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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1월 02일 10시 32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1월 02일 10시 33분 KST

한겨레 사진기자들이 뽑은 2015년 사진 15장

2015년 사건·사고 현장을 누볐던 <한겨레> 사진기자들이 한해를 마감하며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은 사진을 꼽아 봤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으나 팍팍한 우리 현실탓인지 ‘무거운 사진’이 많습니다. ‘유쾌발랄’한 모습이 많이 보이는 2016년을 기대하며 ‘2015년 나의 사진’을 소개합니다.

1. 팽목항 풍경

세월호 참사 1년을 앞두었던 지난 4월7일 저녁 7시께 팽목항은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한해가 가고 두 해가 지날 때쯤 열린 세월호 청문회는 모든 세월호 가족들과 국민에게 슬픔과 분노만 안겨주고 말았다. 세월호 가족들은 외친다. “제발 그만 하라는 말만 그만하라”고 말이다. 오늘 저녁 팽목항은 더 일찍 해가 졌을 것이고, 철썩거리는 파도소리만 팽목항 분향소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9명은 차가운 바닷속에 있는데 또 한해를 넘기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2. 민간인 학살 현장

지난 2월23일부터 우리나라 최대 민간인 학살터로 밝혀진 대전 산내면 골령골에서 유해발굴 도중 살며시 드러난 이름 모를 세 분의 유골에 발굴단은 국화꽃을 바치고 영혼을 달랬다. ‘대전산내사건 희생자유족회’ 등 모두 19개 대전지역 시민단체가 ‘한국전쟁기 대전산내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해 공동조사단을 꾸렸다. 국가가 저지른 범죄행위를 민간인들이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조사는 현장 발굴자료를 토대로 미국 육군정보부에서 비밀해제된 자료와 현장사진 18장을 바탕으로 찾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에는 밝혀내지 못하고 드러나지 않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민간인들이 아직도 땅 속에 묻혀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3. 세월호 희생자 신승희양의 어머니 전민주씨

세월호 희생자 안산 단원고 2학년 신승희양의 어머니 전민주씨를 인터뷰하기 위해 지난 5월 12일 오후 경기도 안산 단원구 선부동 승희양의 집에 도착한 뒤, 승희의 방에서 전민주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신승희양은 전민주씨의 막내딸이다.

“왜들 그러세요? 정말 화가 나요.” “놀러 갔다 죽은 애들”과 “나라 위해 죽은 천안함 용사”로 죽음의 등급을 나누는 미친 세상이 싫어요.“

승희는 사고 한 달 전 이를 예견하듯 ‘항해’라는 천안함 추모 시를 썼다.

어느 고요한 밤/잔잔한 바다에/서늘한 기운이/느껴졌다

그 기운이/우리의 가슴에 남아/계속/콕, 콕 찌른다.

그 아픔에/우리의 눈물이 비가 되어/잔잔한 바다와/뒤섞인다.

우리는/잔잔한 바다를/영원히

함께 항해하리. 2014년 3월,/<천안함 추모 나라사랑대회> 장려상, 신승희

그 시를 남기고,

“일주일간 예민하게 굴어 미안! 여행 다녀온 뒤 열공빡공 할게”라는 쪽지를 엄마에게 남기고 수학여행 길에 나섰다가 돌아오지 못한 승희. 그날 이후 일분일초가 승희 어머니에겐 심장 깎아내는 형벌의 시간이라고 했다. 인터뷰 내내 승희와 했던 마지막 통화 이야기를 하며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는 승희 어머니 전민주씨.

“애들 죽은 거 다 잊고 돈 많이 받을까봐 그러나요(오열). 억만금 줘도 안 바꿔요 절대로! 김치에 밥만 먹어도 행복했어요. 내 새끼 없는데 돈이 무슨 소용이죠?”

“아직 아이의 시신조차 못 찾은 윗집 은화 엄마를 용기 내서 만났어요. ‘미안하다’ 했더니 ‘그런 말 말라며, 뭐가 미안하냐’ 해요.”

