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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에 앞선 어느 중도파의 꿈과 좌절

지금부터 70년 전, 즉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에, 좌우 양극단의 세력을 배제하고 분단과, 필연적으로 분단이 불러 올 전쟁을, 막고자 노력했던, 중도파 정치인 몽양 여운형 선생님의 꿈과 좌절의 과정을 살펴 봄으로써, 안철수 의원의 위와 같은 정치적 실험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피해야 할 점들은 무엇인지 한 번 짚어 보고자 한다.

  • 바베르크
  • 입력 2016.01.08 05:33
  • 수정 2017.01.08 14:12
ⓒ한겨레

0. 머릿말

더불어민주당(옛 새정치민주연합, 이하 "더민당")을 탈당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을 형성하겠다고 다짐한 안철수 의원의 기세가 대단하다. 새해 실시된 각종 여론 조사에서 아직 이름도 정하지 못한 안철수 신당에 대한 지지율이 더민당을 앞질렀고, 야권 지지자들뿐만 아니라 여당 지지층까지 잠식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최근에 탈당한 김한길 의원을 비롯하여 더민당 의원들의 동반 탈당도 이어져서 조만간 국회교섭단체(국회의원 20명 필요)를 구성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이제 100일도 남지 않은 2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안철수 의원은, 과연 우리 정치사에서 좀처럼 성공하지 못했던 중도 제3세력을 형성할 수 있을까?

필자는 이 글에서, 지금부터 70년 전, 즉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에, 좌우 양극단의 세력을 배제하고 분단과, 필연적으로 분단이 불러 올 전쟁을, 막고자 노력했던, 중도파 정치인 몽양 여운형 선생님의 꿈과 좌절의 과정을 살펴 봄으로써, 안철수 의원의 위와 같은 정치적 실험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피해야 할 점들은 무엇인지 한 번 짚어 보고자 한다.

1. 비타협적인 독립운동가, 만능 스포츠맨이자 근대인인 몽양 여운형 선생님

우선, 몽양 여운형 선생님은 누구인가? 그는 당대 조선 최고의 미남 중 한 분이며, 만능 스포츠맨으로 알려졌고, 제사는 미신이라며 신주(神主)를 스스로 불사른 근대인이셨다. 또한, 몽양 선생님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 분께서 견결한 독립운동가이셨기 때문이다. 몽양 선생님께서는 3.1 운동 후 적의 심장부인 일본하고도 동경에 가셔서 조선 독립의 대의를 설파한 사자후(獅子吼)를 뿜어내셔서 일본인들의 간담조차 서늘하게 하셨고, 심지어 일본인들 중에서도 일부를 감화시켜 당신 몽양 여운형 선생님의 견식을 존중하는 이들을 만들어 내었을 정도였다. 대표적 인사가 일본 수상까지 지냈던 고노에 후미마로로 그는 일제말에 몽양 선생님을 초청해 시국담을 청취하기도 하였다. 몽양 여운형 선생님은 체육계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셨는데 일제말에는 해외에 우리 운동팀을 이끌고 가셨다가 독립운동에 관여하셨다는 이유로 검거되신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몽양 선생님은 해방 전해인 1944년에 독립을 예견하고 독립동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어서 일제에 비타협적인 자세를 견지하셨는데 당시 국내 인사들이 대부분 친일로 전향한 것에 견주어 보면 특기할만한 것이었다.

2. 몽양, 해방 후 조선총독부로부터 치안권을 인수하다.

그러다 몽양 여운형 선생님은 해방을 맞았고, 여기서 훗날 논란의 대상이 되면서도 그를 해방정국 초기 선두주자로 부상하게 한 사건과 조우한다. 그것은 바로 패전으로 한반도에서 쫓겨나가게 된 일제의 조선 총독부가 몽양 여운형 선생님을 접촉하여 치안권을 넘겨 주는 대신에 조선 거주 일본인들의 일본으로의 무사 귀환을 보장하여 달라고 제안하여 온 사건이다.

