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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이 박근혜 전화 안받는 진짜(?) 이유

중국은 박근혜 대통령의 그간의 노오오오력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북한의 도발을 비난하는 듯하였으나 오히려 도발을 일으킨 북한뿐만 아니라 그러한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는 미국이나 우리나라 등 주변국들도 함께 싸잡아 비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우리 외교장관은 중국 외교부장과의 전화통화조차도 (다른 한반도 주변국들 외무장관과는 달리) 상당히 늦게 하였으며, 한-중 국방장관 간의 핫라인도 불통인가 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전화통화조차 못하고 있다. 필자는 네 가지 이유로 중국이 북한을 절대로 버릴 수 없기 때문에 남북한 간의 갈등 상황에서 중국이 남한 편에 서는 일은 (우리의 희망과는 달리) 있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 바베르크
  • 입력 2016.01.14 06:04
  • 수정 2017.01.14 14:12

북한이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대북확성기 방송을 재개하였다(한숨). 미국과 일본 등 우리의 전통적 동맹국들은 북한의 이러한 도발을 비난하고 우리 정부와 함께 대북 제재 조치를 논의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중국은 박근혜 대통령의 그간의 노오오오력에도 불구하고, 초기에는 북한의 도발을 비난하는 듯하였으나 오히려 도발을 일으킨 북한뿐만 아니라 그러한 북한의 도발에 대응하는 미국이나 우리나라 등 주변국들도 함께 싸잡아 비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우리 외교장관은 중국 외교부장과의 전화통화조차도 (다른 한반도 주변국들 외무장관과는 달리) 상당히 늦게 하였으며, 한-중 국방장관 간의 핫라인도 불통인가 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아직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전화통화조차 못하고 있다.

왜 때문일까?

필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이유로 중국(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북한을 절대로 버릴 수 없기 때문에 남북한 간의 갈등 상황에서 중국이 남한 편에 서는 일은 (우리의 희망과는 달리) 있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이 어설픈 중국에 대한, 핀트가 맞지 않는 일방적인 구애로는 택도 없고, 어쩌면 중국에 대한 밀당(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근거는 성공회대 김명호 교수님의 글들을 읽고 나서이다. 중국을 오랫동안 관찰(China Watcher)하신 김명호 교수님은 매주 일요일 중앙Sunday에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라는 흥미진진한 연재들을 해오고 계시고, 이를 [중국인 이야기]라는 책들로 펴내고 계시는 중이다. 그런데 김 교수님의 [중국인 이야기] 제3권제4권에는 북한과 중국 간의 관계를 다룬 글들이 실려 있고, 필자는 최근에야 이 글들이 김명호 교수님이 한겨레신문에 연재하셨던 별도의 연재물인 "김명호 교수의 북-중 교류 60년"에 터잡은 것임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부족한 아래 필자의 글들로 성이 차지 않으실 독자님들께서는 필자가 위에 하이퍼링크들을 걸어 놓은, 김명호 교수님의 문자 그대로의 걸작인, 통찰력이 빛나는 글들을 직접 읽어 보시기를 권한다.)

1. 사실상 조선족 내지 중국인이나 다름 없었던 북한 김씨왕조의 독재자 김일성

김명호 교수님에 의하면 김일성은 다섯 살 때인 1917년 온 가족과 함께 중국의 만주(동북지방)으로 이주하였고, 길림성의 위원 중학교에서 중국인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 뒤에서 살펴 보듯이 김일성은 1940년 11월 소련으로 넘어 가기 전까지 계속해서 만주에서 주로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김일성은 이렇게 20여년 중국에서 살면서 통역이 필요 없을 정도로 숙련된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고, 나중에 북한의 독재자로 군림하면서도 중국의 지도자들과 교류를 할 때도 중국 내의 조선족 내지 중국인과 거의 다름이 없을 정도로 중국어를 구사하였다고 한다.

김일성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북한의 부주석을 지낸 김일, 우리의 국방장관격인 민족보위상을 지낸 최용건 같은 북한의 지도층들도 김일성과 유사하게 오랫동안 중국에서 생활하며 조선족 나아가 중국인과 다름 없는 정도의 언어구사 및 교류가 가능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다 (적어도 거죽으로라도) 공산주의자라는 이념적 공통 분모까지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북한과 중국의 지도층들 간의 언어적, 문화적, 이념적 끈끈함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상상했던 것 이상인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이 죽고 아들인 독재자 김정일에 이어 이제 손자인 김정은대까지 내려왔으며, 북한의 지배층들도 이에 따라 세대가 내려가면서 교체되기는 하였으나, 공산주의 국가 초유의 3대 세습이라는 기괴한 체제를 만들어 낸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 역시 공산주의 국가 체제가 계속되면서 세습까지는 아니라도 시진핑 국가주석의 부친인 시중쉰이 중국 공산당의 주요 간부로 활동했으며, 중국 공산당 유력자의 자제들을 태자당(太子黨)이라고까지 부를 정도인 것을 보면, 이른바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서라도, (물론 대가 내려가면서 옅어지기는 하겠지만) 북한과 중국 간의 긴밀한 관계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 내려올 토양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2. 북한 독재자 김일성은 일제시대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만주와 소련에서 활동했다.

