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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1월 03일 08시 42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1월 03일 14시 12분 KST

한 노숙자의 새해

무엇인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특히 의료 사각지대에 방치된 노숙자에게는 상상을 넘어서는 질병이나 염증이 있을 수 있다. 검사를 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항상 비용 문제가 걸리게 된다. 이런 내 맘을 갑자기 읽었는지 그는 하얀 은행 봉투 하나를 꺼낸다. "여기 돈이 있어요. 돈이라면 여기 있으니 제발 부족함 없이 치료해주세요. 아니 이 돈을 원무과에 미리 맡기도록 하죠. 원무과 선생을 불러주쇼." 봉투에는 가지런히 담긴 만 원짜리 다발이 들어 있었다. 백만 원은 족히 되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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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일 년의 마지막 날에도 아픈 사람은 있다. 사람들이 행복했던 한 해를 떠올리고, 다음 희망찬 한 해를 생각하며 큰 보폭으로 종종거리며 집으로 향하고 있을 때에도, 꼭 어디서엔가 아픔에 몸부림치는 사람은 있다. 아픈 사람에게는 그날이 해(年)의 마지막 날이건 다른 날이건 상관이 없다. 아프지 않는 일은 그들에겐 기약 없는 상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금 아프고 있는 사람이 지난해의 행복이라든지, 희망찬 내년을 떠올릴 수는 없다. 그래서, 행복이란 건 처음부터 있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은 모든 것을 잊고 더욱 쓸쓸하게 아프다.

1.

119 침대에 실려 찌든 술 냄새와 불결한 악취가 진동하는 노숙자 하나가 응급실에 실려 왔다. 노숙자가 실려 오는 일은 어떤 이유로든 흔하며, 경제적인 문제도 있을 뿐 아니라, 일반적인 소통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아 여러 가지로 해결하기 아주 힘들다. 그해 마지막 날 밤 근무하던 나는 그 실려온 노숙자를 보고 나의 가벼운 불운을 생각하며 약간 눈살을 찌푸리고 환자를 보러 나섰다.

어디가 아프냐는 말에 그는 며칠 전부터 생긴 심한 복통을 호소했다. 그 외에 손발이 저리고 저미면서 오그라드는 것 같다고, 그것도 며칠 전부터 계속된다고 했다. 나이는 사십 대였고, 노숙자 특유의 지저분하고 때에 찌든 옷가지와 악취가 도드라졌다. 올해 초에는 뇌졸중까지 왔었고, 최근엔 따로 식사 없이 술만 마셨다고 했다. 그는 그의 저린 손으로 아픈 뱃가죽을 꼭 붙잡고 구부린 자세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다지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으므로 나는 덤덤히 그 말을 듣고 있다가 진찰을 시작했다. 일단 통증을 호소하는 배를 진찰해야 했다. 나는 남루하고 때 탄 그의 윗옷을 젖히고, 그의 복부에 압력을 가했다. 그의 배는 내 손이 닿는 즉시 고통으로 극심히 떨었다. 배의 전 부분이 같은 반응이었다. 진찰을 마치자, 내 손끝에선 환자의 통증이 잔뜩 묻어났다.

무엇인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특히 의료 사각지대에 방치된 노숙자에게는 상상을 넘어서는 질병이나 염증이 있을 수 있다. 검사를 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항상 비용 문제가 걸리게 된다. 이런 내 맘을 갑자기 읽었는지 그는 하얀 은행 봉투 하나를 꺼낸다.

"여기 돈이 있어요. 돈이라면 여기 있으니 제발 부족함 없이 치료해주세요. 아니 이 돈을 원무과에 미리 맡기도록 하죠. 원무과 선생을 불러주쇼."

봉투에는 가지런히 담긴 만 원짜리 다발이 들어 있었다. 백만 원은 족히 되어 보였다.

담당 원무과 직원은 혼자 중얼거리며 다가왔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 보겠군.' 그는 노숙자를 보자마자 설명했다.

"여기는 돈을 맡아주는 곳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돈을 다 맡을 수는 없어요. 다만 당신은 의료보험이 말소되어 병원비가 많이 나올 것이고 체불 가능성이 크니 보증금 조로 삼십만 원만 일단 떼어 가겠습니다."

내가 CT 처방을 내자 그 직원은 다시 환자에게로 갔다.