“이런 말 주고받는 현실이 참으로 비참해요. 9명의 실종자 인양을 가장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한참을 듣고 난 뒤 사진을 찍기 위해 나는 이렇게 부탁의 말씀을 드렸다. “승희 어머니, 저는 승희 어머니의 사진을 이렇게 촬영해 보려고 합니다. 혹시 불편하시거나 싫으시면 안 해주셔도 됩니다.” 승희의 책상 위에 있던 승희의 사진이 들어있는 액자를 들고 설명했다.

“어머니와 승희가 겹치게 찍으려고 하니, 눈을 뜬 채 저를 바라보세요, 그리고 승희의 액자로 어머니 얼굴을 가렸다가 천천히 가슴까지 내려주세요.” 전민주씨는 사진기자의 의도와 마음을 이해하고 시키는 대로 몇 차례 반복해서 그 동작을 해 주었다. 셔터를 누르는 사진기자의 눈에서도 자꾸만 눈물이 흘러 몇 차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흐린 눈으로 셔터를 눌러야했다.

승희 어머니 전민주씨나 사진기자나 이렇게 해서라도 승희가 살아돌아 올 수 있다면 무엇을 못하랴 싶은 마음이 이심전심으로 와닿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촬영된 전민주씨의 사진은 한겨레 2015년 05월 23일 20면에 실렸고, 한국사진기자협회 선정 제149회 <이달의 보도사진상>을 수상했다. 이 상을 진도 앞 바다 승희양에게 바친다.

정확히 참사 20개월 뒤 지난 12월 16일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 청문회는 누구 하나 책임지는 이 없이 끝났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4. 눈 먼저 가려라…예고된 백남기 사태

지난 11월14일 경찰의 물대포 직사로 중태에 빠진 농민 백남기씨가 한 달여가 지난 지금도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흔이 다된 농민을 살수포로 사경에 빠트린 경찰의 과잉진압은 진즉 예고된 것이었습니다.

노동절을 맞아 세월호 참사 유족과 노동자, 시민들이 함께 거리에 나섰던 지난 5월1일,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려던 시위대는 안국역 네거리에서 경찰의 차벽에 가로막혔습니다. 차벽을 앞에 두고 집회가 이어지자 경찰은 몇 차례 해산을 종용하는 경고 방송을 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경찰 저지선 뒤에 대기하고 있던 살수차가 위용을 드러냈습니다. 시위대를 향해 살수를 할 것이란 예상과는 달리, 물대포에서 뿜어져 나온 물줄기는 바로 경찰과 시위대의 경계에서 취재를 하고 있던 기자들을 향했습니다. 물대포를 맞는 세월호 유족과 시민들을 경찰버스 위에서 기록하려던 사진·영상 취재기자들은 자신들을 향해 쏟아진 최루액 섞인 물줄기에 혼비백산해 흩어졌습니다.

7~80년대 군사독재 시절, 경찰은 폭력적 진압에 앞서 사진기자들을 구타하거나 현장에서 격리해 ‘공공의 눈’을 가리기 일쑤였습니다. 폭력배들도 폭력을 행사하기에 앞서 공포감을 키우고 증거를 남기지 않기 위해 피해자의 눈을 먼저 가리지 않습니까? ‘눈’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엄혹한 시절이 다시 돌아왔나 봅니다.

<이정우 선임기자 woo@hani.co.kr>

5. 임무교대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거친 이완구 전 국무총리는 대권 주자로도 거론됐지만 지난 4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으로부터 정치 자금을 받은 의혹에 휩싸여 사의를 표명했고 4월27일 이임식을 끝으로 공인으로서의 생활을 마쳤다. 그 뒤 공석이 된 총리 자리에 우여곡절 끝에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이 임명됐고 황 총리는 박근혜 정권을 지키는 충실한 총리의 임무를 여전히 잘 수행하고 있다. 이 전 총리의 이임식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본 황교안 총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늘 궁금하다. 전임 총리는 비리혐의로 낙마하고 현 총리는 국민을 편 가르기 하는 듯한 행보를 보이는 것을 보며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이 아프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총리’는 과연 어떤 총리가 되어야 할까?