이 부분은 솔직히 학창시절 오랫동안 우리나라에서 반공(反共)교육을 받고 자라 온 필자로서는 아직까지도 정서적으로는 수긍하기 어려운 부분이 남아 있는 미묘한 영역이다. 평생을 김일성 가짜설을 주장하였던 학자도 있었으며, 김일성이 진짜라고 하더라도 그의 항일운동 경력이란 것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여전히 존재하고, 서대숙 교수님의 역저의 내용을 알게 된 후에도, 필자는 지금까지도 김일성 가짜설 진영에 심정적인 응원을 보내고 싶다(어린 시절 교육이 이렇게 무서운 것인가 싶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김일성과 함께 활동했던 중국의 공산주의자들이 김일성이 가짜가 아니라고 하며, 그 후손들까지 김일성과의 교류를 계속 이어 갔었던 내용들을 김명호 교수님의 글들을 통해서 알게 된 이상 김일성 가짜설은 이제 설 자리를 많이 잃은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중국이 같은 공산주의 국가 창업주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김일성 항일경력 조작에 동참했다는 주장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의 위조와 조작의 역사도 길기는 하지만, 그런 단계까지 오면 이제 김일성 가짜설은 음모론의 영역과 점점 비슷해지는 느낌적 느낌인 것도 사실이다.)

김일성의 진위 여부에 꽤 많은 얘기를 한 셈인데, 하여간 김명호 교수님이 희귀한 사진들과 관련자들의 증언들을 통하여 밝힌 바에 의하면, 김일성은 1932년 4월 25일(북한이 소위 인민군 창건일로 기념하는 날이다)에 만주에서 항일 유격대를 만들었고, 그 후 중국 공산당에 개인 자격으로 입당하는가 하면, 나중에 동북 항일연군에 참여하여 중국 공산당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일본군이나, 일본군의 괴뢰국인 만주국 군대 등과도 싸웠으며, 만주에서의 운신이 어려워지자,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이들 중국 공산당 부대들과 함께 소련으로 같이 넘어가서 해방 전까지 활동했다고 한다.

즉 근 10여년 이상 북한 김씨왕조의 창시자인 독재자 김일성은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 부대에 속해 있거나 그들 옆에서 전우로 활동을 한 것이다. 물론 이런 김일성의 활동이 실은 마적단의 활동이나 다름이 없었고, 북한에서 김일성 우상화 작업이 진행되며 실제보다 많이 과장되었다는 것도 분명 지적해야 할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김일성은 식민지 조선을 해방시키기는커녕 만주에서 세가 불리하여 1940년 11월에는 중국 공산당 부대들과 함께 소련 영역으로 도망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글의 목적(?)에 비추어 보자면, 자기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 항일 투쟁을 했건 마적질을 했건 10여년 이상 같이 뒹굴면서 만주에서 풍찬노숙을 같이 했던 자가 우두머리가 된 북한과 무려 그로부터 60년 가까이 지난 1992년이 되어서야 정경분리 원칙에 의하여 국교를 재개한 남한과의 관계를 중국 입장에서 같은 층위를 두고 보기는 몹시 어렵지 않을까? 그런 정도의 유구한 역사 내지는 흑역사를 같이 해 온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서 갈라 놓으려는 시도를 하려면 얼마나 어마 무시한 노오오오력을 기울여야 할까 하는데 생각이 미치면 조금 아득해지는 느낌적 느낌이라고나 할까.

1954년 마오쩌둥 중국 공산당 주석(오른쪽부터)과 김일성 주석,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 등이 중국 베이징의 천안문 망루에서 건국 기념 열병식을 함께 지켜보고 있다.

