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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편과 사별했지만 섹스는 여전히 삶의 일부다

ⓒAlamy

쥬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신작 '코레스폰던스 The Correspondence'를 보았다. 현세에서의 삶의 한계를 늘리려는 기술적 집착이로 볼 수도, 지식인을 사랑하는 여학생의 교사에 대한 복종을 연장시키려는 은밀한 책략으로도 볼 수 있는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을 비통해 할 때, 가장 위생적이고 정중한 해결책은 힌두식 제물 의식일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도 같이 화장시키는 의식이다. 내 인생의 사랑이 6개월 전에 세상을 떠나서 감히 침범할 수 없었던 금기를 논의하게 되었을 때 내가 했던 생각이었다. 토르나토레가 20세기의 예술적 표현의 모든 테크닉을 동원해 무시하거나 제거했던 금기도 바로 그것이다.

내 남편이 죽고 나서 며칠 뒤, 나는 친절한 사람과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부드럽게 생각했다. 나는 나는 과부의 호르몬이 치솟는, 불가능한 주제를 탐구하는 걸 상상해 보자고 말했다. 사랑하는 남성을 최근에 잃은 여성의 예견할 수 없으며 파괴적인 성욕을 탐구해 보자. 오래 전부터 그들은 완고한 절망에 빠진 '흰 과부'라고 알려져 왔다. 만약 과부가 활력 넘치는 본능, 예상하지 못했던 것 만큼이나 거친 본능에 사로잡히고, 비통함에 대한 반응으로 자신은 아직 살아 있다, 남편과 함께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면?

내가 '대화'라고 했던가? 나는 독백이라는 단어를 썼어야 했다. 상대는 눈에 보이는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가 부끄러워서, 혹은 매너가 좋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피를 끓게 만드는 터부가 가득한 벌집이다. 죽음, 섹스, 상실, 고통. 과부와 로맨틱한 사랑이라는 터부.

당신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이 당신의 여체를 되살리는 것이라면? 나는 키스와 포옹을 받을 필요가 있다. 남성이 여성을 안는 방식의 포옹이 필요하다... 나는 그 느낌이 어땠는지 기억해야 한다. 당신은 나를 도와주겠는가?

아무도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어떤 대가를 치러 왔는지 묻지 않을 테니까. 아무도 내 살에 남의 손길이 닿지 않은지 얼마나 되었는지 묻지 않는다. 과부는 순수한 영혼이고, 성적 욕구가 없다. 과부는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에 대한 생각으로 밤을 극복한다. 과부는 자기 자신의 존재의 유골 속에 있다. 그게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녀의 세상은 갑자기 여성들만으로 구성된다. 그녀의 여자 친구들만이 함께 있어주고, 대화를 나누고, 끝없이 시간과 친절함을 제공한다. 하지만 사실 과부는 그 모든 여자 친구들을 다 주고라도 자신을 자유롭게 해줄 단 하룻밤의 섹스, 부활의 하룻밤을 얻길 원한다.

이러한 도움 요청은 남성들은 불쾌하게 여기고 여성들은 무서워한다. 나는 이에 대한 단 한 권의 책, 단 한 편의 영화, 심지어 단 한 번의 개인적 대화조차 본 기억이 없다. 당신의 뒤에는 영원한 침묵이 있고, 그건 당신이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세상을 뜬 당신의 사랑을 '배신'하는 것은 모독적인 것 아닌가? 그의 죽음에 몸과 영혼 전부를 빼앗기지 않는 것은 모독적이다. 알코올, 처방전을 받아 먹는 약은 괜찮다. 약은 무엇이든 먹어도 된다... 이것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해결책이다. 그러나 성적 쾌락은 악마의 것이다. 저 마녀를 화형시켜라. 하지만 그건 빵, 공기, 물과도 같다. 그건 모든 것, 즉 미래, 꿈, 희망을 다 잃었을 때 삶에 매달린다는 걸 의미한다. 나도 서서히 죽는다면 더 나을 것이다. 그게 모든 걸 끝내는 옳은 방식일 테니까. 그러고 나면? 그 다음엔 더 나빠진다. 당신은 기억을 변색시킨다. 괴로워하고 헌신하며 보냈던 여러 달의 시간을 무효로 만들어 버린다. '사랑은 진짜가 아니다'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짜였던 적이 없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는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여러 여성들의 이름으로 이 테스트를 해보고 싶었다. 이 테스트에 따를 오명, 즉각적인 반응과 매너를 갖춘 거절에 대해서는 다 예상을 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분명히 표현하는 것은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관습으로 굳어진 예의와 어중간한 미봉책으로 숨기지 않고, 인류 연대의 육체적이고 실제적인 제스처를 요구하는 행위다.

아이일 때는 타부를 배움과 동시에 이른바 '여성의 기술'이라는 어이없고 오래된 짓으로 터부를 범하고도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법을 배운다. 우리의, 혹은 타인들의 이 작은 세상의 선한 도덕들에 맞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치근덕거리면서도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해야 하나? 도덕적인 자위만 해야 하나? 더 건강한 것을? 더 정직한 것을? 이 알려지지 않은 심연 속을 더 깊이 들여다 보겠다는 욕구를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그제서야 공감을, 존중을 얻을 수 있을까? 이 글을 도발이라고 생각하라. 불편한 도발일지 모르지만, 무시하고 비난하지 말라. 이 요구에는 높은 수준의 답변, 진정한 연민,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비가 필요하다. 혹은 최소한 이야기를 듣고 논의할 마음이라도 가져라.

 

허핑턴포스트 이탈리아의 Da vedova vi chiedo perché il sesso non debba far più parte della mia vita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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