<김경호 선임기자 jijae@hani.co.kr>

6. ‘영원한 청년’ 백기완의 눈물

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혼용무도(昏庸無道)’를 선정했습니다. ‘혼용무도’는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의 실정(失政)으로 인해 나라 전체의 예법과 도의가 송두리째 무너져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헬조선’이라고 부를 만큼 절망적이고 암울했던 한해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눈물과 한숨으로 지샜던 해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길바닥에서, 하늘 위 철탑에서 추위와 무관심에 악전고투 중입니다. 올 한해는 ‘눈물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내가 이 사진을 선택한 이유는 평생,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해 오신 백기완 선생님이 노동자들을 보면서 흘리는 이 눈물이 이 시대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과 정리해고 철폐를 요구하며 5일째 오체투지 행진을 한 금속노조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연대단체 참가자들이 1월11일 오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을 떠나 청와대로 향하는 마지막 오체투지 행진을 하다 광화문 교차로에서 경찰에 의해 들려 연행되는 모습을 보자 백기완 선생님이 눈물을 흘리는 순간입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7. ‘LET’S TALK(이야기 하자)’

며칠 전 오랜만에 뜻밖의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쌍용자동차 노사가 해고자 복직에 잠정합의했다는 것이다. ‘2017년까지 복직희망자들의 순차적 복직’, ‘손해배상과 가압류 철회’ 등 합의내용은 해고노동자들이 그동안 공장 안팎에서 끊임없이 외쳐왔던 것이다. 해고노동자들은 그동안 안 해본 것이 없다. 2009년 70여 일 동안의 공장 안 옥쇄파업, 공장 밖 송전탑과 공장 안 굴뚝농성, 부당해고 철회를 위한 법적 소송, 대한문 앞 천막농성 그리고 수많은 단식농성, 삼보일배, 거리선전전까지. <한겨레> 사진기자들도 그 모습들을 오랜 시간 관심을 갖고 카메라로 기록하고 보도했다.

내게 올해 기억에 남는 사진 한 장은 지난 1월 한겨울 평택 쌍용차 공장 굴뚝 위에서 농성을 벌이던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정욱 사무국장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이 공장을 방문한 아난드 마힌드라 회장에게 정리해고 문제 해결을 위해 ‘청테이프’를 이용해 ‘Let’s Talk(이야기 하자)’라고 쓴 작은 펼침막을 내건 모습을 찍은 것이다. 정리해고 뒤 짧지 않은 7년의 시간이 흘렀고, 그동안 28명이라는 안타까운 많은 죽음이 있었다. 아직 모든 게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럽다. 하지만, 새해에는 해고노동자들이 8년 만에 환하게 웃으며, 공장으로 다시 출근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해 본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8. 쏜살같이 달려간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시간

3년 전에 할머니 한 분을 만났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지역에서도 활발히 활동하신 김복득(97) 할머니십니다. 할머니는 그동안 일본의 사죄와 피해자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힘쓰는 한편, 청소년을 위한 장학금으로 전 재산을 기부하는 등 사회활동도 왕성하게 펼쳐오셨습니다. 때문에 언론과도 친숙한 유명인사(?)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언론에 노출된 분이라 해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뵈러 가는 길은 늘 마음이 어렵습니다. 사진설명을 쓸 때마다 이분들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고 소개하는 것도 아프고, 이제 연로하신 어르신들의 부음을 전할 때마다 남아계신 분들을 헤아릴 수밖에 없는 점도 죄스러운 탓입니다.

김복득 할머니를 처음 뵈러 갔던 2013년 봄.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 윤미향 상임대표와 활동가들을 따라나섰습니다. 일본에서 증언을 수집하기 위해 한국에 온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 교수의 여정에 동행한 참이었는데 이분들의 원래 목적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여러모로 조심스러웠습니다. 취재를 다녀와 사진을 살펴보니 현장에서 너무 조심했던, 그래서 소극적인 태도가 그대로 사진에 담겨 있었습니다. 상황을 설명하는 제게 한 선배가 말씀해주셨습니다. “조심하는 건 좋다. 다만, 이거다, 싶을 땐 양해를 구하고 적극적으로 취재했어야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차피 네가 그 현장에 갔다는 것 자체가 민폐다. 그렇다면, 좋은 사진으로 그 폐를 갚아야 한다.”