이에 대해서는, 총독부가 당초 고하 송진우 선생님에게 치안권 이양을 제안했으나 고하 선생님은 거절했고, 그래서 할 수 없이 몽양 여운형 선생님에게 대신 제안했고 몽양은 고하와는 달리 조선 총독부의 이 제안을 덥썩 받았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은 고하 선생에게는 총독부가 그런 진지한 제안을 한 일이 없었으며 실제 치안권 이양을 제안 받은 것은 몽양 여운형 선생님 뿐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여러 정황상 후자가 더 정확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 같고, 전자는 나중에 공산주의자와 협력한 낙인이 찍힌 몽양을 비판하기 위해서 몽양이 용공일 뿐만 아니라 친일이기도 했다는 이미지를 뒤집어 씌우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싶은 느낌적 느낌이다. 반면 우파인 고하 송진우 선생님은 그런 일제의 치안권 이양 제안 같은 것은 일거에 거절해 버리는 뭐랄까 강직한 이미지를 남기려는 의도에서 사안을 과장한 것으로 보인다는 견해도 있다. 이 견해는 총독부가 보기에도 당시 국내에서는 대중적 인지도와 카리스마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님을 따를 이가 없었다는 판단에서 치안권 이양을 (단독으로) 제안한 것이라는 견해이고 무엇보다도 총독부 인사들의 증언으로 뒷받침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35년 간의 일제의 압제가 끝나가던 70년 전 8월에 이 땅에서 일본의 최고 통치조직이던 조선총독부 인사들은(하필 마지막 조선 총독의 성은 아베...) 그들이 가장 감시하고 탄압해 왔던 당시 조선의 독립운동가(그들의 표현으론 이른바 후떼이센진, 즉 불령선인-不逞鮮人-) 중에 대중적 지지가 높고 그러면서도 자신들과 말이 통할만한 인사로 몽양 여운형 선생님을 지목하고 자신들의 안전귀환을 위한 협상을 벌인 것이다.

그리고 몽양은 이러한 일제의 치안권 이양 제안을 수락한다.

몽양은 치안권을 얻고, 정치범(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등)들을 석방해 달라고 총독부에 요청했으며 해방 후 혼란을 예상해 3개월치 식량을 달라고 했고, 한반도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우리의 건국 준비 작업을 방해하지 말 것을 주장했고 일제는 이를 수용한다.

몽양이 총독부의 치안권 이양 제안에 대해 민족 지도자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고 대응했으며, 앞에서 보았듯이 일본인의 무사귀환이란 약속을 지켜 우리 민족이 일제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한 것은 쾌거이며, 뒤에서 보듯이 이러한 치안권 이양이 해방정국 초기에 그가 정국을 주도하는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몽양이 우리 민족을 35년간 탄압하여 온 일제로부터 굳이 치안권 이양을 받아 후에 정적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소지를 남긴 것이 잘한 일이기만 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지 않다.

3. 건국준비위원회의 구성

1945년 8월 15일 일본 덴노 히로히토의 항복 방송 후 몽양 여운형 선생님은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구성하고 대중 앞에 지도자로 나서서 해방정국 초기를 주도해 나간다. 건준은 명칭부터 겸손하게 건국을 준비해 나간다는 조직으로 당시 중국 중경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나 다른 해외 애국지사 분들의 귀국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또한 초기 건준은 좌우합작 형태를 띠고 있었으니, 위원장은 중도좌파 성향 몽양 여운형 선생님이 맡았지만 부위원장은 중도우파 성향으로 나중에 미군 군정 민정장관 및 대한민국 2대 국회의원을 지내시는 민세 안재홍 선생님이 맡았다. 건준 초기 몽양의 카리스마와 조직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삽시간에 건준의 지부는 전국에 들어섰고 심지어 북한 평양에서도 (나중에 김일성에게 탄압받으시는) 우파의 고당 조만식 선생님께서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시어 여운형 선생님의 뜻에 찬동하셨다.

그리고 나서 몽양 선생님은 신사답게 일본인들에게 일본으로의 무사귀환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지키신다. 건준의 부위원장인 민세 안재홍 선생님은 이제 초라한 몰골로 짐을 꾸려 황급히 조선땅에서 도망치려는 일본인들에게 테러를 가하거나 못 살게 굴지 말라고 라디오 방송에 나와서 호소하셨다. 이제 건국에 힘써야 할 때이지 과거의 증오에 사로잡혀 복수에 나설 시기는 아니라고 민세 안재홍 선생님은 해방을 맞은 우리 겨레에 호소하신 것. 민세 선생님은 일제 총독부의 통치는 과거의 일이 되었으니 조선 거주 일본인들이 자기들 땅으로 돌아가는 걸 놓아주자고 하셨다. 왜냐하면 일본과 우리는 이웃나라이기 때문에 결국은 서로 교류하며 지낼 수 밖에 없는 숙명인데 그들이 우리에게 모질게 대했다고 우리도 그들처럼 행동해서야 되겠냐고 민세 안재홍 선생님은 호소하셨다고. 황망 중 도주 준비를 하던 일본인들 중 그 방송을 듣고 감격한 이들까지 있었다고 한다. 몽양 여운형 선생님이 만든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던 민세 안재홍 선생님의 이 말씀 같은 것이야말로 한국인인 것을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 때로부터 70년이 흐른 지금 보아도 민세의 이런 발언은 정말 탁견이라 할만하다.

