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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이 학살한 베트남 피해자를 위로하는 동상이 설치된다

  • 김병철
  • 입력 2016.01.17 10:44
  • 수정 2016.01.17 11:03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사과하고 피해자들을 위로하는 상징물이 베트남과 국내에 설치된다. 정식 명칭 ‘베트남 피에타’(엄마와 무명아가상, 베트남어 제목은 ‘마지막 자장가’)인 이 조각은 2011년 서울 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맞은편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51), 김운성(52) 작가가 구상했다. 베트남 피에타는 평화 교육과 시민 모금을 거쳐 올해 베트남 민간인 학살 지역과 국내에 설치될 예정이다.

베트남전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알리는 단체인 ‘한-베 평화재단 건립추진위원회’ 관계자는 15일 “올해 베트남 중부지역의 여러 마을에서 학살 50주년 위령제가 열리고 있다”며 “이 행사에 맞춰 사과와 위로의 뜻으로 베트남 피에타를 보내려고 각 마을과 베트남 정부와 접촉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군의 퐁니.퐁넛촌 공격 직후 찍은 여성과 아이들의 주검 사진.

지난 12일 김서경, 김운성 작가가 공개한 베트남 피에타는 대지의 여신 위에서 학살된 아가를 품는 어머니의 모습을 띠고 있다. 두 작가는 “베트남을 방문해 학살된 수많은 무명의 아가들을 보았고 이들이 가시가 되어 눈을 찔렀다”며 “사죄와 반성의 의미를 담아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죽임을 당한 이들을 기록하고 위로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베트남 피에타는 가로세로 70㎝, 높이 150㎝, 무게 150㎏의 브론즈로 제작될 예정이다. 무게 450㎏의 화강석이 베트남 피에타를 떠받친다.

김서경, 김운성 작가는 12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우리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에 정확히 사과를 요구하고 받아내야 한다. 또한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도 정확히 사죄해야 한다. 지금 정부는 둘 다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서경 작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제안해 설립된 ‘나비기금’ 사업의 일환으로 지난해 베트남을 방문해 한국군에 의한 강간 등 여성 성폭력 사례를 함께 조사하기도 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한-베 평화재단 건립추진위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기금 등으로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를 조사·연구하고 있다.

위안부 소녀 넘어 베트남의 엄마와 무명 아가로

기억은 싸운다. 상징을 만들어 싸운다. 상징은 힘이 있다. 어떤 상징은 세계를 움직인다.

‘평화의 소녀상’은 세계를 움직였다. 2011년 12월14일 소녀상이 세워짐으로써 서울 광화문(종로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은 새로운 힘을 갖는 공간으로 재창조됐다. 운동은 강력한 무기를 얻었다. 자석처럼 보이지 않는 힘으로 사람들을 끌어모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협상에서 일본 정부가 내내 소녀상의 철거를 요구한 것도 불과 4년 만에 이 작은 상징물이 키워온 힘을 보여준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글렌데일시에서는 우익 성향의 재미 일본인들의 소녀상 철거 소송이 제기되면서 세계적인 관심사로 떠올랐다. 평화의 소녀상은 세계로 번지고 있다. 비슷한 취지의 소녀상, 기림비 등이 다른 작가들에 의해서도 만들어지고 있다.

지난 13일 경기도 고양시의 작업실에서 김서경(51), 김운성(52) 작가를 만났다.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조각을 만든 부부 작가다. 둘은 1984년 중앙대 조소학과에 입학해 소문난 ‘과 커플’이자 ‘예술적 동지’로 살았다. 서울 광화문 서울역사박물관 앞에 설치된 ‘전차와 지각생’이 바로 두 작가와 아들의 작품이다.

전차를 쫓아가는 지각생의 명찰에는 아들 ‘김경보’ 이름이 새겨 있다. 이밖에 전북 정읍의 ‘동학농민무명열사탑’,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신효순·심미선 추모 조형물 ‘소녀의 꿈’ 등 역사와 사회를 응시하는 작품을 꾸준히 냈다. 평화의 소녀상은 지금까지 6종을 제작했고, 작품은 국내 27곳, 국외 3곳에 설치됐다.