구구절절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출장이 아닌 개인 여정으로 다시 통영 가는 버스에 올랐습니다.

할머니는 다시 저를 반갑게 맞아주셨습니다. 하지만, 십여 분 지나 “아, 며칠 전 그 처자?” 하고 떠올리며 웃으십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할머니를 찾아왔겠습니까.

할머니의 단칸방에서 함께 쌍화차를 끓여먹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홀로 사니 아무래도 목욕이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하십니다. 할머니가 먼저 청하셨는지, 제가 함께 가자 말씀 드렸는지는 기억이 잘나지 않습니다. 할머니와 저는 지팡이를 짚고 통영 북신동 골목을 내려가 목욕탕으로 갔습니다. 여자들이 함께 목욕탕에 간다는 건, 상대에게 나를 무장해제한다는 뜻과 같습니다. 그날 할머니의 등을 밀어드리는 동안 할머니는 제 마음속으로 훅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2013년 사진이 왜 ‘올해의 사진’이냐고요?

그동안 취재한 할머니 사진들이 올해에야 지면에 실렸기 때문입니다. 일간 신문의 특성상 흔치 않은 일인데, 이렇게 할머니의 사진을 모아놓고 보니 어르신께 시간이 얼마나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는지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래서 더욱 마음이 아렸습니다. 제자리에서 미력한 힘이나마 보탤 수 있도록 새해에도 더욱 부지런히 움직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9.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2년 4월 22일 경기도 평택 쌍용차 공장 앞, 해고 희생자를 추모하는 자리에 모인 노동자 중 그가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 내린 머리칼과 또렷한 눈동자, 맑은 얼굴빛이 인상적이었다. 시간에 쫓겨 이름과 해고 날짜만 물어본 채 헤어졌지만, 그의 맑은 얼굴은 쉽게 잊히지 않았다.

‘기아차 해고 비정규직노동자 윤주형씨 자살’. 2013년 1월 29일 그의 죽음을 알리는 기사를 보는 내내 정신이 멍했다. 나는 화성의 윤 씨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윤 씨의 장례식장은 을씨년스러웠다. 원직복직 문제를 둘러싸고 해고자 모임과 정규직 노조 사이에 갈등이 빚어져 시신을 앞에 두고 노동자와 노동자가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례식장을 다녀온 날 밤,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카메라를 내려놓고 세상과 직면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내는 울먹이는 나를 다독이며 말했다.

“자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믿는 사람이잖아.”

언제 어떻게 해고될지 모르거나 특정 시간만 쓰이고 버려지는, 이런 삶을 감당해야 하는 노동자가 노동인구 전체의 절반에 달하고, 더욱이 이들을 둘러싼 노동환경은 악화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보에 대한 희망을 품고 대한문 앞에서, 서울광장에서, 청계광장에서 그리고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15년, 고 윤주형씨를 비롯해 13명의 해고노동자들 다시 만난 <3년 전 만난 해고노동자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나요> 기획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대한 나의 대답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지금 이 순간,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 최정명·한규협 씨는 “불법파견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국가인권위원회 옥상 광고판에 올라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10. ‘헬조선’의 대학생들

‘헬조선’과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를 뜻하는 삼포세대, 오포세대, 엔(n)포세대, 흙수저, 금수저 등 올해 한국사회를 상징하는 단어들은 암울한 젊은 세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줬다. 청년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자조 섞인 말들을 뱉어냈다.

알바노조 조합원들이 지난 7월 3일 국회 앞에서 이런 자신들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작은 쓰레기봉투 안에 들어갔다. 다 큰 성인들이 쓰레기봉투에 들어가는 것 자체도 쉽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옆에서 도와 줘야만 간신히 봉투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균형을 잡기도 어려웠다. 오뚝이처럼 일어섰다가 또다시 넘어지고는 했다. 한낮 최고 기온이 30도가 넘는 날씨에 들어가 있던 쓰레기봉투는 금세 땀으로 가득 찼다.

