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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샤를리다'의 아티스트가 아직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워야 한다는 걸 일깨워 준다

세 단어. 이미지 하나. 2015년 1월 7일 오후 12시 52분에 조아킴 롱생은 트위터에 ‘내가 샤를리다 Je suis Charlie’라고 썼다. 이 말이 몇 분 만에 전세계의 연대의 상징이 될 줄은 전혀 몰랐다.

그 날 이후 ‘내가 샤를리다’는 전세계 소셜 미디어 프로필 사진, 포스터, 매체 1면에 실렸다. 1년이 지난 뒤에도 열기는 여전하다. 파리의 아트 디렉터이자 뮤직 저널리스트인 조아킴 롱생은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전세계의 연대를 보여주는 슬로건을 만들었다.

롱생은 ‘내가 샤를리다’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이 일에 대해 별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1주기를 맞은 지금, 기념과 추모 행사가 시작되는 가운데 그는 허핑턴 포스트 프랑스와 ‘내가 샤를리다’ 현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Photo: Theodora Richter

당신은 2015년 1월 7일에 어디에 있었는가?

나는 스타일리스트 잡지의 편집 회의에 참석했다. 트위터를 보던 저널리스트 한 명이 우리에게 소식을 전했고, 우리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회의를 중단했다. 그때는 샤를리 에브도에 ‘총격’, ‘공격’이 있었다는 말이 있었고, 우리는 더 알아보려고 컴퓨터로 달려갔다.

트위터에서 소식이 조금씩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방금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걸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을 때 당신은 말과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내가 뉴스 아트 디렉터로 매일 하듯, 나는 자동으로 관련된 요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때는 샤를리 에브도의 커버 이미지와 로고를 모았다. 나는 모은 것들을 다 펼쳐 놓고 2초 동안 앉아서 그것들이 내게 주는 영감을 이해하려 했다. 망연자실함, 어리둥절함이 나타났다. 그게 어떻게 떠올랐는지는 말하기 힘들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테러에 대한 발표가 있은지 몇 분 뒤인 12시 50분쯤에 트위터에 올렸다. 그리고 모든 일이 굉장히 빨리 일어났다.

당신은 샤를리 에브도를 꾸준히 애독했는가?

전혀. 읽어 본 적은 있었지만 매주 사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 집에 몇 권이 있었다. 하라키리(주: 샤를리 에브도의 전신)은 읽었다. 내게는 한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잡지다. 모든 것을 비웃고, 웃음으로 항의하는 기회[를 상징한다].

당신의 반응은 이미지를 만들어 트위터에 올리는 것이었나?

그렇다. 하지만 바이럴을 일으킬 의도는 없었다. 요란한 선전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개인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을 뿐이었다. 순수하게. 1월 7일에 ‘내가 샤를리다’라고 했던 것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았고, 나로선 지금도 그렇다. 그건 그저 나는 두렵지 않다, 그들은 나, 내가 생각하는 민주주의, 내가 생각하는 표현의 자유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걸 표현하는 방법일 뿐이었다. 내가 곧바로 표현하고 싶었던 게 그런 것들이었다.

그 날 이후 ‘내가 샤를리다’의 깊은 의미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나왔다. 워싱턴 포스트는 ‘내가 Je suis’를 둘러싼 집단적 정신을 논했다. ‘suis’를 두고 논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우리는 그것이 동사 ‘etre’(be 동사)의 변형인지 동사 ‘suivre’(따르다)의 변형인지를 이야기했다. 당신은 이런 해석들,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내가 그걸 썼을 때의 의도는 그렇게 멀리까지 간 게 아니었다. 순수한 메시지였다. 또한 피해자들의 가족들을 존중하는 형태이기도 했다. ‘나는 연대한다’를 단순하게 말한 것이었다. 나중에 나는 내가 어디서 영향을 받았는지 살펴보았다. [스탠리] 큐브릭의 ‘스파타커스’는 내가 잘 아는 영화니, 그걸 참조했던 건 분명하다. 나는 케네디(주:연설에서 ‘나는 베를린 시민입니다’라고 말한 적 있음)를 참조했다. 9/11 이후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다’라는 말도 나왔다. 모두 관계가 있는 말들이다.