이날 김서경, 김운성 작가는 또 하나의 작품을 들고나왔다. 대지의 여신 위에서 아가를 안고 있는 엄마. 베트남전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사과하고 무명의 아이들을 위로하는 ‘베트남 피에타’(베트남 엄마와 무명아가상)였다. 우선 최근 이슈가 된 평화의 소녀상에 대해서 물었다.

12일 경기도 고양시의 작업실에서 김운성(왼쪽), 김서경(오른쪽) 작가가 그동안 제작한 ‘평화의 소녀상’ 6종과 함께 앉았다. 뒷열 맨 왼쪽 경남 남해의 소녀상은 조개를 캐다가 끌려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가 된 박숙이 할머니를 형상화했다. 그 옆 경남 거제에 설치된 소녀상은 의자에서 떨쳐 일어나 손 위에 새를 품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를 맨 처음 폭로한 김학순 할머니상이 가운데 앉아 있고, 오른쪽 위로 고등학생들과 함께 제작한 평화의 소녀상, 그 아래 2011년 수요시위 1000회째 서울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그리고 서울 이화여대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이 차례로 서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조각

-한국과 일본 정부는 지난달 28일 ‘한국 소녀상 문제가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고 합의했습니다. 이 문구를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김서경·김운성 (한숨)

김서경 “피해자가 배제된 합의는 합의가 아니죠. 지금에야 할머니들을 설득하는 건 추한 모습입니다. 평화의 소녀상이 협상 테이블에 올라간 거 자체가 황당했어요. 소녀상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받은 고통과 상처를 들추면서 20년 이상 지속해온 수요시위와 그 이야기를 상징하는 거거든요. 또 국민 모금으로 3700만원을 모아 만들었어요. 저희의 손을 빌렸지만 저희 것이 아니에요.”

-상황에 따라 정부의 철거 요청이 올 거라고 생각하나요?

김운성 “2011년 작업 중에도 일본의 중단 요구가 있었어요. 그래서 디자인을 바꾸기도 했지요.”

김서경 “원래 소녀는 손을 모으고 있었어요. 일본에서 항의한다는 뉴스를 듣고 주먹을 쥐는 것으로 바꿨어요. 좀더 적극적인 의지를 표명하자고.”

-수요시위 1000회째인 2011년 12월14일 새벽에 설치했죠?

김운성 “당일 새벽 트럭에 소녀상을 싣고 광화문 일본대사관 앞에 도착했는데, 엄청난 사람들이 와 있는 거예요. 모두 일본 기자들이었죠. 도로를 파내는데 손가락 한번만 움직여도 찰칵 찰칵 찰칵 찰칵….”

김서경 “전시회 때도 그렇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이 없었어요.”(웃음)

사실 일본과 일본이 남겨놓은 식민주의와의 싸움은 세우고 부수며 공간을 재배치하는 싸움이었다. 광화문은 가장 치열한 공간정치의 전장이었다. 1926년 일제는 광화문을 이전시키고 경복궁 앞에 어울리지 않는 네오르네상스 양식의 조선총독부 건물(옛 중앙청)을 지었다. 경복궁 동쪽 창경궁에는 동물원을 지어 왕실의 권위를 실추시켰다.

반대로 1995년 김영삼 정부는 광복 50주년을 맞아 조선총독부 건물을 허무는 정치적 이벤트로 식민주의의 청산을 노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자신이 쓴 친필 현판을 달아 광화문을 복원하고 자신을 대리하는 충무공 이순신 동상을 그 앞에 세웠다. (당시는 충남 아산 현충사 성역화 작업이 이뤄지는 등 국가주의가 강화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박근혜 정부는 평화의 소녀상 철거를 암시하는 내용의 합의를 했다.

2011년 12월14일 아침, 평화의 소녀상은 일본대사관 건너편 인도에 선다. 한복을 입은 소녀는 의자에 앉아 일본대사관을 바라본다. 당차고 결연한 얼굴, 잘린 머리카락, 불끈 쥔 주먹. 작은 새가 소녀의 어깨에 앉아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와 지금 계신 할머니를 연결시켜주는 영매”이자 못다 이룬 “자유와 평화의 상징”(김서경)이다. 옆의 빈 의자는 세상을 떠난 할머니의 자리다.

“우리 할머니들이 아무 힘이 없다고 해서 말이지. 한마디 말도 없이 두 정부가 오고 가고 해서 합의됐다고 하는데, 세상에 그럴 수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절대적 반대입니다.”

