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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새해 신춘문예 단상: 문학이란 何오?

신춘(新春)은 '새봄'을 뜻하지만, 흔히는 새해, 신년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1월이면 겨울의 한가운데인데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조금이라도 봄을 당겨 밝고 따뜻하게 새해를 맞고 싶은 소망 때문인지 모른다. 한자의 형상도 그렇지만 음성자질 쪽에서도 신춘이란 말은 화사한 느낌을 준다. 예전, 정초의 신문이나 잡지에서 '신춘정담' 같은 꼭지는 빠지지 않았다. 지금은 왠지 구식투가 된 듯하다. 그러나 '신춘문예'만은 여전히 '신춘'의 화사한 위세를 잃지 않고 오늘까지도 하나의 고유명으로 당당하다.

  • 정홍수
  • 입력 2016.01.07 15:10
  • 수정 2017.01.07 14:12
ⓒgettyimagesbank

신춘(新春)은 '새봄'을 뜻하지만, 흔히는 새해, 신년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1월이면 겨울의 한가운데인데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조금이라도 봄을 당겨 밝고 따뜻하게 새해를 맞고 싶은 소망 때문인지 모른다. 한자의 형상도 그렇지만 음성자질 쪽에서도 신춘이란 말은 화사한 느낌을 준다. 예전, 정초의 신문이나 잡지에서 '신춘정담' 같은 꼭지는 빠지지 않았다. 지금은 왠지 구식투가 된 듯하다. 그러나 '신춘문예'만은 여전히 '신춘'의 화사한 위세를 잃지 않고 오늘까지도 하나의 고유명으로 당당하다.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제도라는데 일제강점기였던 1925년 동아일보가 신년 지면에 공고를 내고 그해 3월 당선자를 발표한 것이 처음이란다. 자료를 보니 시를 '신시(新詩) 부문'이라고 한 것이 눈에 띈다. 그만큼 아직은 시조 등 전통적 시가의 자리가 뚜렷했다는 뜻이리라.

그러고 보면 춘원이 「문학이란 何오」(1916)를 발표하여 전통적인 '문(文)'의 개념과는 다른 근대의 역어(譯語)로서 '문학'에 대한 새로운 관념과 이해의 방식을 전하려 한 것이 딱 백년 전인 셈이다(황종연 「문학이라는 역어」, 『탕아를 위한 비평』 참조). 황종연은 일본에서 '문학'의 근대적 용법이 자리잡는 과정에 담론적 번안을 포함하는 통(通)언어적 실천의 역사 말고도 메이지 정부의 구화주의(歐化主義)에 따른 제국대학 문학부의 개편(영·독·불 외국문학과의 신설)이 제도적 계기로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한국의 경우는 식민지라는 특수성 때문에 이러한 과정이 좀더 복잡하고 착잡한 층위에서 진행될 수밖에 없었을 테지만, '신춘문예'라는 특별한 등단제도가 '문학'의 근대적 용례를 좀더 빨리, 그리고 좀더 많은 이들에게 숙지시켰을 가능성은 높았지 싶다. 그 과정을 찬찬히 톺아볼 계제는 아니지만, 어쨌든 "사실상 금일의 문학은 초연히 종교 윤리의 속박 이외에 입(立)하여 인생의 사상과 감정과 생활을 극히 자유롭게, 여실하게 발표하고 묘사하나니"(「문학이란 何오」)라고 했던 춘원의 새로운 문학론은(이 자체는 당연히 많은 편견과 한계를 담고 있으나) 이제는 얼마큼 자명해진 자리에서 백년 전 이 땅에 던져진 '문학'에 대한 새로운 물음을 어떤 감개 속에서 돌아보게 만든다.

한해의 시작과 함께한 빛나는 언어-이야기들

한때는 1월 1일자 신문을 구하느라 문을 연 가판대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도 했다. 평소에는 거의 읽지 않는 희곡이며 동시서껀 신춘문예 당선작을 하나하나 당선소감까지 챙겨 읽던 기억이 새롭다. 이즈음은 인터넷 써핑이면 간단히 해결되는데도 오히려 건너뛸 때가 많다. 올해는 작심하고 찾아 읽었다. 신년 연휴 며칠이 조금은 알차진 느낌이다.

왜 없겠는가. 공원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막막한 오후를 보내본 기억들이. 그렇더라도 대뜸 "물음으로 짜인 나무 그늘에 앉아 있어/긴 오후가 지나도록"(노국희 「위험 수목」,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시작하는 시를 마주하게 되면 단어의 낯선 배치와 조합이 시의 기예일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이 새삼 가슴을 친다. 이제 아무렇게나 버스를 잡아 타고 내린 낯선 동네의 공원 한자락에서도 저 '물음으로 짜인' 나무 그늘을 생각해보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 조금 더 견딜 만해질 것도 같다. 아마도 붙잡고 앉아서 바닥까지 내려가본 것이리라. 그러니 시의 화자는 끝내 그 나무 그늘 아래에서 본다. "울어본 기억만 있고/소리를 잃은 말들이//그림자 속에서 가지를 뻗는다"(마지막 대목). '울다니, 왜?'라는 지점에서도 이 시인은 시라는 언어의 형식이 우리 곁에 있어야 할 이유를 설득해낸다. 중간의 짧은 다섯 연은 이 시의 화자가 지나온 시간을 압축적으로 환기해주는데, 기실 이것은 '압축'일 수 없다. 그렇게밖에 표현될 수 없는 것, 혹은 "목이 없는 생선이 마지막에 삼킨" "소리를 잃은 말"의 비유 불가능한 실재이리라.