4. 미소(美蘇) 냉전을 예측하지 못한 몽양의 치명적 실수

하여간 이렇게 몽양 여운형 선생님은 해방정국 초기의 주도권을 잡아나갔고 그 기세였다면 새로 세워질 나라에서 몽양은 분명 주도적 지위를 차지할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몽양은 이 때 아주 치명적인 실수를 하게 되는데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이 공동의 적인 독일, 일본, 이태리의 파시즘이 고꾸라진 후 서로 간 적대관계로 돌변해서 미소 냉전이 시작되리라고는 예측을 못하신 것이다. 몽양은 건국동맹을 일제말 만들어서 해방을 준비하며 일제 패망 후의 국제정세를 예측하면서 독소전(獨蘇戰)으로 어마어마한 인적, 물적 피해를 입은 소련으로서는 전후복구를 위해선 미국의 도움이 절실할 것으로 보고 미소 양국의 협조 관계가 전후에도 계속될 것이라 오판한 것이다(몽양의 측근 이동화님의 증언).

그러니 몽양 여운형 선생님께서는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한다는 명목으로 미소 양군이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의 남북에 각각 주둔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것이 일시적인 것이 되리라고 예상하셨던 모양이다. 하긴 당시 삼천만 우리 겨레 중에서 그게 70여년 간을 이어질 분단의 서막이 되리라고 짐작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었겠는가?

그러나 해방의 흥분과 감격에 젖어 있었을 몽양 여운형 선생님을 비롯한 당대 한국인들 중에서 나중에 몽양의 최대 라이벌이 될 극우파 정치인 이승만은 먼 미국 땅에서 미소 양군의 한반도 분할이 결국은 국토와 민족의 분단으로 이어지고 말 것이라는 것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 즉 냉전의 본질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 몽양 선생 나아가 우리 민족의 (어떤 의미에서는) 불행의 시작이 아니었나 싶다. 아 그리고 냉전의 본질을 깨달은 또 다른 자는 소련 군정의 등에 업힌 극좌파인 김일성이었고. 이제 이승만과 김일성 중간에 있던 당대의 다른 모든 정치인들은 냉전이라는 도도한 시대의 거대하고 험난한 파도 앞에 모두 휩쓸려 내려갈 판이었다. 김구든 김규식이든 박헌영이든,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여운형도.

몽양 여운형(1889~1947)

5. 몽양과 남한 공산주의자들 간의 불편한 동거

몽양은 미소 양국이 한반도를 분할하여 각각 군대를 진주시키더라도 같은 연합국의 일원인, 파시즘을 공동 격퇴한 동맹국으로서 협조관계를 이어 갈 것으로 보았고 그러기에 미군이 진주한 남한에서도 공산주의자들을 용납할 것으로 본 몽양은 공산주의자들과도 사안에 따라 협력하는 길을 고른다. 일제에 저항한 세력 중 국내에서 그나마 가장 오래 저항한 세력의 하나가 공산주의자들이었고(박헌영의 경성 꼼그룹) 그들이 원래 전통적으로 조직력이 강한데다가 젊은 시절 레닌을 만나 회견한 일도 있던 좌파적 색채가 있었던 여운형인지라 몽양이 박헌영의 이른바 재건파 공산주의자들과 손을 잡은 것은 그의 입장에서는 부득이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점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몽양은 자신의 카리스마와 대중적 지지로 공산당을 제어할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도 갖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오판이었다.

몽양의 생각은 해외에서 애국지사들이 귀국하기 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정도의 (이름에서부터 겸손한 느낌적 느낌의) 조직으로 가자는 것이었던듯 싶으나 지방에서 신분을 숨기고 활동 중 해방 후 상경해서 공산당 내부의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친일 경력자들인 장안파 공산당을 누르고서 조선공산당 당수가 된 박헌영은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및 분할 점령이 확실해지자 정부를 만들어서 점령군과 교섭해야겠다는 심산에서 인민공화국 선포를 서두른다. 박헌영은 해방 당시 좌우파 독립운동가들의 총의를 모은 것인양 인민공화국(人民共和國)을 선포하며 무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다고 밝혔고(이걸 보면 요새까지 좌파들이 이승만의 독립운동 경력을 의문시하고 친일 운운하는 건 정말 웃기는 얘기임), 여운형은 물론이고 김구, 김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까지 죄다 각료에 포함시켰다.

