층도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투로 안이하기만 하다. 문학계, 예술계에서는 비평이라고도 할 수 없는 '주례사 평론'이 관례처럼 돼버렸다. 결혼식 덕담과도 같은 상찬의 말들은 한국문학 침체의 주요원인 중 하나로 꼽힌다.

더 많은 도전과 이를 통한 혁신과 향상이 가능해야 하는데도 합당한 질문을 막는 잘못 적용된 유교적 질서, 전체주의적 절대권력에의 복종, 권위주의에 대한 복속이 이를 가로막는다. 한국적 방식으로 서열매기기에 익숙한 한국인은 학벌주의 타파를 주장한 강준만 교수의 '서울대의 나라'(1996, 개마고원)가 서울대를 못나온 콤플렉스 때문에 쓴 책이라고 '해석' 한다.

인터넷시대가 오면서 일반인들의 자기표현을 흔히 접할 수 있게 됐다. 기사 등에 달린 댓글을 보면 보통 한민족의 기저심리가 날것으로 드러난다. '댓글심리학', '댓글사회학' 같은 독립된 학문분야가 나올 만하다. 이를 쭉 읽다보면 평범한 국민의 사고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정도를 넘어선 '악플'들을 보고 있자면 씁쓸함을 넘어 비애를 느낀다.

오락채널 tvN 코믹가족극 '응답하라 1988'의 계획 없는 플롯과 감정적 자극만을 노린 신파적 구성을 비판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절대적 인기만큼 비평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열렬팬들의 '응팔' 옹호 댓글이 넘쳐났다.

자랑스러운 사회적 지위를 지닌 듯 프로필을 당당히 내건 한 중년남성이 "평생 스스로 만들어보지 못하고 찌질하게 비판만 열라 해본 평론가의 열등감 넘치는 자기고백처럼 보인다"고 쓴 댓글도 꽤 호응을 얻었다. "평론가가 합리적 비평을 하는데 비평 자체를 하나의 창조적 영역으로 인정할 줄 모르고 CJ가 찍어내는 수준 낮은 공장드라마에 열광하는 자신의 수준이 모욕당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고 또 다른 네티즌이 이를 지적했으나 소수의견으로 묻혔다. 심형래 감독의 '디워'(2007)가 개봉했을 때 애국주의에 홀린 네티즌 무리의 무조건적인 편들기가 연상됐다. 덕분에 재벌계열 CJ E&M은 120억원의 수익을 더했고, 대기업들은 간접광고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문유석 판사가 쓴 '개인주의자 선언'(2015, 문학동네)에서 "'성공한 이들은 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는 착각에 빠진 대중은 벌거벗은 임금님 앞에 무릎을 꿇고 모욕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는 구절과 묘하게 겹쳐진다.

이 평론이 노출된 사이트들이 각자 자신의 의견과 감상평을 피력하는 토론의 장이 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기본 권리다. 그런데 많은 네티즌들이 근거 있는 비판과 근거 없는 인신공격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민주시민으로서 엄연한 결격사유일 뿐만 아니라 '명예훼손·모욕'에 해당하는 범죄다. 인격모독을 하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할 정도로 현저히 낮은 인권감수성을 지녔다. 무엇보다 '열등감' 운운하는 이들은 자신이 뿌리깊이 느끼는 콤플렉스를 모든 것의 판단기준으로 삼아 타자에게도 투사한다. 줄세우기식 서열주의 한국사회에 적응도가 높을수록 열등감 유무와 극복여부가 인간분류의 절대 잣대가 되나보다.

민주시민 양성에는 역부족인 단순주입식 한국교육의 고질적인 문제 때문일까, 토론의 기본원칙을 모르는 이들도 많다. 실생활에서도 이런 식이면 감정적 싸움으로 끝나기 일쑤다. 대인논증의 오류 등 갖가지 논리적 오류들의 '향연'에서 '논점일탈의 오류'가 눈에 띄게 많다. 인기 프로그램 '응팔'을 평한 글에 '왜 이보다 못한 지상파 TV드라마에 대해서는 아무 말 않느냐'는 것이 보기다. 훈계형도 악플의 흔한 형식 중 하나인데 '넌 보지마', '너나 잘해라'류의 소통거부형은 우리사회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다.

"어떻게 하면 평론가가 질투해서 썼다고 그렇게 사고가 닫혀 버리나, 중고등학교때 보습학원 다니지 말고 책 한 권을 더 읽게 했어야 할 텐데"라는 우려의 덧글처럼 흔히 '난독증'이라 불리는 문서해독능력 미비도 난제다. 위대한 한글 덕분에 문맹률은 세계 최저수준이지만 문해력을 기준으로 한 실질문맹률은 OECD국가 중 최고다.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자들의 문서독해능력도 조사대상 22개 국가 중 꼴찌로 드러났다. 독서량 역시 최저수준인 한국인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고영성 북칼럼니스트의 '어떻게 읽을 것인가'(2015, 스마트북스)를 보면 '독서하는 뇌'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문자는 정신발달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오락프로를 즐기는 것도 삶의 한 부분이만, 당장 독서가 힘들다면 우선 교양프로라도 보면서 인생과 정신의 균형을 찾아갔으면 한다. KBS 1TV는 새해벽두부터 지성인들의 통찰을 담은 특강프로들을 연이어 재방송했다. '어쩌다 한국인'(2015, 중앙북스)을 펴낸 허태균 고대 심리학과 교수의 '대한민국에서 행복찾기'가 인상적이었다. 댓글에서 드러나는 한국인의 사회심리학적 특성과 매치됐다.

그가 주창한 '코리아니즘 주체성'은 존재감을 만족시키기 위해 떼로 몰려다니며 인터넷 댓글이라도 달아야하는 속성을 짚는다. 우리나라 드라마는 국민반응에 따라 전개와 결말을 바꿔줘야 만족감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추상적인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불확실성의 회피'라는 특성 또한 추출했다. 지적 노고에 대한 존중이 없는 대한민국의 자화상을 반영한다고 보여졌다. 즉물적 명품에 집착하고 부동산이 최고가치 자산으로 인식되는 한국사회에서 초라한 대접을 받는 지식재산권을 떠올리게 했다.

* 통신사 뉴시스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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