"여전히 돈을 맡을 수는 없지만 생각보다 검사비가 많이 나왔어요. 삼십만 원 정도 더 주셔야겠습니다."

봉투는 빠르게 얇아졌다.

2.

보증금이 있었으므로 검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환자는 검사가 진행되는 동안 돈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니, 일방적으로 혼자 말하기 시작했다. "피검사를 하겠습니다." "무슨 검사든 해주쇼. 돈은 방금 냈고 더 있소." "CT를 찍겠습니다." "방금 돈을 냈으니 마음 놓고 찍으쇼. 안 아프게만 해 주세요." "진통제 맞겠습니다." "이게 안 아프게 하는 거요? 더 많이 써도 좋소. 방금 백만 원을 맡긴다니깐 안 맡아놓구선."

돈자랑인지, 푸념인지 모를 말들이 조용한 응급실에 오갔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돈에 관해서 계속 지껄이면 정말 꼴사납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던 사람들도 나중엔 눈살을 찌푸렸고, 환자는 이제 누가 묻지 않아도 하얀 봉투를 든 채로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이야기했다. "돈... 돈을 많이 찾아 왔다니까."

연말의 고요한 응급실에는 노숙자의 돈 이야기가 메아리쳤다. 나조차도 그 소리를 계속 듣고 있자니 거북했고, 마음속에선 환자에 대한 미움이 앞서가고 있었다.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닐 텐데, 왜 돈 자랑을 입 밖으로 응급실에 와서 하는지, 다른 사람도 다 같이 내는 진료비를 내고 왜 자신만 대접을 더 받으려 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3.

검사 결과는 곧 모니터에 떠올랐다. 아무리 화면을 뒤져도,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간 수치가 약간 높은 것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마치, 아프지도 않은 사람인 것처럼.

4.

나는 그 노숙자에게로 가서 이야기했다. "검사에선 이상이 없습니다. 깔끔해요. 그래서 해드릴 것도 많이 없습니다. 술 때문이겠지요. 알코올성 위염으로 인한 복통과, 알코올성 신경병일 겁니다. 애초에 그렇게 곡기를 끊고 술만 마시며 아프지 않기도 힘듭니다. 이건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네요. 전반적인 건강을 회복하고,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겁니다."

그 사이 조금 통증이 나아졌는지, 그는 얌전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이윽고 내 말이 끝나자, 남루한 노숙인 복장의 그는, 충혈된 눈과 약간 진정된 표정으로 한동안 침대 모서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나는 사업가였소. 그리고 보시다시피 완전히 실패했지. 노숙인으로 산 게 언제부턴지 기억나지도 않소. 길바닥에서 찬 소주만 마시고 살았지. 그러던 어느 날 배가 아팠소. 처음에는 술을 마시면 배가 덜 아파졌지. 하지만 점점 술이 깨도 배가 아프기 시작했소. 그래서 더 마시고, 그러면 배는 가라앉는 듯 더 아파지고. 그리고 오늘은 너무 참을 수가 없이 배가 아팠소. 술을 아무리 마셔도 숨조차 쉬기 힘든 통증이 줄어들질 않았소. 누가 뱃가죽에 칼날을 휘젓는 것 같아서, 손가락 하나도 댈 수가 없었소. 이러다 그냥 죽겠구나 싶었지. 이 통증만 없어진다면 나는 무엇이든 괜찮을 것 같았소..."

그는 붉은 눈시울로 잠시 주저하다 말을 이어갔다.

"... 그래서 나는 올해 모았던 돈의 전부인 백만 원을 은행에서 찾았소. 이게 전 재산이오. 그리고 전화기가 없어 119를 부르지도 못했지. 지나가는 택시를 불러 죽게 생겼으니 119에 신고해달라고 했소. 그리고 그걸 타고 온 거요..."

이런 제길.