그러나 박헌영의 이 인공(人共) 선포극이 황당무계했던 이유는 그런 좌우파를 망라한 정부의 각료로 포함된 저명한 독립운동가들 중 그 누.구.로.부.터.도. 사전에 동의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즉 인공이란 조작, 날조, 사기극이었고 국민들의 동의는커녕 각료라고 발표된 주요 인사 중 그 누구로부터도 동의를 받지 않았던 정치쇼였다. 여운형도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대해 불같이 화를 냈지만, 아아 여기서 그의 불행이 시작되는지, 그는 박헌영의 이런 날조극을 결국 수용하고, 인공이 승인을 받게 하기 위해서 열심히 뛰기 시작한다. 미소양군의 진주를 맞아 민족의 총의를 집결시키고자 하는 수단으로 인공이 쓰일 수도 있다는 게 몽양의 뜻이었을까? 그러나 첫단추가 잘못 꿰매어졌는데, 흙탕물이 청정수가 될 리가 있었겠는가?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6. 우파 세력의 반격과 신탁통치 문제

건준에 밀려 있던 국내 우파 세력은 임시정부 귀국 환영회 취지의 단체를 만들어 반격한다. 즉 "임정이 민족 정통성을 갖고 있으니 귀국할 때 그 분들을 환영할 준비나 해야지 경거망동하며 벌써부터 인공이니 뭐니하며 정부 세운다고 깝치는 게 웬말이냐"는 프레임인 셈이다.

이어 임정 요인들의 귀국에 앞서서, 오늘날까지 이 땅의 한국인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문제적 인물 이승만이 귀국. 몽양 여운형 선생님은 당신이 만들지도 않으신, 인공을 지키기 위해서 이승만을 찾아가 인공의 대통령에 취임해 달라고 요청한다. 노회한 이승만은 이 요청을 딱 잘라서 거절하지 않고 답변을 보류(!)하는 신공을 시전한다. 그러고는 이승만은 자신이 만든 독립촉성중앙회에 좌익을 끌어들이는 시늉을 하다가 임정 절대지지로 선회하며 인공 대통령 취임을 거절한다. 이어 미 군정장관 아놀드의 인공 부인 성명까지 나오자 러시아혁명 때 케렌스키 임시정부처럼 이용해 먹다가 타도할 심산이었던 박헌영의 인공 사기극은 막을 내렸고 이에 실려가던 여운형도 머쓱해졌다.

이어 임정 요인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고 해방정국은 1945년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한반도에 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면서 요동치기 시작한다. 일제 35년의 혹독한 압제에서 이제 겨우 벗어났는데 미, 영, 중, 소 4개국의 신탁통치 5년을 받아야 하다니, 해방된 당시 우리 민족의 심경으로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 공산당조차 초기에 반탁 입장이다가 후에 반탁으로 전환하였다는 혐의를 받는 이 탁치문제에 관해 몽양 여운형 선생님은 꽤 온건한 찬탁입장을 취한다. 전승 연합국의 의도를 거스르기 어렵다는 현실적 판단에서 나온 입장이었다고 이해된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를 우파 세력을 결집시킬 기회로 이용했고 임시정부 주석 김구선생님께서는 격정적 반탁운동으로 대응한다. 결국 반탁운동은 대중적 지지를 모았고 남한의 우파 세력에게 결집할 수 있는 기회와 명분을 주었으며 남한만의 단정 수립을 위한 길을 터준다.

7. 공산주의자들과의 '연대'를 계속해 영향력을 잃어가는 몽양

이런 사태 전개 속에 몽양은 공산당과 절연하라는 요구를 외면하고 공산당과의 협력을 계속 유지한다. "공산당이 대변하는 인민들이 분명히 있는데 이를 무시할 수 없다. 나는 어떤 정치세력과도 절연할 생각이 없다"는 것이 몽양의 항변이었고, 그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과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한다. 뿐만 아니라 몽양은 북한을 여러 차례 극비 방문하여 김일성과 수회 회견한다. 그는 소련 군정의 지원으로 북한에서 권력 기반을 굳혀가던 김일성과의 대화가 분단 상황을 해소하고 독립 국가 건설을 앞당기는 방편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격화되는 냉전 속에서 미국과 소련은 자국군이 주둔한 지역에서 자신들의 정치/경제 체제와 반대되는 이념을 가진 정파를 용납하지 않았고 이는 한반도에서도 적나라하게 표출되었으니 북한에선 고당 조만식선생님이 탄압받았고 남한에선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으로 공산당이 불법화되었다.