그러나 분석과 과거 사례 분석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이미지와 말로 할 수 있다. 엠마뉴엘 토드가 그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나의 분석은 아니지만, 1월 11일 행진은 거대한 가장 무도회이고 프랑스 인구를 제대로 대변하는 게 아니라고 하는 글이 있었다. 나는 1월 11일에 1월 7, 8, 9일의 피해자들에 대한 교감과 연대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 꼭 기억해야 한다. 그건 부정할 수 없다. 그토록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 누구도 그림 때문에 사람을 죽일 권리를 갖고 있지는 않다. 미스 프랑스나 할 법한 말이지만, 사실이다! 1월 7일에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그거다.

슬로건이 전세계적 영향력을 갖게 되면 반대 의견도 나오는 법이다. 그리고 논쟁이 일어난다. 그러면 우리는 비난을 하고 [찬반] 입장을 취하게 된다.

그 슬로건이 당신 손에서 벗어났다는 인상을 받았는가?

그게 내가 진정 원한 바였다. 나는 재빨리 그 슬로건과 나를 분리했다. 그게 내 것이길 원하지 않았다. 400명의 내 팔로워들에게 보낸 개인적 메시지였다. 어쩌다 퍼졌지만, 그걸 유행시킨 건 내가 아니라 소셜 네트워크였다. 그러니 사람들이 그 메시지에 동감하고 인정한다면 그건 좋은 일이다. 그건 모두의 것이다.

내가 특허를 낸 메시지가 아니다. 사람들이 ‘내가 샤를리다’를 트레이드마크로 삼으려고 한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얼른 INPI(산업 재산권 기관)에 문의했다. 그게 무료라는 것, 그 누구도, 나조차도 그걸 특허로 삼을 수 없어야 한다는 게 내겐 중요했다. 내 역할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INPI는 ‘내가 샤를리다’에 대한 특허는 받지 않겠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슬로건을 도용했다. 아주 아름다운 예, 아주 재미있는 예들도 있었지만, ‘내가 샤를리 쿨리발리다’(주: 샤를리 에브도 공격 사건과 함께 일어난 몽루주 테러의 범인 아메디 쿨리발리)라든가 ‘내가 샤를리 마르텔이다’(주: 8세기에 이슬람 세력을 격퇴했던 프랑크 왕국 군주 샤를 마르텔)과 같은 끔찍한 것들도 있었다. 피해자들이 매장되기도 전에 나왔다. 나로선 믿기 힘들었다.

당신은 1월 7일 이후 생존자들에게 관심을 보였는가?

물론이다. 이 슬로건은 대단한 호응을 얻었다. 엄청났다.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에 몇 단어를 투척한 보잘 것 없는 사람인데, 그 이미지가 전세계를 몇 바퀴나 돌았다. 초현실적, 그 이상이었다. … 정말이지 난 아직도 왜 그렇게 됐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나는 샤를리 에브도의 사람들과 아는 사이가 아니었고 그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랐다. 나는 그들이 내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고 크게 걱정했다. 내가 목소리를 별로 내지 않았던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무례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샤를리 에브도 사람들, 하이퍼 캐셔에 있던 사람들, 경찰들이었지, 나는 아니었으니까!

생존자들이 풀려났던 1월 13일 화요일 밤에 카날+에서 내게 샤를리 에브도 직원들과 함께 야간 프로그램 ‘그랑 쥬르날’에 나와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사양했고, 그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승락했고, 나는 백스테이지로 갔다.

나는 지네브 [엘 라주이]와 뤼즈를 만났는데 정말 즐거웠다. 그들은 나를 안고 슬로건을 칭찬해 주었는데, 나는 짐을 한결 던 기분이었다! 나는 “잘 됐군, 그들이 이해하는구나.” 라고 혼잣말을 했다.

뤼즈는 내가 절대 잊을 수 없을 대단한 말을 해서 눈물이 났다. 그는 1월 11일 행진 이야기를 하며 “솔직히, 호아킴, 당신이 그 말을 쓰지 않았다면 일요일 일이 이렇게 중요해졌을지 난 모르겠어요.” 라고 했다. 난 깊은 감동을 받았고, 마음에서 우러난 눈물을 흘렸다.

