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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중동 난민 부부가 낳은 어떤 아기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황송하게도 여관도 구하지 못하여 무려 (말)구유에 강보로 싸인 채로 뉘었다는 얘기는 누가복음에만 기술되어 있다. 정말 "책 읽기는 상황 읽기"인지 중동에서 많은 난민들이 발생하고 특히나 가련한 어린이들의 가슴 아픈 소식들을 올해 뉴스에서 많이 접해서인지 아기 예수도 모든 속주민들은 등록하라는, 황제의 지엄한 명에 따라야만 하는 부모 탓에 아빠의 조상이 살던 곳이라지만 여관에 자리도 못 구하고 구유에서 태어나셨다는 모습이 참 이 분은 나실 때부터 정말 낮은 곳으로 임하신 분이구나 하는 전율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 바베르크
  • 입력 2015.12.24 06:40
  • 수정 2016.12.24 14:12
ⓒwikipedia

내일은 성탄절이다. 나는, 부끄럽게도, 교회와 성당이라고는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 어디서 라면을 준다더라는 소문에 솔깃해 들려 본 일이 거의 전부인 비신자이지만, 그래도 주중에 하루 휴식을 허락해 주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약성경에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다루고 있는 부분들을 한 번 읽어 보았다. 물론 성경처럼 2천년 넘게 숱한 학자들에 의하여 꼼꼼히 분석된 텍스트를 얼치기 비신자, 비전문가가 읽는 것이라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린 글이겠지만, 크리스마스를 맞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독자 제현께서도 꾹참고 읽어 주신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신약성경의 4복음서 중에서 예수님 탄생에 대하여 다루고 있는 것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다. 이렇게, 크리스트교의 창시자라 할 만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4복음서 중에서,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예수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아예 빼먹고서, 대뜸 세례 요한에게서 예수님께서 세례받는 이야기부터(예수님의 이른바 공생애가 시작하는 때로 알고 있다) 시작하지를 않나, 예수님 탄생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도 그 내용이 상당히 다른 것이 이채롭다. 성경과 같은 종교 경전에서야말로 단일한 국정 경전(웃음)을 추구했을 법한데 4복음서에서 이렇게 예수님 생애를 제각각으로 다루다니, 그래도 크리스트교가 전세계에서 오랫동안 번성한 걸 보면 그 간절한 기운^^이 우주에 전달되었기 때문인가 싶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중에서 나 같은 문외한이 날림으로 읽기에는 마태복음의 예수님 탄생 부분이 뭐랄까 좀 더 딱딱한 정통 역사서 같은 느낌적 느낌이랄까? 우선 무려 42대(!)에 걸친 아브라함으로부터 다윗왕을 거쳐 예수님에 이르는 누가 누구를 낳고 또 누구는 모모를 낳고 하는 이야기가 처음부터 나와서 좀 독자 기를 질리게 하는 면이 있다. 그리고 하필이면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딱 14대고, 다윗부터 바빌론 유수까지 또 14대이며, 바빌론 유수부터 예수님까지 14대인 것은 너무나도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느낌적 느낌도 드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트친님 말씀처럼 어차피 성령이 처녀에게 잉태하게 한 것이라 마리아와 요셉이(특히 요셉은) 막말로 친부도 아닌 셈인데 이런 계보가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도 든다. "원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에서 잘 나가는 혈통이었음"이란 얘기를 마태복음의 저자가 당대의 유태인들에게 전도용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가 하는 불경스런 생각마저 들게 된다. 솔까말 이스라엘에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다윗왕의 혈통보다 더 존귀한 혈통이 있었나 싶기도 하다. 다만 또 다른 트친님 말씀처럼 그 계보 중에는 유대 최악의 왕인(우리로 치면 연산군을 능가한다고 한다) 므낫세이라든가 영원히 다윗의 아내가 아닌 우리야의 아내로 기술된 밧세바도 들어 있고, 시아버지랑 동침한 다말, 개보다 못하게 본 이방인 창녀 라합 등 왕의 족보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도 숨기지 않고 넣었으니 역시나 마태복음이 국정^^ 경전이 아니라 저자가 자유롭게 쓰고 당대에 널리 읽힌 베스트셀러가 된 덕분에 신약성경의 복음서의 반열에 올랐나 싶은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구약의 선지자가 메시아가 오면 어떻게 된다더라 하는 얘기를(복음서들이 어느 정도는 그런 것 같지만) 너무 딱딱 맞게 배열한 느낌이라 관찬사서 내지 "역시나 예정된 일들이 다 이루어졌도다"하는 분위기라 나 같은 비신자로서야 읽으면서도 좀 뜨악한 기분도 들었다. 그리고 시각 자체도 성모 마리아가 어처구니 없게도 처녀로서 애를 밴다는 설정인데도 요셉이 진실한 사람 아니 의로운 사람이라서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한다는 얘기나 하고 있는 것에 반해 누가복음에서는 성모 마리아께서 나름 동병상련 중이신, 세례 요한의 엄마인 엘리사벳을 찾아가 위안도 받고 기운도 내는 이야기들을 배치하고 천사 가브리엘이 수태고지하는 이야기와 마리아가 황당해 하다가(누가 그 상황에서 황당하지 않을 수 있으랴!) 겨우 그 상황을 수락하는 이야기로 이어지니 나름 그나마 개연성이 있게 쓴 것 같다.