지난 6일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제1213차 수요시위. 무대 앞 의자에 앉아 발언을 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89) 할머니의 목소리는 소녀상처럼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누군가 목도리와 귀마개를 평화의 소녀상에 걸어주었다. 이날 수요시위에 소녀상이 불러 모은 인원은 800여명이었다.

발뒤꿈치를 든 소녀

-평화의 소녀상은 세계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조각인 것 같습니다. 위안부 피해자 운동도 소녀상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김서경 “예상은 못했고 기원은 했죠. 제작하면서 할머니들의 아픔을 느꼈어요.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서주길 바랐어요. 할머니들이 돌아가시더라도 누군가 소녀상의 자리에 서줬으면…. 할머니들의 아픔을 오롯이 느끼려면 여성의 손길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남편에게 ‘내가 할게’ 했죠. 몰입했어요. 할머니의 감정에 빠져들었죠.”

-왜 소녀였나요?

김운성 “수요시위를 보고 뭐 도와줄 것 없느냐고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을 찾아갔어요. 비석 디자인을 부탁받았다가, 제가 아예 조각으로 해보자고 했어요. 할머니상을 먼저 디자인했는데, 김서경 작가가 요만한 소녀상을 가지고 와서 어떻겠느냐고 물었어요. 보니까 소녀를 할 수밖에 없었어요. 할머니가 당하신 게 아니라 소녀가 당한 거잖아요.”

-130㎝의 조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요?

김서경 “공감이었어요. 아픈 것만 표현하면 혐오스럽게 보이죠. 그래서 아프지만 아프지 않게 공감을 이끌고 희망을 만들고 싶었어요. 어린 소녀지만 당당하고 당찬 모습. 할머니들은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요구해왔잖아요. 표정을 잡는 게 쉽지 않았어요. 고통, 슬픔, 분노 등 상반된 감정을 표현하려고 수십번 바꾸어 이 얼굴이 나온 거죠. 제 마음속에 있는 상을 끄집어내기가 쉽지 않았어요.”

김서경, 김운성 작가가 만든 ‘베트남 피에타’. 대지의 여신 위에서 엄마가 아가를 안고 있다. 1.5m 크기로 제작돼 베트남과 국내에 설치될 예정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평화의 소녀상은 특정 할머니를 모델로 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위안부에 대한 부부 작가의 조사와 상상을 통해 만들어졌다. 한복을 입고 단호한 표정의 13~15살께 소녀가 여러 상황에 따라 변주될 뿐이다. 이를테면 경남 거제의 평화의 소녀상이 제작될 때, 국내에 교학사 역사교과서 왜곡 논란이 있었고, 소녀는 분에 차 의자에서 일어났다.

소녀상에 대한 논쟁 중 하나는 ‘소녀’가 ‘순결주의’나 ‘더럽혀지지 않은 육체’ 같은 가부장적 체제의 이분법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미지를 표상한다는 시각이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페미니즘 내부에서는 ‘민족주의와 젠더 간의 모순적 관계’에 대한 학술적 토론이 있어왔다.

2006년 서울 서대문 독립공원에 일본군 ‘위안부’ 박물관의 건립 계획이 발표되자 일부 독립유공자 단체가 “일제에 의해 수난만 당한 민족이라는 왜곡된 역사인식을 심어주는” “독립운동을 폄하시키는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반발한 사건, 2004년 영화배우 이승연이 위안부를 소재로 한 누드 화보집을 촬영했다가 뭇매를 맞은 사건 등은 위안부 문제가 민족과 여성 사이에서 갖는 복잡한 층위를 보여준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일문학)는 2013년 책 <제국의 위안부>에서 “대사관 앞 소녀상은 협력과 오욕의 기억을 당사자도 보는 이도 함께 소거해버린 민족의 피해자로서의 상일 뿐이다”라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갔고, 지난 13일 서울 동부지법은 이 책에서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로 표현한 부분 등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결했다.

-김학순 할머니가 1991년 위안부 문제를 처음 폭로하기까지 할머니들은 반세기 동안 사회의 편견 속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습니다. 한국 정부와 가부장 체제도 일종의 공범이 아닐까요?

