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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1월 01일 09시 41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1월 01일 14시 12분 KST

나이 먹는 즐거움

이건 확실히 나이 먹는 즐거움이다. 흔히들 중요시하는 존재감이란 게 점점 없어진다. 기를 쓰고 남에게 이겨야 할 일도 없고, 남보란 듯이 살 필요도 없어졌다.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예전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옳을 때 반대편 입장인 남이 동시에 옳기도 하다. 별 생각 없이 근근이 산다는 것의 묘미를 터득해 가고 있다고나 할까. 특별히 멋진 사건들이 없어도 하루하루가 괜찮은 날들이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줄리엣 비노쉬가 주연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영화 제목이 생각날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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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에 내가 저지를 일들 중 하나는 동네 명상 모임이다. 야매 명상지도사 경력이 있다는 소문을 냈더니 주민 몇 분이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모처럼 자원 봉사할 기회라 살짝 흥분된다. 장소는 아파트 단지 내 경로당 옆방. 당장 1월 첫 화요일부터 저녁 7시에 모이기로 한다. 우울증을 지병으로 갖고 있는 분들을 우선 고객으로 모실 참이다. 물론 우리 동네 사람 누구든 참여 가능한 1 시간짜리 프로그램이다. 준비물은 요가 매트 한 장.

내가 생각하는 명상은 우아하거나 복잡하지 않다. 하루에 십분 정도, 지금 내가 어디 만큼 와 있는지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다. 돈 안 들이고 날마다 할 수 있는 마음의 샤워랄까. 심호흡부터 시작해 내 몸의 각 부위에 감사하는 연습으로 시작한다. 태어난 이래 일 분 일 초도 쉬어본 적 없는 심장이 특급 감사 대상이다. 아픈 허리와 무릎, 고관절을 포함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향해 사랑의 에너지를 보낸다. 다쳤던 다리나 어깨, 발목에게도 인사를 한다. 평생 쥐어짜며 살고 있는 뇌와 뇌혈관, 온몸을 가로 지르는 혈관들에게도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그 다음은 내 마음 속 시끄러운 욕심들과 화를 바라볼 차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이들에 대한 원망과 적개심을 직시한다. 부당하게 대우받았다고 외치며 사소한 일에도 상처받았다고 주장하는 에고를 바라본다. 왠지 손해 보는 것 같고 왠지 억울하다는 느낌들이 일어나는 그곳을 들여다본다. 가능한 한 외부에 모든 탓을 돌리는 바로 그 놈이 있는 곳을 보자는 거다. 그것이 명상이다.

내 경우,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날 때 그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가는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된 건 얼마 전부터다. 돌발적인 분노의 포로가 돼버리는 자신을 본 것이다. 그 격한 감정의 노예 상태에서 숱하게 저질렀던 판단 착오와 어이없는 행동을 떠올리며 씁쓸하게 웃을 수 있게 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수년째 해온 명상 덕분일까. 60년 동안 내 주인 노릇을 해온 에고가 흐물흐물해지고 있나 보다. 가족을 향해서든 주위 사람들을 향해서든 화가 별로 나지 않는다. 서운 섭섭한 마음도 들지 않는다.

이건 확실히 나이 먹는 즐거움이다. 흔히들 중요시하는 존재감이란 게 점점 없어진다. 기를 쓰고 남에게 이겨야 할 일도 없고, 남보란 듯이 살 필요도 없어졌다.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도 예전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옳을 때 반대편 입장인 남이 동시에 옳기도 하다. 별 생각 없이 근근이 산다는 것의 묘미를 터득해 가고 있다고나 할까. 특별히 멋진 사건들이 없어도 하루하루가 괜찮은 날들이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줄리엣 비노쉬가 주연했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영화 제목이 생각날 지경이다.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삶이 참 재미있는 여정이라는 사실에 마침내 눈을 뜬다. 100년 미만이지만 이 행성에 머물 영광이 주어졌다는 게 기적이라고 느낀다. 한국어를 모국어로 해서 하필 이 시대에 태어났다는 것도 신기하기 그지없는 일. 인류 문명을 통틀어 이만큼의 압축 성장 내지 극적인 변화를 겪어낸 시대와 장소가 일찍이 있었을까. 파란만장하지 않으면 이 시대를 제대로 살았다고 할 수 없을 지경이다. 세상 구경, 사람 구경이 이보다 더 경이로울 수 없는 시대!

학교 다닐 때 아무 생각 없이 외웠던 시의 한 구절이나 유행가 가사의 뜻을 문득 다시 만나는 기쁨도 있다.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 'What A Wonderful World'를 듣다가 그 노랫말을 쓴 사람이 깨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붉은 장미가 피어나는 순간과 칭얼대는 아기들이 커서 살아갈 날들을 노래하는 시선이 하늘 아래 새로울 게 없는 '바로 그것'을 가리키고 있는 까닭이다.

도종환 시인의 시,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를 떠올린다. 나도 얼추 삶의 오후 다섯 시를 지나고 있기 때문이겠지.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가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시에서 다섯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시에서 한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 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시인은 질풍노도의 12시와 오후 1시 사이를 기억하면서도 어두워지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있음을 노래한다. 내게도 아직 시간이 있다. 아니 충분한 시간이 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칠 기회. 내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할 기회. 내가 잘못을 저질렀던 상대방에게 용서를 구할 기회가 아직 남아있다. 잘못을 만회할 기회 뿐 아니라 사랑하고 감사할 기회까지 있다. 사랑하고 축복하는 능력이 남아 있는 덕분이다. 그 분야에 관한 한 우리 모두는 죽는 날까지 현역이 아닌가. 그 사실조차 고맙다.

한 생애의 세 번째 30년이 내 앞에 있다. 그 여정이 어떻게 펼쳐질까. 여전히 삶은 흥미진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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