이제 예수님 탄생에 직접 관련된 이야기로 좀 더 들어가 보면, 누가복음에서는 요셉과 마리아가 나사렛에서 하필 요셉 조상 다윗 동네인 베들레헴으로 가게 된 이유를, 당시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요새로 치면 인구 센서스를 실시해서 그무렵 팔레스타인 지역이 소속된 로마 속주인 시리아에서도 각 속주민들이 말하자면 원적지로 가서 인구 센서스에 응하게 명령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게 기술했다. 어쩌면 누가복음의 독자로 상정된 로마 고관이 예수님께서 왜 때문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게 되었는지를 납득하게끔 하기 위해 그 부분까지 누가복음의 저자가 신경 써서 기술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마태복음에서는 역시나 당대 유태인들(구약성경은 달달 외우고 있었을 이들)을 독자로 상정해서인지 메시아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기로 예정되어 있었음을 전승과 함께 깨알 지적하기를 잊지 않았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께서 황송하게도 여관도 구하지 못하여 무려 (말)구유에 강보로 싸인 채로 뉘었다는 얘기는 누가복음에만 기술되어 있다. 법적인 아빠의 고향에 나랏님의 지엄한 명령에 따라 아는 친인척도 없는데 임신한 엄마의 뱃속에 온 아기 예수는 해산이 가까워 온 엄마가 몸을 풀 곳도 없어서 강보에 싸인 채로 구유에 누인 것이었다. 정말 "책 읽기는 상황 읽기"인지 중동에서 많은 난민들이 발생하고 특히나 가련한 어린이들의 가슴 아픈 소식들을 올해 뉴스에서 많이 접해서인지 아기 예수도 모든 속주민들은 등록하라는, 황제의 지엄한 명에 따라야만 하는 부모 탓에 아빠의 조상이 살던 곳이라지만 여관에 자리도 못 구하고 구유에서 태어나셨다는 모습이 참 이 분은 나실 때부터 정말 낮은 곳으로 임하신 분이구나 하는 전율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말 성경에는 동방박사라 하고 서양에서는 Three Kings라고 하는 이들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예견하고 찾아 왔다는 기사는 마태복음에만 보이는듯 하다. 소싯적부터 요셉과 마리아가 이들 동방박사로부터 황금과 유약과 몰약을 받았으면, 우선 그걸로 여관방부터 빨리 잡을 것이지 하는 황당한 생각을 했었고, 그런 탄신 축하 선물을 로마제국 당시에도 꽤 발달한 금융업을 생각하면(더군다나 예수님의 법적 부모들은 유태인이 아닌가!) 나름 당시의 유망한 금융상품에 투자라도 해서 학자금이라도 마련할 것이지 하는 불경스러운 생각마저 해보았었다. 하지만 마태복음의 저자로서야 멀리 동방의 왕들도 이스라엘의 왕이 나심을 경배하러 찾아 왔다는 것을 강조하느라 그런 모순에는 미처 신경을 못쓴 것이 아닌가 싶다.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탄생 사실을 알고 멀리서 찾아 온 동방박사들의 이야기 대신에 벌판에서 노숙자처럼 숙식을 하였던 양치기(목자)들이 예수님의 탄생 사실을 먼저 알게끔 기술한 것도 흥미롭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독자인 로마 고관에게 예수님께서는 나실 때부터 유대 민중들의 지지와 기대를 받으신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일까? 성탄절이면 자주 듣게 되는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라는 말이 이 목자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성가족을 제외하고는,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을 누가복음에서 기술한 다음 이어지는 것도 반가웠다.