김운성 “소녀상을 보면 발뒤꿈치를 들고 있어요. 1945년 해방이 되어서 고국에 돌아왔지만 다들 숨죽여 살아야 했잖아요. 그걸 표현한 겁니다. 1965년 한-일 협정을 맺으면서 정부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는커녕 무시했잖아요. 이승만 정부 이후 친일파가 주류인 세상에서 할머니들은 두려워서 말할 수 없었던 거죠. 노무현 정부가 4·3사건에 대해 사과를 했듯이, 정부가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줘야 그나마 할머니들의 아픔이 치유가 되면서 이런 일(사회의 편견)이 없겠죠. 근데 가부장제가 공범이라고 해버리면….”

김서경 “칼날을 그쪽(일본 정부와 한국 정부)에 먼저 들이대야지. 국민들이 살아나려고 하면서 가부장제도 있고 비굴함이나 여러 모습도 있는 거죠. 정부가 제대로 정리를 안 한 거죠.”

지난 3월 나비기금 지원을 위해 빈딘성을 방문한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조사단과 만나 자신의 성폭력 피해 경험을 증언한 베트남 할머니들. 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응우옌티바이, 레티히에우, 팜티언, 하티낌응옥, 팜티하인, 응우옌티카인, 응우옌티떰, 하티찐 할머니.

아가야, 아가야 기억하거라

1966년 12월 베트남 꽝응아이성 빈호아 마을에 포탄의 비가 쏟아졌다. 엄마의 품속에서 6개월 된 아기가 울고 있었다. 괴수 같은 소리가 하늘을 찢고 내리치는 섬광이 모자의 앞에서 불꽃을 튀겼다. 엄마는 마지막 저항이라고 생각하고 아기를 안고 고꾸라졌다. 나중에 마을 사람들이 시체 더미에서 엉엉 우는 소리를 들었다. 유일한 생존자의 이름은 도안응이아. 아기는 살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아기들을 재우며 자장가를 불러준다. ‘아가야, 아가야, 너는 기억하거라. 한국군들이 우리들을 쏴죽여 폭탄 구덩이에 시체가 가득하구나. 아가야, 아가야, 너는 커서도 꼭 이 말을 기억하거라….’

-2014년 베트남 평화기행을 가서 도안응이아를 만났다면서요?

김서경 “기타를 치시는데, 시각장애인이세요. 엄마 밑에 깔려 있을 때, 화약물이 눈에 들어가서 그랬다고 해요. 마을 사람들이 젖을 먹여서 고아가 된 도안응이아를 키웠죠.”

-‘베트남 피에타’는 도안응이아가 모델인가요?

김서경 “그렇지는 않아요. 평화의 소녀상처럼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를 끌어낸 거죠. 마을에 가면 증오비가 있어요. 한국군이 이렇게 학살했다는 게 나와 있는데, 나이를 보니 대다수가 어린이와 노인이었어요. 근데 비문에 대부분 이름이 없어요. 무명의 아이들이었던 거죠. 갓 태어나서 이름조차 붙이지 못한…. 그때 이거구나 결심했죠. 위령비를 만들어서 기증해야겠다.”

2015년 4월9일 오후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대구광역시지부 회원들이 대구 경북대학교 교내에서 집회를 여는 모습. 정춘광(73·왼쪽 둘째) 고엽제 전우회 대구지부장은 “어느 나라 전쟁이든 소수 양민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사진 박기용 기자

베트남 전역에는 이런 한국군 증오비가 약 50~60개 세워져 있다. 바다 건너 한국에는 베트남전 참전기념탑이 전쟁을 기념한다. 서울 국립묘지, 충남 부여, 전북 전주 등 수십개로 추산된다. 두 나라가 베트남전쟁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2014년 시민단체와 함께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지역을 둘러본 김서경 작가는 김운성 작가와 함께 다시 방문해 상징물의 상을 구체화해나간다. 지난해는 한국군이 베트남에 전투병을 파병한 지 50년 된 해였고, 베트남 중부의 여러 마을에서는 지난해부터 한국군 민간인 학살 50주년 위령제가 차례로 열리고 있다.

김서경, 김운성 작가는 베트남전에서 한국의 역사적 책임을 묻는 시민단체인 ‘한-베 평화재단 건립추진위원회’(한-베 평화재단)와 함께 단순한 위령비 대신 조각상을 만들어 올해 안에 베트남 민간인 학살 지역과 국내에 설치하기로 했다.