당신의 삶을 훔치는 것으로

도벽을 완성하고 싶었어

알록달록 실패들을 엮어 만든 바구니를 들고

저기서 당신이 걸어온다

마른 생선 하나를 내어주고는

가던 길을 간다

비릿한 기억이 손안에서 파닥거린다

목이 없는 생선이 마지막에 삼킨

말들이 마른 비늘로

바스러진다

낡은 허물 위로 매미 소리가 내려온다

―같은 시

이 시에도 지난여름을 잠시 지배한 매미 소리가 나오지만, "분명 어제와는 다른 날이었다. 개가 짖듯 매미가 울었다"로 문을 여는 같은 신문의 소설 당선작(조선수 「제레나폴리스」)에서도 매미는 운다. 세상의 끝, 남미 최남단 우수아이아(Ushuaia)는 "점령할 수 없는 나라의 국경 우수아이아 숲길"(조상호 「입과 뿌리에 관한 식물학」, 동아일보 시 당선작)의 이미지로 등장하는가 하면, 인류의 먼 미래 '무익한 성소수자들'의 서식지가 되기도 한다(원재운 「상식의 속도」, 조선일보 소설 당선작). 최정나의 단편 「전에도 봐놓고 그래」(문화일보 당선작)는 늙은 시모의 발목에서 불거진 혈관이 종아리를 휘감고 올라가서는 바닥까지 번져가는 모습을 개고기를 요리하는 마당의 담쟁이 넝쿨이나 창고로 변한 방의 벽면을 타고 퍼져가는 벽의 실금과 겹쳐내며 섬뜩하게 메말라가는 우리네 삶의 정경을 '여실하게 묘사'해내는데, 김갑용의 단편 「슬픈 온대」(세계일보 당선작)에서 가난한 원룸의 다닥다닥 붙은 옆집 벽에도 "실금이 담쟁이덩굴 뿌리처럼 뻗어 내려가더니 가장 위쪽 벽돌부터 두 조각 나기 시작했다"라는 묘사가 나온다. '슬픈 열대'가 아니고 '슬픈 온대'라니! 학습지 물류센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 이상하고 서글픈 '먹고살기식 연애', 혹은 살과 살의 섞임을 무어라 불러야 하나. 작품의 마지막, 서류봉투에 담긴 한 뭉치 소설로 도착한 자신의 이야기를 두고 화자는 되묻는다. "그게 나야? 내가 그렇단 말이야?" 하긴 우리 역시 좋은 소설, 좋은 문학에서 그러지 않았으면 드러나지 않았을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더러 놀라지 않았던가. 그러긴 해도 이 소설의 화자가 되묻게 되는 낙차는 많이 아프다.

오랜만에 읽은 희곡 「세탁실」(황승욱, 조선일보 당선작)은 일과성으로 혹은 선정적 폭로의 이야기로 소비되기 일쑤인 군대폭력의 실상을 간결하고 압축적인 상황 설정 안에서 참으로 실감나게, 그리고 복합적인 울림 속에서 전해준다. 반드시 입으로 뱉어져 나와 그 현장의 공기 안에서 울릴 때만 존재하는 '말하는 언어'의 자리는 이렇게 다시 발견되고 창안된다. 그밖에도 먼 미래의 시간을 타고 이제는 얼마간 익숙해진 과학소설의 상상력을 원용하는 가운데 인간에 대한 물음을 새로운 소설언어의 질서 안에 배치하고 재구축하려는 도전적인 작품(「상식의 속도」)을 포함해서 2015년을 지나온 이들이라면 그 뜨겁고 아픈 시간의 흔적을 감지할 수 있는 절실한 질문과 다양한 상상력의 언어들이 올해 신춘문예의 지면을 채우고 있다. 하루 16시간의 노동 이후에도 보너스 프레임을 꿈꾸며 내기 볼링에 인생의 '스페어'를 걸었던 한 젊은이의 죽음(김현경 「핀 캐리(Pin Carry)」, 서울신문 소설 당선작)이나, 고공농성을 앞두고 떠나는 마지막 가족여행 이야기는 아마도 오래 잊히지 않을 것 같다(이수경 「자연사박물관」, 동아일보 소설 당선작). 그리고 지면 사정으로 여기 언급하지 못한 작품들 역시 제각각의 개성으로 빛나는 축제의 주인공들임은 말해 무엇하랴.

문학에 담긴 우리의 시간

생각해보면 신춘문예 작품들은 무엇보다도 그 당해연도의 시간(정확히는 그 전해의 시간)과 함께 있다. 이것이야말로 신춘문예의 가장 값진 존재이유인지도 모른다. 연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빠뜨릭 모디아노는 수상 연설문에서 예이츠의 시를 인용하며 자기 시대에 바싹 매일 수밖에 없는 문학의 운명을 이야기한 바 있다. "백조는 19세기의 시에도 곧잘 등장합니다. 보들레르나 말라르메에서 볼 수 있듯 말이지요. 하지만 예이츠의 이 시는 19세기에는 쓰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시가 품은 저만의 리듬과 우수는 20세기에, 특히는 시가 쓰인 바로 그해에 속한 것입니다."(『문학동네』 2015년 봄호) 이 구속은 아마도 문학의 얼마 안되는 영예일 것이다. 다시 한번 뜨겁게 문학이 무엇인지 물어준 2016년 새해 신춘문예 당선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축하의 인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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