한편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이 동방박사들은 예수님 탄생을 빛나게 하는 조연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인생 초기의 최대 위기를 초래하는 헤롯왕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때문에 헤롯왕과 예수님 간의 악연과 그 흥미로운 드라마는 누가복음에는 실려 있지 않고 마태복음에서만 전한다. 동방박사가 우리말 성경에서의 박사라기 보다는 서양 성경 원전에서처럼 동방의 왕들이란 점에 더 무게가 실리는 것도 이들이 왕이기에 당연히 헤롯왕의 영접을 받는 것이 의전상 맞았겠구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헤롯왕 역시 로마 제국의 판도에서 왕위를 유지한 정치력을 발휘한 자답게 동방박사들에게 자신도 예수님께 경배하려는 목적이라며 거짓부렁을 치고서 예수님 경배하고 나서 자기한테 들르라는 능구렁이 같은 수법을 사용한다. 다행히 정말 하늘의 가호로 꿈 속에서(!) 지시를 받아 헤롯에게 돌아가지 않고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 목숨을 구한다.

헤롯왕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아기 예수를 없애기 위해 자기가 다스리는 땅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리니 이 또한, 2015년 후인 지금 중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특히나 어린이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고 있는, 바셰르 아사드나 IS 같은 폭정을 행하는 자들에 의한 내란과 학살극을 연상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 할 것이다. 우리로서야 차가운 바닷속에서 아직 시신조차 찾지 못한 꽃다운 청춘들도 떠오르지 않을 수 없고. 그러나 역시 조씨고아 급에 준하는 아기 예수님과 성가족인지라 마태복음은 역시나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 주의 사자가 법적 아빠인 요셉의 꿈에 나타나 이들이 이집트로 야반도주하여 숨어 있었음을 전한다. 이런 고달픈 성가족의 신세 역시 최근 중동에서 세계 각지를 전전하는 난민들의 참혹한 상황과 겹쳐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누가복음이 구유에서 태어나신 아기예수를 그렸다면 마태복음은 이집트로 달아나 가까스로 목숨을 구하신 아기예수를 그렸으니 나중에 인간들의 죄를 다 짊어지고 가신 예수님의 거룩한 삶이 시작부터도 소박하셨음을 알게 되어 다시금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마태복음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헤롯의 아들 아켈라오가 왕위를 이어 받아 여전히 이스라엘의 왕이 될 아기 예수를 탄압할까 두려워 하여 갈릴리의 나사렛이란 동네에 성가족이 정착했음을 기술하는데 이 역시 전승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거듭 강조한다.

마태복음은 여기서 바로 세례 요한이 유대 광야에 나타나고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한테서 세례를 받으시는 공생애 부분으로 넘어가는 반면에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오랜 세월 기다리다가 소원을 성취한, 요새로 치면 아이돌 팬들 같은 분들의 얘기를 집어 넣은 다음에 약간은 밥맛이고 얄미운 똘똘한 열두 살 소년인 예수가 율법 선생들과 토론하는 이야기를 삽입한 것이 이채롭다. 역시나 누가복음의 독자인 로마 고관의 세계에서는 키케로와 같은 변호사들이 맹활약한 걸 염두에 두고 우리 교주님께선 될성 부른 나무 떡잎부터 다르다는 식으로 마케팅 포인트를 강조한 것이 아닌가 싶은 느낌적 느낌이다.

비신자인데다가 성경도 잘 모르며 나불댄 셈인데 예수님의 사랑으로 독자들께서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길. 독자분들 모두 다시 한번 메리 크리스마스!

Caravaggio, Adoration of the Shepherds,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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