그 말을 다 들은 나는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릿속이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해졌다. 나는 몸뚱이밖에 남지 않은 이 사람이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만 원을 모으기 위해 어떠한 노력이 필요했는지, 그 세계에 관해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나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고통과 인내가 있었을 것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그 일 년간의 고통과 인내와 바꿀 수 있는 하루치의 어마어마한 통증에 관해선 그 거대함에 무릎을 꿇은 듯,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다. 내가 알지도, 상상하지도 못하는 격렬하고도 깊은 통증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다. 올해 365일 동안 간신히 이겨낸, 고난이 듬뿍 담긴 봉투를 들고, 제발 아프지만 않게 해 달라고, 그 돈을 내가 뱀의 혀처럼 내밀어 잘라먹고 했던 말은, '검사에선 이상이 없습니다. 해드릴 것도 많이 없군요.' 따위의 말이었다. 손과 발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려왔다. 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딴 짓을, 의사가 하는 일이라고 내가 하고 있는 것인가. 부끄러워서, 정말 고개도 들 수도 없게 창피해서, 숨어버리고만 싶었다.

5.

12월 31일이었다. 그의 새해는 나의 새해와 동시에 왔다. 잠시였지만, 그는 나와 새해를 같이 맞았다.

6.

"검사에서 이상이 없다고 통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원인이 아니라는 거지요. 아플 수밖에 없는 원인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신의 통증은 지금 생활 모든 것에서 기인합니다. 그렇게 술을 마시고 몸을 망가뜨리면, 안 아프실 수가 있겠어요. 저는 환자분이 돌아가서 술 없이 따뜻한 밥을 떠먹고 따뜻한 곳에서 잤으면 합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통증이 가라앉는 날도 올 겁니다. 제가 지금 해드릴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제 선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없지만, 무슨 일인지 느낀 것을 이야기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부디 본인이 안 아플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밤새 나는 그가 더 치료받을 수 있는 방법을 수소문했다. 하지만, 병원 원무과는 아무리 부탁해도 받아주지 않았고, 그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그가 조금 다녔다는 병원에 전화해 알아봐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그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그의 치료는 나의 노력도, 그의 노력도 헛수고였다. 그렇다면 사회의 노력이 필요했는지, 아니면 사회의 책임이 필요했는지, 그런 것도 불분명했다. 모든 것이 불분명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격렬하고도 깊은 통증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신년의 새벽 내내 아플 때마다 진통제를 처방하고, 매시간 환자의 상태를 확인했다. 통증은 확연히 나아져갔지만, 이 사람이 내 곁을 떠나버리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지나칠 때마다 완강히 매번 그의 생활과 건강에 대해서 설득했지만, 그는 나아지는 만큼 완고해졌다. 내가 닿는 선에서의 추후 치료를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제대로 되지 못 했다. 그를 보낼 곳이 없었다.

7.

"죄송합니다. 저와 제 위치의 한계입니다. 아무리 알아봐도 받아준다는 곳이 없네요. 소견서를 쓰면 쓸모없는 검사를 하지는 않을 겁니다. 조그맣고 인적 없는 병원이라도 가세요. 그리고 부디, 통증의 원인이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술도 제발 그만 마시구요."

"안 갈 거요. 그냥 앓다가 죽겠소."

그는 소견서 한 장을 받아 들고 새해 햇살을 받으며 나섰다. 그는 작년에 모아둔 돈을 간밤에 거진 다 써버렸으므로, 추운 한 해를 시작할 것이다. 비틀거리는 뒷모습은 아직도 아프고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그렇게, 그는 나를 떠나 새해의 벌판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8.

나는 연말의 밤과 새해 아침의 불행을 받아 내고 아침에 퇴근했다. 그리고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깜빡 병원에 잊고 온 물건이 생각나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깜빡 놓고 온 서류가 있어서 전화 걸었습니다. 진료실에 있는데, 좀 챙겨주시겠어요? 당직실에 넣어놓으면 됩니다."

"아 네 그럴게요. 저 근데, 선생님, 그분이 갑자기 돌아와서 꼭 고맙다고 전해달라 신신당부하고 갔어요. 따뜻한 말씀 감사했다고요..."

"누구 말씀이신지요."

"그... 있잖아요... 그 노숙자분이요."

"..."

"..."

"... 네... 알겠습니다..."

지하철은 유난히 덜컹거렸고, 끊긴 전화기로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침 열차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새해 첫날의 햇살이 차량 사이로 환하게 들어왔다. 신년의 햇볕이라 그런지 눈이 부시게 환했다. 내가 탄 열차는 저 강 하류의 소실점까지 닿을 기세로, 영원히 덜컹거릴 것 같았다.

PRESENTED BY 호가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