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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정치를 생각한다

영국정치에서 보수당/자유당, 그리고 20년대 초 이후 지금까지는 보수당/노동당 양당체제의 근간은 대체로 굳건했거니와, 요란한 팡파르와 함께 거기에 균열을 가하려던 좌우의 시도들은 모두 무위에 그쳤다. 그러면서도 분당과 탈당은 당사자 정치인들이 개인적 정치생명을 담보로, 철저하게 이념과 정책적 소신에 따라 감행한 것이었으니, 오늘날까지 영국 유권자 누구도 그런 정치인들을 '철새'로 내치거나 비아냥하는 일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 고세훈
  • 입력 2016.01.15 06:07
  • 수정 2017.01.15 14:12
ⓒgettyimagesbank

지난 영국총선의 여진이 몰고 온 가장 큰 이변은 주류정치에서 사실상 무명이었던 급진좌파의 제레미 코빈-그는 30여 년의 의정 생활에서 1백 수십 차례 당론을 거역했던 '상습적 반란자'였다-이 압도적 지지로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었다는 점이다. 노동당이 비교적 선명한 중도좌파 정치를 표방한 가운데 총선에서 패했던 터라, 당의 이런 연이은 좌편향은 관례와 예상을 벗어난,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었다.

신자유주의가 맹위를 떨치는 이 시대에, 고전적 좌파의 어젠다를 고집하며 당수에 오른 코빈에 대한 노동당 내외의 홀대와 조소는 극심했고 지도부(예비내각)구성과 정책현안을 둘러싼 내홍 또한 각별히 치열했다. 그렇다고 노동당의 이처럼 돌연한 분열적 상황이 탈당이나 분당으로 이어지리라는 조짐은 아직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념과 소신에 따른 분당과 탈당

정당정치의 모국이라 할 만한 영국에서도 유명정치인의 탈당과 분당이 아주 낯선 일은 아니다. 가령 전무후무한 계급입법으로 불리는 1846년의 반곡물법으로 보수당은 벤저민 디즈레일리를 중심으로 결집한 전통적 보수주의자들과 동 법의 통과를 지휘했던 로버트 피일 수상과 그 추종자들로 나뉘었고, 결국 후자는 휘그와 급진주의자들과 연합하여 근대적 자유당을 출범시켰다. 훗날 빅토리아 조의 영국정치를 디즈레일리와 양분하며 물경 네 차례나 수상에 오르게 될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로버트 피일을 따라 자유당으로 옮겨간 것이 그 무렵이었다.

19세기 말에는 버밍햄 시장으로서 개혁정치를 주도했던 자유당의 조지프 체임벌린이 글래드스턴의 아일랜드자치 노선에 반발하며 보수당으로 사실상 이적했고, 우리에게 친숙한 윈스턴 처칠은 아버지 랜돌프의 뒤를 이은 보수당의 개혁정치인이었지만 보호무역에 반대하여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가 20년대 중엽에는 사회주의에 맞서는 헌정주의자로서 다시 보수당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영국정치에서 극심한 당내분열을 노출하는 정당은 대체로 선거패배의 긴 후유증을 앓든가, 기존정당체제의 틀을 벗어난 분당세력의 경우, 유명무실하다가 아예 정치적으로 매장당하는 게 통례였다. 반곡물법 파동으로 분열됐던 보수당은 향후 20년간 집권의 기회를 갖지 못했고, 로이드조지 진영과 아스퀴스 진영 간의 악명 높은 반목은 1923년의 총선을 기점으로 자유당을 영국정치의 영원한 제3당으로 전락시키는 데 일조했다.

노동당이 빈번한 노선 시비와 내홍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진보정치의 유일한 대안으로 자리매김해 올 수 있는 이유도 과거 몇 차례의 분당이 준 역사적 교훈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가령 창당세력이던 사회민주연맹과 독립노동당은 노동당을 떠난 후 모두 정치무대에서 사라졌으며, 출당과 탈당이 이어졌던 30년대 초 이후 노동당은 한동안 영국정치에서 완전히 주변화되었다. 대처 집권 직후 노동당이 급진화되자 당지도부 4인이 20여명의 의원과 탈당 후 결성한 사회민주당은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다 자유당에 흡수되었고, 그 여파로 노동당은 향후 연속 3차례나 총선에서 패했다.

어쨌든 영국정치에서 보수당/자유당, 그리고 20년대 초 이후 지금까지는 보수당/노동당 양당체제의 근간은 대체로 굳건했거니와, 요란한 팡파르와 함께 거기에 균열을 가하려던 좌우의 시도들은 모두 무위에 그쳤다. 그러면서도 분당과 탈당은 당사자 정치인들이 개인적 정치생명을 담보로, 철저하게 이념과 정책적 소신에 따라 감행한 것이었으니, 오늘날까지 영국 유권자 누구도 그런 정치인들을 '철새'로 내치거나 비아냥하는 일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내용 없는 파벌과 작당, 냉소·방치만 할 수 없어

한국 정치와의 결정적 분기점이 그 지점이다. 입만 열면 민주주의를 들먹이면서도 특정 정치인 이름 따위에 기댄 사적 친소(親疎)가 일상적으로 정치를 가르고, 내용도 명분도 없는 작당, 분파, 개명을 거듭해온 한국 정치의 지긋지긋한 행태가 새해 벽두에도 버젓이 반복되고 있다. 그것이 지역주의를 부추기고 정치공학적 타산에 따라 행해진다거나, 마땅히 은둔과 익명을 즐겨야 할 구태정치인과 지식인 정치 낭인들이 지난 행적에 대한 아무런 반성이나 성찰 없이 때를 만난 듯 덩달아 분주하다 해도, 이젠 별다른 역심도 감흥도 일지 않는다. 진보세력의 정치적 부재 속에서 양대 보수진영이 한국정치의 지형을 멋대로 양분하며 안락한 집권을 탐해왔던 세월이니, 애초에 이념이나 정책소 신에 따른 재편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망한 노릇이다.

불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울먹이는 철학자로도 불린다. 생성의 원천인 불이 소멸시키는 것들의 죽음을 슬퍼했기 때문이다. 무릇 냉소란 모든 변하는 것들을 견고한 무엇으로 간주하는 태도에서 비롯되거니와, 패배주의의 토양이 그렇게 조성된다. 모조리 태워 없앤다 한들 애도하며 아쉬워할 만한 무엇도 없는 정치판이되, 그래도 어떤 쪽으로든 결국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라는 명제만은 기어이 붙들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정치의 지분이 유난히 크고 냉소 거리가 넘칠수록, 저 나태한 탐욕의 정치판을 그냥 버려둘 수는 없다는 데 우리의 고민이 있다.

* 이 글은 다산연구소의 다산포럼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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