그 와중에도 몽양은 남한에서 좌익 정당들이 연대를 해야 한다는 바람을 버리지 않았고(이는 북한에서 연안파와 소련파가 김일성과 손을 잡고 북조선로동당을 결성한 것에 영향을 받은 것),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백남운의 신민당에 자신이 이끌던 인민당을 합쳐 남조선로동당 결성을 시도한다. 그러나 솔까말 몽양의 진정성과 선의를 그저 호구 노릇하는 것으로만 보고 이용해 먹기만 한 박헌영은 이번에도 어깃장을 놓아 남한에서의 좌익 3당 합당은 무산된다.

박헌영은 그 추종세력만 모아 남로당을 결성하고 남로당은 창당 무렵부터 국립 서울대학안 반대 투쟁, 10월 폭동 등 극좌적 투쟁에 매달려 점점 고립화 된다. 심지어 박헌영은 상주 일행으로 위장해 관 속에 들어 가(박헌영의 북한에서의 최후를 생각하면 얼마나 상징적인가!) 월북했다.

8. 몽양, 마침내 좌우합작 운동에 나서다.

이렇게 좌우 대립이 격화되어 가던 해방 이듬해인 1946년 무렵에는 여운형은 부쩍 테러 당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극우와 극좌에게 모두 못마땅했을 그의 중도적 입장이 과격파들의 타겟이 된 셈. 그러나 여운형 선생님은 굴하지 않고 좌우대립과 분단을 극복할 마지막 수단이 될 그의 생애 최후의 정치적 도박에 착수하니 바로 좌우합작운동이었다. 미 군정 사령관인 하지 중장과 그의 하버드 출신 젊은 참모 버치 중위의 은근한 지원 속에서 시작된 이 좌우합작운동에서 우파쪽에서 몽양의 파트너가 된 이는 임시정부 부주석을 지낸 우사 김규식 선생님. 좌익의 박헌영과 우파 이승만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몽양과 우사의 좌우합작운동은 좌우합작의 7원칙에 합의하는 등 나름 성과가 있었으나 몽양이 1947년 7월 한지근에 의해 암살당하여 만사휴의(萬事休矣).

좌익과 우파로부터 공히 미움을 받았던 몽양 여운형 선생님의 암살 배후가 누구인지는 끝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남한 좌파 중 김구 선생님이나 이승만의 카리스마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과 포용력을 지녔던 몽양은 이렇게 해방 후 2년도 지나지 않아 유명을 달리한다. 몽양 여운형 선생님께서 이렇게 비명횡사하신지 1년 남짓 후에 남북한에는 적대적인 정부가 각각 들어섰고 그로부터 2년도 지나지 않아 소련과 중공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의 남침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9. 맺음말

여태까지 살펴 본 몽양 여운형 선생님이 활동하던 해방정국과 오늘날의 정치상황을 물론 1 대 1로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유사하지는 않다. 하지만 여야의 극단적인 대립, 세계경제의 불확실성 속에서 무기력만 노출하고 있는 대통령과 국회의 모습은 외세에 의한 분단과 좌우 대립을 슬기롭게 헤쳐 나아가지 못하고 결국 동족상잔이라는 파국으로 이어진(물론 그 가장 큰 책임은 남침을 한 북한의 김일성에게 있지만) 모습을 혹시나 닮아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하게 한다.

해방직후의 그런 좌우 대립의 극단적 상황에서 몽양이 말년에 추진했던 좌우합작은 우리 민족이 가졌던 유일한 희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몽양 자신의 행적에도 비판받을 점이 없지 않다. 민족 지도자로서의 위엄을 결코 잊지는 않았으나 일제로부터 치안권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분명치 못한 점이 없지 않았으며, 냉전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도 아쉽기만 하다.

특히 몽양이 당시 국민들의 기대를 한몸에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열망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공산주의자들과 절연하지 못하고 이들과의 연대를 마지막까지 고집하다가 스스로의 정치적 영향력마저 잃어 버리는 과정은 통탄스럽기 그지 없다. 몽양 사후 김일성과 박헌영이 동족상잔의 비극을 일으키고, 끝내 김일성이 박헌영을 숙청하기까지 하였음을 보면 몽양이 보다 빨리 이들과 절연하고 좌우합작 운동을 추진하지 못한 것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모쪼록 안철수 의원이 중심이 되어 추진 중인 제3세력은 70여년 전 몽양이 형성하고자 했던 제3세력의 꿈과 좌절을 잘 살펴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했으며, 무원칙한 연대로 스스로의 인기마저 잃어 버렸던 몽양의 실수는 제발 반복하지 않고, 국민의 열망에 부응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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