-베트남 엄마와 무명아가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있다면?

김서경 “죽은 아이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죽은 아이를 위로하는 모습이오. 엄마가 아이를 보듬고 있잖아요. 그리고 죽은 영혼을 상징하고 위로하는 연꽃, 구름과 야자수와 물소… 대지의 여신한테 위로받고 보호받는 모습이에요.”

피에타는 슬픔과 비탄을 이르는 말이다. 성모 마리아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아들 예수를 껴안고 느끼는 비탄이다. 정식 명칭 ‘베트남 피에타’는 그렇게 탄생했다. 베트남어 제목은 ‘마지막 자장가’다. 소형 모델은 이미 제작됐고, 이달부터 가로세로 70㎝, 높이 150㎝의 동상 제작 작업이 시작된다.

한-베 평화재단은 이 작품의 설치를 위해 평화 교육과 시민 모금을 계획 중이다. 한-베 평화재단 관계자는 11일 “마을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베트남 정부에서 허가를 받아야 한다. 빈호아 마을 등 몇 곳을 둘러보며 협의하고 있고, 국내에도 설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에 대해 직접적으로 사과한 적이 없다. 다만 김대중 대통령이 2001년 쩐득르엉 베트남 국가주석과의 정상회담 때 “불행한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들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베트남에 계획대로 설치가 될 수 있을까요? 베트남 정부 또한 민간인 학살 문제에 대해 적극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만.

김서경 “외교적 부분이 있어서 그런지 베트남 정부가 불편해하는 부분이 있는 거 같아요.”

김운성 “‘과거의 문을 닫고 미래의 문을 열자’면서 경제 발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서로 불편한 문제는 덮고 가자는 거 같은데, 잘하는 건 아니죠. 우리도 베트남에 가서 돈 벌어 경제 발전했다고 하는데, 혹여 그 돈으로 양말을 사 신었든 음료수를 하나 사 먹었든 혜택을 조금이라도 입었다면 분명히 반성을 해야 합니다.”

-한국 정부는 일본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를 요구하지만 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 해결에 대해서는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아니, 정부뿐 아니라 국민 대다수의 태도가 이중적인 건 아닐까요? 지난해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생존자가 방한했을 때 관련 행사의 대관이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김운성 “한국 정부는 시종 일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나요? 나라가 정치를 못해 식민지가 되어 할머니들이 끌려갔으면, 지금이라도 일본에 정확히 사과를 요구해 받아야 하는 임무가 있습니다. 또 남의 나라 전쟁에 참여해서 양민학살을 했다면 그것 또한 정확히 사죄해야 하는데, 우리 정부는 둘 다 그 역할을 못하고 있는 거죠.”

박근혜 대통령의 어떤 일관성

박근혜 대통령은 두 개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유감 표명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이례적으로 개인 명의의 성명을 내어 김 대통령의 베트남전 참전 유감 발언이 “대한민국 명예에 못을 박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에 끌려간 위안부 문제에 대해 10억엔(약 103억원)을 받고 일본과 불가역적인 합의를 한 것에 대해선 지난 12월 “대승적 견지에서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대통령도 일관성이 있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는 전쟁의 경험을 선택적으로 기억한다. 우리 국가가 벌인 민간인 학살은 없는 일이 되고, 국가(정부)의 이익에 부합될 때에만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조명된다. 그러나 결말은 항상 피해 당사자의 삶에 닿지 못한다.

일본과의 합의 직후인 지난달 29일 임성남 외교부 1차관이 서울 마포구 정대협 쉼터를 방문해 “위안부 문제 해결 시급성과 한-일 관계 개선 차원에서 협상이 타결”된 것이라며 “(협상 내용을) 미리 말씀 못 드린 건 연휴기간 중 여러 사항이 급하게 진전되면서 그랬다”고 말한 것이 이를 보여준다.

-베트남 피에타는 국내에도 설치될 계획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부 베트남 참전단체에서 물리적인 방해를 한다면요?

김운성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세워야죠. 설사 부서진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부수려고 하는 게 무엇인지 보여줄 수 있잖아요.”