2016년은 청년들이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새해가 되었으면 한다. 한 시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해도 만원도 벌지 못하는 처지를 비관하지 않았으면 한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11. 12. 빛바랜 사진과 ‘단풍잎 편지’ 속 이산가족 이야기

감이 익어가고 단풍이 한창 물들던 2015년 가을, 남쪽과 북쪽에서 수많은 이산가족을 만나고 취재했습니다. 남과 북으로 헤어진 이산가족들은 조금만 참으면 만날 줄 알았다가 6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올해처럼 남북의 정치적 합의가 극적으로 이뤄져야 겨우 만나는 게 현실이고 남쪽에만 이산가족 상봉신청자 중 살아계신 분이 6만 6000여 명에 달하다 보니 상봉 기회를 잡는 200여 가족 안에 드는 것이 복권에 당첨될 확률만큼이나 희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도 고이 지니고 있던 가족의 사진을 꺼내들고 북쪽에 보내는 ‘이산가족 영상편지’를 찍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북쪽 가족의 안부를 묻고 ‘꼭 만나자!’라는 이야기를 하며 눈시울을 붉힙니다. 어렵게 상봉의 기회를 얻은 가족들은 어떨까요? 그들 역시 2박3일 상봉기간 동안 얼굴을 마주보고 손을 붙잡고 함께 밥을 먹었지만 그 시간은 헤어져 있던 긴 세월에 비해 보잘 것 없습니다.

이 두 사진을 보고 ‘이게 무슨 이산가족을 취재한 보도사진일까?’하며 어리둥절해 하실지도 모릅니다. 카메라 렌즈를 보며 가족의 생사를 묻다가 눈시울을 붉히거나, 상봉 현장에서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은 이미 지면을 통해 많이들 보셨을 것 같아 이 사진들을 골랐습니다.

한 장은 적십자사가 만들어 북으로 보내는 ‘이산가족 영상편지’를 찍은 권혁동씨가 감나무가 있던 경북 영주의 집 마당에서 찍은 어릴 적 모습과 권씨의 얼굴을 본 적 없는 북쪽의 아버지 권오은씨의 사진입니다. 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군에 징집되고 4개월 뒤 태어난 권씨는 이제 66살이고 아버지 권오은씨는 살아있다면 88살입니다. 어느 쪽이 어린 아들이고, 어느 쪽이 젊은 아버지일까요? 여태껏 서로 본 적 없는 부자의 옛 모습이 담긴 두 장의 사진이 익어가는 감과 함께 바래지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 장은 지난 여름 비무장지대 목함지뢰 도발과 서부전선 포격사건 등으로 남과 북의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이뤄진 남북 합의를 통해 10월 금강산에서 열린 제20차 이산가족상봉행사 때 취재한 사진입니다. 2박3일의 상봉기간 중 마지막 상봉시간, 이 가족 저 가족이 모여 앉은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취재하던 제 눈에 북쪽 리경숙 할머니 손에 쥐여있던 단풍잎 한 장이 들어왔습니다.

단풍이 한창이던 금강산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편의 누나를 만나러 온 남쪽 올케가 숙소 근처에서 주은 낙엽에 ‘형님 반가웠습니다.’라고 곱게 적어준 글씨. 시대의 비극인 남북 이산가족의 현실이 오롯이 담긴 상봉현장을 취재하던 중 본 그 ‘단풍잎 편지’가 지금도 제 눈에 선합니다. 아마도 그 ‘단풍잎 편지’를 북쪽 리경숙 할머니는 품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겠지요?

대통령은 통일을 외치고 있지만 올해 이산가족들을 만나 취재해보니 통일은 아직도 먼일 같아 보입니다. 소리없는 메아리 같은 영상편지, ‘로또’나 다름없는 일회성 상봉 대신 언제든 생사와 안부를 물을 수 있는 편지 교환과 전화 연락을 허용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일까요? 전 세계인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영상통화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이 시대에 만난 남과 북 이산가족들의 눈빛이 마음을 어지럽게 했던 2015년 취재 현장이었습니다. 모든 이산가족이 자유롭게 만나게 돼 더 이상 이산가족 취재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길 기원해 봅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13. 이들의 간절한 기도를 신이여 들으소서!

