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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죄와 혐의 사이

정명훈과 헤어지더라도 이런 식으로는 곤란하다. 현재 그는 여론 재판에 질려서 한국을 떠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실관계에 근거해서 찬찬히 관심을 가지고 사안을 파헤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있는 그대로만 보면서 예우할 건 예우하고 조처할 건 조처하는 사회는 우리에겐 아직 이른 것일까?

  • 홍형진
  • 입력 2016.01.04 05:25
  • 수정 2017.01.04 14:12
ⓒ한겨레

서울시향 사건이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모양새가 웬만한 드라마나 영화를 뺨치는 수준이고, 그에 따라 여론 역시 밀물처럼 밀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형국이다. 하지만 그 양상에 적이 우려되는 부분이 있어서 이 글을 쓴다. 바로 그간 이야기된 대부분의 내용이 여전히 혐의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 유죄로 확인된 건 아니라는 점이다.

차근차근 되짚어보자. 사건은 서울시향 직원들이 전 대표의 인권유린을 폭로하며 시작됐다. 그 폭로는 직원들의 주장일 뿐이었지만 대다수 언론이 자극적으로 보도하며 전 대표는 삽시간에 희대의 악녀가 되어버렸다. 포털 등지에 도배된 욕설이 여론을 주도했고 그 와중에 언론사들만 클릭수 장사를 통해 돈을 벌었다.

시간이 흘렀다. 이번엔 전 대표의 인권유린 내용 가운데 성추행이 서울시향 직원 쪽의 무고였고 그 배후에 정명훈 감독의 부인이 있다는 혐의가 제기됐다. 이 또한 혐의일 뿐 정식 조사를 통해 검증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대다수 언론은 늘 그래 왔듯이 베껴 쓰는 방식으로 보도를 쏟아냈고 여론은 삽시간에 뒤집혔다. 정 감독은 권력을 악용해 비열한 협잡을 벌인 사람으로, 전 대표는 서울시향을 바로잡기 위해 그에 맞서 싸운 사람으로 규정돼버렸다.

데칼코마니처럼 똑같은 구도다. 확인되지 않은 문제 제기를 마구잡이로 베껴 쓰는 언론과 단지 그것만 보고 기정사실화하는 대중. 현재 명확하게 확인된 사실은 서울시 시민인권보호관의 조사와 공개된 녹취록 등을 통해 전 대표가 직원들을 향해 폭언을 했다는 점이 전부다. 폭언 등은 확인했지만 성추행은 확인하지 못했다는 게 당시 조사의 내용이고, 바로 그 성추행이 어쩌면 직원 쪽의 무고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이번에 제기된 것이다.

위 내용을 종합하면 사실관계는 간명해진다. 전 대표의 인권유린 행위는 있었다. 따라서 전 대표를 서울시향을 바로잡기 위해 헌신한 누군가로 규정하는 언사는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권유린 문제를 제기하는 과정에서 그 정도가 과장되거나 일부 조작됐을 가능성, 그리고 거기에 정 감독 부인 혹은 정 감독 본인이 연루됐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아직은 진위를 알 수 없다.

이럴 때는 판단 시점을 뒤로 미뤄야 한다. 단지 혐의만으로 정 감독 쪽을 범죄자 취급하는 것도 곤란하고, 근래 제기된 정 감독 쪽의 혐의를 덮어놓고 부정하는 것도 곤란하다. 무조건적인 단죄와 부정은 폭력과 고립을 야기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논의에 임하는 편이 옳다.

언론에는 좀 더 책임감 있는 자세가, 대중에는 유죄와 혐의를 구분하는 자세가 요구된다. 사건이 터질 때마다 사실관계 확인 없이 맘 편히 받아쓰는 언론도, 그렇게 생산된 기사가 와르르 뜨는 것만으로 기정사실화하는 대중도 모두 중병 환자다. 단지 함께 물어뜯을 누군가가 필요한 것일까?

정명훈과 헤어지더라도 이런 식으로는 곤란하다. 현재 그는 여론 재판에 질려서 한국을 떠나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사실관계에 근거해서 찬찬히 관심을 가지고 사안을 파헤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있는 그대로만 보면서 예우할 건 예우하고 조처할 건 조처하는 사회는 우리에겐 아직 이른 것일까? 이런 식이면 지난 10여년간 축적한 서울시향의 무언가가 우리의 자산으로 남을 수 없다. 이는 심각한 사회적 낭비다.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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