3. 중국 국공내전(國共內戰) 중 김일성이 중국 공산당에게 만주에서 준 결정적 도움

더군다나 북한과 중국 간의 긴밀한 관계는, 앞에서 살펴 본 언어적/문화적 친화성, 전우로서의 (흑)역사 공유라는 원인 외에도, (아마도 이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 아닐까 싶은데)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이 중국의 집권당인 중국 공산당이 중국 국민당과 내전 중이었던 시기(1945년~1949년)에 중국 공산당 측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 때문에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다. 뒤에서 살펴 볼 한국전쟁 중의 중공군의 북한 지원이나 진위 논란이 있었던 김일성의 항일운동 등에 비해서 이 사실은 (내가 과문-寡聞-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김명호 교수님이 처음으로 심도 있게 규명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중일전쟁을 맞아서 1936년 12월 12일의 서안사변이라는 극적인 사건을 통해 항일통일전선을 결성했으나 사실상 중일전쟁 중에도 그러한 통일전선은 잘 작동되지 않았고, 특히나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거의 즉각적으로 중국 대륙의 패권을 다투기 위한 내전에 돌입한다. 이 국공내전 중 가장 결정적인 전투 중의 하나가 바로 만주에서의 양당 간의 전투들이었다.

만주는 일본이 괴뢰국 만주국을 내세워 점령하여 산업시설들을 다수 설치하였기 전에도 이전부터 러시아 등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 철도 부설 등 근대화가 일찌감치 이루어지는 등 중국 내에서도 요충인 지역이었다. 더군다나 2차 대전 종전 후에는 중국 공산당의 부상을 경계한 스탈린이 중국 국민당의 장개석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자신들이 진주했던 만주를 중국 국부군(國府軍)에게 내주는 바람에 국공내전에서도 국공 양당 군대의 주요 각축장이 된다.

그런데 국부군들이 소련의 위와 같은 은근한 도움에 미국의 엄청난 군사물자 지원으로 만주에 대거 진주하여 도시와 철도 등 이른바 점과 선을 장악했다면, 이에 밀려난 중국 공산당군은 농촌과 산악지대 등으로 스며들어 면을 장악하여 이들과 맞섰다고도 할 수 있다. 특히나 중국 공산당군이 만주에서 국부군에게 밀리고 후퇴하게 되었을 때 이미 소련 군정의 지원으로 북한에서 사실상 국가를 세운 것이나 다름 없었던 김일성은 후방에서 아낌없는 지원을 베풀었다는 것이 바로 김명호 교수님이 규명한 부분이다. 당시 중공군은 김일성으로부터 무기와 식량, 부상병 후송과 치료 등 후방에서의 아낌없는 병참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북한 독재자 김일성의 노골적이고 적극적인 중국 지원에 임표라는 탁월한 전략가 덕분에 원래 열세에 있었던 중공군은 만주에서 국부군을 무너뜨리고 내전에서 결정적 승기를 잡게 되었으며, 곧이어 북경을 점령하고, 나중에는 양자강까지 도하하여 장개석을 대만으로 쫓아내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말하자면 오늘의 이른바 중화인민공화국을 가능하게 한 결정적인 전투에서 북한은 현재의 중국 지도부의 조부나 부친 세대쯤 되는 모택동, 임표 등 당시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하여 준 것이다.

중국이 과연 자신들의 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 것이나 다름 없는 북한의 이런 결정적인 도움을 무시하고 이제 어쩌면 북한 체제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제대로 된 국제사회의 제재에 동참할 수 있을까?

4. 6.25 때 중국은 중공군을 파병해 북한을 구했을 뿐만 아니라 초기부터 개입

이 네 번째 이유 중의 후반부 부분, 즉 6.25 전쟁 중에 미군과 국군 등 국제연합군이 침략자 북한을 쫓아 38선을 넘어 북진하여 통일이 가까워졌다고 우리가 믿었을 무렵, 중국이 대규모 군대를 한반도에 파병하여 북한을 도와 김일성 독재정권을 지탱하여 준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때 중공군은 한때 38선을 다시 남하하여 서울을 재차 함락시켜 1951년 1월 4일의 1.4 후퇴로 대한민국 정부는 서울을 다시 포기하여야 하는 위기에 몰리기도 했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 때까지 중공군 및 북한군과 국제연합군은 상호 막대한 피해를 입히며 전쟁을 계속했었다.

그런데 중국의 북한 김씨 왕조에 대한 지원은 이렇게 상대적으로 잘 드러난 부분에 그치지 않는다. 중국의 독재자 모택동은 김일성이 당시 북한 정권의 부수상 박헌영과 함께 남침을 모의하고 있을 때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국공내전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조선족 사단들을 아예 김일성에게 넘겨 주기까지 한다. 이들은 말하자면 중국의 소위 인민해방군에서 북한의 이른바 인민군으로 간판만 바꿔 달고서 6.25 개전 때부터 전투에 참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중국의 6.25에의 개입의 정도는 잘 알려진 내용보다 더 깊숙했으며 아주 초기부터 진행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부분은 김명호 교수님 외에도 한국전쟁에 대한 상세하고 탁월한 저서를 낸 박명림 교수님도 일찍이 밝히신 바 있다.