연대의 상징으로 ‘내가 샤를리다’를 바꾸어 쓴 예도 있다. 사우디 블로거 라이프 바다위를 지지할 때 쓴 ‘내가 라이프다’와 바르도 박물관 테러 이후 나온 ‘내가 튀니스다’가 있겠다. 당신은 이런 것들을 인정하는가?

물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슬로건의 DNA를 발견할 때면 나는 오직 포용할 뿐이다. 하지만 내가 가치 평가를 내리는 건 아니다. ‘내가 샤를리다’는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건 내 역할이 아니다.

보다 가벼운, 심지어 유머러스한 변종들도 서서히 나타났다. ‘내가, 내가, 내가 쥘리엥 레페르다’(주: 프랑스 방송인 겸 음악가) 같은 것들이었다. 그런 것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재미있었다! 이 슬로건이 대중 문화 아이콘이 되었다는 걸 보여준다. 내가 그걸 언제 깨달았는가 하면, 심슨즈에 나오는 걸 보았을 때다. “아, 그렇구나, 대중 문화의 영역으로 들어갔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건 다양한 목적과 다양한 유머로 변형될 수 있는 반죽과도 같다. ‘내가 샤블리다’(주: 화이트 와인 품종) 같은 게 예가 될 수 있겠다. 그리고 11월 13일 밤에는 사람들이 상당히 빨리 ‘나는 테라스에 있다’를 들고 나와 나를 놀라게 했다. 진정한 투지를 담은 변형들도 아직 있다.

하지만 아무데나 다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미안하지만, 배관공과 자물쇠 수리공들이 우편함에 ‘내가 유용하다’라는 전단지를 넣고 다닐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무 의미도 없는 순수한 의사 전달일 때는 효과가 없는 것 같다.

‘내가 샤를리다’의 특정 활용 사례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는가?

처음에 사람들이 ‘내가 샤를리다’ 티셔츠와 모자를 파는 것을 봤을 때는 그랬다. 지금도 파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수익 일부는 피해자 가족들에게 간다고 말하는데, 그건 분명 사실이 아니다.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그걸 사는 사람들의 진심을 의심하지는 않지만, 파는 사람들은 그저 돈 때문에 하는 것이다…나는 티셔츠를 만든 국경 없는 기자회하고만 일한다. 그들이 파는 티셔츠 수익금은 언론 자유 후원에 사용된다.

국경 없는 기자회와 일을 많이 했는가?

‘내가 샤를리다’를 쓰는 것에 대해 내게 최초로 연락한 게 그들이고, 나는 얼마든지 쓰라고 했다. 그 이후 그들과 함께 일해왔다. 나는 국경 없는 기자회 위원회 소속이고, 전세계 언론 자유를 지키려는 그들의 싸움에 동참하고 있다.

‘내가 샤를리다’가 당신을 개인적으로, 직업적으로 바꾼 것은?

나는 언제나 결의는 있었지만 늘 열심히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참여한다. 나는 방금 말했듯 국경 없는 기자회와 함께 일한다. 학교에도 간다. 표현의 자유가 무엇인지, 명예 훼손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매체의 예를 보여주고, 젊은이들에게 인터넷에서 보는 걸 전부 다 문자 그대로 믿으면 안 된다는 걸 보여주려 한다.

직업적으로는 달라진 게 없다. 제의는 들어왔지만 다 거절했다. 당시 내게 접근했던 사람들은 의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내가 샤를리다’를 통해서만 보게 부추기고 싶지는 않다.

1월 테러 이후 1년이 지났다. ‘내가 샤를리다’에 남은 것은?

표현의 자유를 위한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그것은 소중히 해야 한다. 1월 7일까지는 프랑스에서 그건 선험적인 것으로 여겨져 왔다. 우린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2015년 1월 7일이든, 2016년 1월 7일이든 마찬가지고, 그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허핑턴포스트FR의 Un an après, Joachim Roncin, créateur de "Je suis Charlie", revient sur un phénomène que lui-même n'a "pas compris"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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