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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2015년의 시대정신이다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거대한 일이다. 2015년의 진짜 시대정신은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냐'며 소리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해일이 몰려온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조개를 줍는 사람들의 것이다. 캐나다의 젊은 트뤼도 총리가 "남녀 동수로 내각을 구성한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웃으면서 말했듯이, 지금은 2015년이니까.

  • 김도훈
  • 입력 2015.12.28 06:28
  • 수정 2016.12.28 14:12

크리스마스 이브에 술을 잔뜩 마시고 집에 돌아와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 재관람을 위해 열심히 영화 예매 앱을 뒤지다가 소셜 미디어를 켰다. 그놈의 소셜 미디어는 절대 잠을 자기 전에 켜서는 안 된다. 왜냐면, 그건 당신의 수면을 제국군에 침공당한 저항군의 요새처럼 뒤흔들어 놓을 테니까 말이다. 하여간 나는 소셜미디어에서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가 2015년의 시대정신을 망각했다는 요지의 글을 하나 봤고, 이건 어쩌면 거기에 대한 간단한 대답이 될 것이다.

사실 미국이라는 국가의 현대적 신화가 되어버린 '스타워즈' 시리즈에 대해서는 지난 반세기 동안 수많은 정치적, 정신분석학적 평론이 이어졌다. 해당 글에서는 1977년 작 '스타워즈'가 베트남전 패배의 후유증을 묘사한 영화로, 초라한 저항군의 모습은 베트남전 패배 악몽에 시달리는 미국의 자화상이라고 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카터의 퇴진과 레이건의 출현을 예언하는 영화라는 비평은 8~90년대 영화평론가 지망생들의 필수서적 중 하나였던 '베트남에서 레이건까지'의 로빈 우드 이후 끊임없이 반복됐으니까. 또한 '스타워즈'는 (그들에 따르면) 파시즘과 폭력에 대한 정당화이거나 성차별과 인종차별로 가득한 영웅주의 할리우드 신화의 시작이기도 했다.

나는 그 많은 비평들이 일리가 있건 없건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으로써는 지나치게 심각하게 들리긴 하지만, 영화로부터 예술가와 대중의 정치적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읽어내려는 시도는 꽤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J.J. 에이브럼스의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에 2015년의 시대 정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단지 여성인 레이가 제다이가 되고, 흑인이 조력자로 나선다는 점에서 오리지널보다 진보했다고 할 수는 없다고? 그렇지 않다.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에서 에이브람스가 여성과 흑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은 약간의 진보가 아니라 거대한 21세기적 진보다. 그것은 2015년 한 해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뒤흔든 '다양성'과 '페미니즘'이라는 두 이슈를 영화 역사상 가장 거대한 상업적 이벤트에 탑재해버렸다는 점에서 더욱 상징적이다.

나는 주인공인 핀이 처음으로 스톰트루퍼 헬멧을 벗을 때, 이미 흑인 배우 존 보예가가 그 역할을 연기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잠깐 숨을 멈췄다. 내 머릿 속에서 하얀 스톰트루퍼 속에 있는 기본 인종이 언제나 백인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여자 주인공 레이가 처음으로 손에 라이트세이버를 쥘 때, 그리고 포스를 깨달을 때, 또다시 숨을 죽였다. 내 머릿속 제다이의 기본 성별이 언제나 남자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스타워즈 : 깨어난 포스'는 그저 주인공 캐릭터들을 흑인과 여성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전 세계 수억명의 관객들이 오랫동안 갖고 있는 인종적, 성적 편견을 깨어나게 만드는 놀라운 서커스를 부렸고, 그 효과는 생각보다 더 강렬할 것이다.

종종 사람들은 영화로부터 거대한 정치만을 읽어내려한다. 영화 속의 정치적 구조, 선악의 구조로부터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 들어있었을 현실 정치의 명쾌한 거울 상을 찾아낸 뒤, 손쉽게 영화를 '진보'냐 '보수'냐, 시대정신이 있느냐 없느냐로 나눈다. J.J. 에이브럼스는 주인공 캐릭터들을 여성과 흑인으로 설정한 것이 '당연히' 의도적이었다며 "다양성 측면에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대변하는 캐릭터를 영화 속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건 절대 작은 일이 아니다".

에이브럼스가 옳다. 그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거대한 일이다. 2015년의 진짜 시대정신은 '해일이 몰려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냐'며 소리 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다. 해일이 몰려온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계속해서 조개를 줍는 사람들의 것이다. 캐나다의 젊은 트뤼도 총리가 "남녀 동수로 내각을 구성한 이유가 뭐냐"는 질문에 웃으면서 말했듯이, 지금은 2015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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