이러한 중공군의 6.25 개입 결정은 공산주의라는 공통된 이념, 당시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종용, 당시 적대관계였던 미국의 군대가 중국과의 국경까지 몰려 오는 것에 중국이 느꼈던 위협 등등이 원인이 되기는 하였지만, 앞에서 살펴본, 일제시대 이래 북한의 독재자 김일성 및 지배층이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 맺어 왔던 깊은 관계와 국공내전에서 중공군에게 준 김일성의 결정적 도움도 역시 상당한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은 느낌적 느낌이다.

이상의 네 가지 이유들을 감안하여 보면, 이른바 중화인민공화국과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아시아 공산주의 체제가 존속하는 한, 과연 남한과 북한 중에 선택하여야 할 상황이 되었을 때 중국이 북한을 버리고 남한을 고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김일성이 죽은 지가 벌써 4반세기가 다 되어 가고, 모택동이나 등소평 같은 중국 혁명의 1세대들이 퇴장하고, 세대가 내려가고는 있어 그 강도는 옅어지기는 하였으나 북한이 사실상 김씨왕조화된 세습 체제이고 중국도 시진핑 주석의 경우가 잘 보여주듯이 지배층들의 대물림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이런 역사적인 연유로 형성된 북-중 관계의 긴밀함을 우리가 과연 깰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5. 중국을 북한에게서 떼어놓기 위한 밀당(?) 전략

그렇다면 정말 이것이 최선일까? 우리는 북한의 김씨왕조가 원자폭탄에 이어 수소폭탄실험까지 하여 가며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데 국공내전에서 중국이 북한의 도움을 받았듯이 북한이 이번에는 중국을 믿어가며 계속 분탕질 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일까? 중국을 북한에게 떼어 놓을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김명호 교수님은 중국과 북한 간의 끈끈한 관계의 비밀들을 앞에서 본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풀어 주시면서도 또한 그 관계를 남한이 비집고 들어 갈 수 있는 힌트도 제시하신 것이 아닌가 싶은 느낌적 느낌이다. 몇 천년 간 이어진 한반도와 중국 간의 교류에 터잡아서, 중국인들에게 돈자랑이나 하고 유커들이나 유치하려고 눈이 빨개질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의 역사와 문화, 정서를 보다 깊이 있게 노력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 하나라면(그러려면 김명호 교수님의 저서들이나 글들이 아주 좋은 길잡이가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추천하는 바이다), 조금은 속성 과정으로 진지하게 고려해 볼만한 것이 (내가 이름 붙인) 밀당 전략이라고 하겠다. 뭐랄까 중국과 밀접해지기 위해 오히려 중국과 멀리하고, 그래서 중국을 안달하게 만들어 우리에게 접근하게 하는 전략이라고나 할까?

이런 밀당전략에 대한 힌트는 역시 김명호 교수님께서 상세하게 기술한, 중소(中蘇)대립이 격화될 무렵에 북한이 보여줬던 줄타기 외교에서 얻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이 사망한 다음 그 뒤를 이은 흐루시쵸프는 스탈린 격하운동을 벌였고, 이에 대해 중국의 모택동이 반발하면서 중국과 소련은 공산주의 진영의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된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때로는 중국편을 들었다가 때로는 소련편을 들면서 최대한 실리를 취하였으며 그러자 중국은 북한을 자기네 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하여 오히려 북한에 대해 경제적으로 여러 가지 양보를 하는 등 지원을 하여 주기에 이른다.

물론 냉전시기 중소 대립을 활용했던 북한의 모습을 21세기 동북아정세에 직접 대입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겠다. 그러나, 북한이 수소폭탄실험에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우리 대통령이 중국 국가원수와 아직 전화통화조차도 못하는 상황이 하도 답답하여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왜 때문에 작년에 천안문 망루에 올라가셨나 싶은 원망이 들지 않을 수 없는지라) 위와 같은 북한의 줄타기 외교가 시사점이 될지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즉 우리 정부가 중국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는 중국에 무리하게 접근하기보다는 미국과 일본 같은 전통적인 우방국들과의 공조와 협력을 더욱 굳건히 하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

더군다나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북한과 중국이 저리 끈끈한 관계가 된 이유가 북한이나 중국이 서로 아낌없이 주고 받은(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았을) 연유에 의한 것이라면, 그렇게까지 하여가면서 우리가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어찌보면 북한이 중국과 주고 받은 도움 못지 않게, 대한민국에 지원을 아끼지 않은 미합중국과의 관계를 희생하여야 하는가 하는 근본적 의문도 들지 않을 수 없고.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9월 3일 중국 베이징 천안문 망루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중국 전승절 열병식을 참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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