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남양유업 밀어내기 '갑질'에 맞선 남자, 그렇게 투사가 된다

  • 허완
  • 입력 2015.12.24 10:46
  • 수정 2015.12.24 11:13

김대형 남양유업 대리점주협의회 대외협력실장이 15일 서울 삼성동의 폐업한 식당 안에 차린 사무실에서 남양유업과의 분쟁 관련 일정이 적힌 칠판을 들고 설명을 하고 있다. ⓒ한겨레

거꾸로 가는 민주주의

인물로 본 2015년

⑦ 파산한 남양유업 대리점주 김대형 “갑질 욕설 파문에 공정위 조처 시늉만…‘을의 싸움’은 계속”

2년여 전, 김대형(36)씨는 우유배달 냉장트럭 운전석 한편에 손도끼를 두고 다녔다. 2004년 서울 용산구 보광동에서 아버지와 함께 남양유업 대리점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바닥까지 내려앉은 절망은 섬뜩한 살의로 변했다. 평생 우유 대리점을 하며 세 남매를 키워낸 아버지는 고등학교 졸업 뒤 군대를 다녀온 김씨에게 “우유배달은 성실하게만 하면 밥은 벌어먹는다”고 했다. 하지만 2006년 12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상황이 돌변했다. 주문을 하지도 않은 제품을 일방적으로 떠넘기고 반품도 받아주지 않는 ‘밀어내기’가 쏟아졌다.

“아버지는 워낙 아는 게 많으니까 본사 담당 직원들도 함부로 못했죠. 밀어내기도 심하게 못했어요. 그런데 나만 남으니까, 내가 어리고 만만하니까 표적이 된 것 같아요.”

밀어내기를 떠안느라 순식간에 신용불량자가 됐다. 아파트를 나와 다가구 주택으로, 다시 반지하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다. 본사 담당은 다음달부터는 밀어내기가 없을 거라는 말을 반복했지만, 늘 거짓말이었다.

아내와 세 딸이 단칸방에 뒤엉켜 잠든 모습을 보기 싫어 트럭에서 잠을 청하며 김씨는 손도끼를 휘두르는 자신을 상상했다. 그러던 2012년 11월, 서울 보문동에서 대리점을 하다가 밀어내기에 시달려 그만둔 점주에게서 전화가 왔다. 같은 남양유업 서울 서부지점 소속이라 종종 회의 때 만나 고민을 나누던 형님이었다. 그는 남양유업을 상대로 함께 싸울 대리점주를 모으고 있다고 했다.

“무조건 하겠다고 했어요. 통화 중에 막 울었어요. 나를 불러준 게 너무 고맙더라고요.” 첫 모임에 나가보니 김씨를 포함해 세명이 모였다. 대통령 선거가 코앞이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왕십리 대리점주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 경제민주화는 실천될 것 같다. 기대해보자”고 했다. 경제민주화 공약을 내건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고, 남양유업 대리점주 세명은 2013년 1월부터 남양유업 본사 앞에서 날마다 집회를 열었다.

2013년 5월13일, 남양유업 대리점피해자협의회 회원이 서울 중구 남양유업 본사 앞에서 남양유업 제품들을 바닥에 버리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겨레

집회가 무관심 속에 다섯달째로 접어들 무렵, 김씨는 녹음파일 하나를 유튜브를 통해 공개했다. 본사 영업사원이 아버지뻘 대리점주에게 밀어내기를 강요하며 퍼부은 욕설과 폭언이 고스란히 공개되자 온 나라가 ‘갑질 논란’으로 들끓었다. 검찰이 남양유업 본사를 압수수색했고, 공정거래위원회도 조사에 나섰다. 임기 첫해인 박근혜 대통령은 “상생의 질서를 제대로 확립해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이 현장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확실하게 챙기겠다”고 약속했다. 갑질 논란 뒤 약 두달 만에 일부 대리점주에 대한 피해보상 협상도 타결됐다.

이후 모든 잘못은 바로잡혔을까? 공정위는 2013년 7월 남양유업의 밀어내기 등에 대해 과징금 123억원을 부과했다. 이례적으로 큰 금액이었다. 하지만 1년 반이 지난 올해 1월 서울고법은 123억원이 아니라 5억원만 내면 된다고 판결했다. 공정위가 충분한 증거자료를 확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9월 국정감사에서는 남양유업이 대리점 발주 프로그램 업데이트를 통해 밀어내기 증거자료를 폐기한 정황이 드러났지만 그뿐이었다. 증거인멸 행위를 수사해달라고 검찰에 고소했지만, 최근 무혐의로 결론이 났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11월을 마지막으로 ‘경제민주화’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올 초 과징금이 5억원으로 줄어든 것을 보고 너무 열받아서 공정위에 다시 신고했어요. 밀어내기를 입증할 자료를 우리가 모아서 줄 수도 있다고 했지만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 눈치였어요. 욕설 녹음파일 때문에 여론이 뜨거우니까 잠깐 뭐라도 하는 시늉만 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성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김씨를 비롯해 본사의 밀어내기를 뒷받침할 증거를 확보한 대리점주 100여명은 7천만~8천만원씩 회사로부터 보상을 받았다. 지난 3일에는 ‘남양유업법’이라는 별명이 붙은 ‘대리점 거래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 제정안도 부족하나마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김씨는 여전히 남양유업 대리점주협의회 대외협력실장을 맡아 본사와의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아직도 대리점주 1700여명은 밀어내기 피해 보상을 받지 못했다. 남양유업법을 재차 개정하기 위한 활동도 한다. 대리점주 단체에 본사와 집단적 교섭을 할 권리를 부여하는 게 목표다.

“처음에는 우리가 회사로부터 받아야 할 돈만 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분들을 만나면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우선은 남양유업 대리점주 모임을 튼튼하게 하고, 이후에 다른 회사나 다른 업종 대리점주들과 함께하는 단체까지 만들 생각입니다.”

거꾸로 가는 민주주의:인물로 본 2015년 (시리즈 전체 보기)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사회 #경제민주화 #경제 #남양유업 #공정거래위원회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