-평화의 소녀상과 베트남 피에타가 공통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서경 “전쟁 없는 평화. 여성과 아이들이 착취되지 않는 평화로운 세상이오. 그런 세상은 제대로 된 기억과 기록, 솔직한 사죄 없이는 찾아오지 않아요.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 일본에 똑바로 요구하듯이 우리도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에 대해 제대로 된 사죄와 배상을 해야 하는 거죠.”

-베트남 민간인 학살 건에 대해 불편해하는 국민들이 여전히 있는데, 베트남 피에타를 발표하면 지금처럼 모두에게서 환영받는 작가가 안 될 수도 있지 않나요?

김운성 “주변에서 베트남은 건드리지 마라, 그런 얘기들을 하는데, 우리는 알아버렸고 와버렸잖아요. 보고도 못 본 척하면 (조각을) 없애버려야지, 뽑아버려야지.”

김서경 “이 와중에 베트남 이야기를 하면 (위안부 문제가) 덮이지 않느냐 우려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흐르는 대로 가려고요. 차곡차곡 그 길을 가려고요. 여러가지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가고 싶은 길을 가지 못하거든요.”

-느끼는 대로, 손 가는 대로?

김서경 “네. 지난해 베트남에서 한국군에게 강간당한 피해자 할머니들도 몇 분 만났어요. 정대협이 인터뷰 조사 차 베트남 마을을 방문했을 때 저도 따라갔죠. 순식간에 여러 사람에게 강간당하고, 남편이 있는데 강간당하고…. 할머니들은 외지인들이 마을에 찾아오니까 눈치를 보시고, 주변 사람들 의식하면서 겨우 말문을 여시더라고요. 베트남 할머니들이 저런 마음으로 어렵게 살아왔구나, 가슴에 다가왔어요.”

두 작가는 작업실에 놓인 그간의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서울역에 막 내린 시골 언니, 백령도 앞바다에서 숨진 군인의 주검을 안은 심청, 효순이와 미선이, 4대강에서 물장구를 치는 소녀가 있었다. 난해하지 않고 일상에서 쉽게 보아온 얼굴이었다.

대다수가 사회참여 작품이라고 말하자, 두 작가는 “우리가 관심있는 것을 일상적으로 풀어냈을 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깃발을 든 사회참여라기보다는 일상에서 겪은 일, 가슴에 크게 사무친 일을 손으로 빚어냈을 뿐이라는 것이다. 김운성 작가는 “어떤 때는 즐겁고 재미난 작품을 하지만, 이렇게 아픈 것에 빠지게 되면 헤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평화의 소녀상도, 베트남 피에타도 그렇게 탄생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생존자인 응우옌티탄(뒷줄 왼쪽)씨와 응우옌떤런(뒷줄 오른쪽 모자 쓴 이)씨가 8일 낮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수요집회’에 참석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김복동(왼쪽) 할머니와 길원옥 할머니를 위로하며 함께 서 있다. 사진 한겨레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할머니들의 깊은 마음

사실 베트남 민간인 학살과 성폭력 피해자들의 든든한 배경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었다. 길원옥, 김복동 할머니의 제안으로 정대협은 전시 성폭력 피해자를 돕는 ‘나비기금’을 설립했다. 나비기금은 베트남에서 한국군 성폭력 피해여성 사례를 조사·지원한다.

고 문명금 할머니는 2000년 ‘베트남전 진실위원회’에 4300만원을 기부해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이사장 이해동)의 모태가 되었다. 당시 나눔의 집에 살던 문 할머니는 “베트남의 민간인들도 나 같은 전쟁 피해자”라며 “사죄의 뜻으로 이 돈이 사용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의 뜻은 그렇게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국가가 아닌 개인의 삶으로 향했다. 이름뿐인 큰 것이 아니라 개개의 작은 삶을 보듬어 준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한-일 정부의 합의는 ‘10억엔을 나눠 갖고 개인은 한-일 관계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라’는 메시지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피해자 할머니들의 개개의 사연과 목소리를 듣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합의는 베트남의 이름 모를 여성에까지 뻗은 할머니들의 삶의 태도와 상반된 것이다. 대한민국은 있었지만, 할머니들은 없었던 걸까. 전쟁의 상징과 평화의 상징은 지금도 싸운다. 베트남의 증오비와 한국의 참전기념탑이 대치한다. 광화문의 소녀는 또렷이 쳐다보고 있다. 베트남 빈호아의 엄마는 아이를 안고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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