세르비아어 및 아랍어 통역자가 없어 인터뷰가 쉽지 않았고 일은 더뎠다. 결국, 사회부 김규남 기자와 헤어져 각자 취재를 하기로 했다. 난민에게 잔인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불가리아 경찰로부터 도망쳐 온 난민들이 몰려있는 세르비아 남쪽의 국경도시 디미트로브그라드까지 택시로 2시간가량 걸려 도착했다. 오후 5시 반 크로아티아로 향하는 난민열차를 타고 취재를 하려면 1시간 내에 모든 취재를 마쳐야 했다. 디미트로브그라드 난민등록소 앞에서 만난 아프가니스탄 난민 시자프(가명·37)는 지난해 2월 아들 사이르(가명·12)가 납치됐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납치범들에게 2만 5000달러(2800여만 원)를 주고 45일 만에 아들을 찾았다. 아프간에는 10여 년 전부터 어린이 유괴 사건이 급증했고 현재 매우 빈번하다.”라며 미국의 아프간 내정 개입을 납치사건 급증 이유로 꼽았다. 미국이 아프간에 개입하면서 경제가 어려워졌고, 미군이 아프간에서 철수할 때 이 나라 경제가 완전히 붕괴했다고 그는 주장했다. 또 돈의 흐름이 끊긴 아프간 경제 상황에서 어린이 유괴로 돈을 요구하는 방법 외에는 돈 구경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의 안전과 미래를 위해 브로커에게 1만 8000달러(2000여만 원)를 건넨 뒤 고향을 탈출했다.

시간 안에 취재를 마쳤지만 발칸반도의 해가 일찍 떨어져 택시 운전사는 서행을 했다. 양손을 부여잡고 기차를 놓치지 않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했지만, 결국 기차 출발 예정시각을 15분 지나 프레세보 기차역에 되돌아왔다. 늦었지만 기차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신은 이 간절한 기도에 응답했고 이들의 고단한 여정을 사진으로 기록할 수 있게 허락했다. 그들의 지친 모습이 아직도 떠오른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14. 세월호 참사 현장의 어머니

세월호 참사 희생자 단원고 박성복 군의 가족을 1년 9개월 가까이 만났다. 어머니 권남희씨는 그사이 10년을 산 사람처럼 얼굴이 변했고, 아버지 박창국 씨는 몸무게가 10㎏ 이상 빠져 광대가 도드라졌다. 아들을 먼저 보낸 고통과 마주한 부모 앞에서 차마 울 수 없어 푼수처럼 웃으려 애썼다. 하지만, 헤어지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세월호 청문회’ 둘째 날인 12월15일은 성복이 생일이었다. 그날 권남희씨가 서울 명동 와이더블유씨에이 청문회장에서 울고 있는 모습을 우리 신문 2면을 통해 봤다. 답답했고 눈물이 났다. 세월호 참사는 성복이 가족 마음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15. 민간인 지뢰 피해자 이경옥

지난 4월 철원군 민간인통제구역에서 열린 평화나무심기행사에서 민간인 지뢰 피해자를 만났다. 명목임금으로 계산된 60여만 원의 위로금이 전부라는 지뢰 피해자들의 하소연을 들으며 그들의 잘린 다리를 힐끗 쳐다봤다. 60여만 원짜리 다리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한기호 의원실에 부탁해 국방부가 발표한 자료를 수차례 확인했다. 그리고 취재원을 찾아 헤맸다. 아무도 취재에 응하지 않았다. 그렇게 4개월을 보낸 뒤 민간인 지뢰 피해자 이경옥 목사를 만날 수 있었다. 민간인 지뢰 피해자들은 문제 많은 특별법 개정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의 분투를 계속해서 사진으로 기록하고 싶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