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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케팅'과 한국의 노동 관행

한국은 세계에서 근무시간이 가장 긴 나라다. 야근을 스포츠라고 부르는 나라이니만큼 평일 저녁의 공연 관람을 도무지 장담할 수 없다. '나인 투 식스'가 지켜지면 저녁 8시의 공연 관람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못 보거나 저녁을 거르고 헐레벌떡 뛰어오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난 한국의 공연예술 시장이 내실 있게 성장하지 못하는 핵심 이유가 비정상적인 노동 부문에 있다고 본다. 일상의 여유를 없앰으로써 수요를 견인하는 데 강력한 장애요소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 홍형진
  • 입력 2015.12.22 08:49
  • 수정 2016.12.22 14:12
ⓒgettyimagesbank

'취케팅'에 대한 논란이 언론을 통해 간헐적으로 점화되고 있다. '취케팅'은 '취소'와 '티케팅'이 합쳐진 말로 취소되는 표를 구매하는 행위를 말한다. 공연예술의 경우 취케팅 시장의 규모가 1차 예매 시장 규모의 50%에 육박한다고 하는데 이는 분명히 기형적인 숫자다.

취소가 매우 자유롭기 때문이다. 예매한 것을 언제든 취소할 수 있을뿐더러 심지어 취소할 경우에도 위약금이 미미해서 별 부담이 안 된다. 예술의전당 홈페이지에서 예매하는 경우를 예로 들면, 공연 10일 전까지는 위약금이 아예 없고 이후에도 10%만 뗀다. 다른 대중음악 공연 등도 마찬가지다. 하루나 이틀 전에 취소할 경우에도 위약금은 30%가 고작이다.

해외와는 사정이 다르다. 저쪽 동네는 취소를 하기 위해선 일정 수준의 위약금을 물어야 하고 일단 예매했으면 그걸로 끝인 경우도 적지 않다. 본인의 해외여행 시즌에 맞춰 수십만 원짜리 공연을 예매한 사람이 스케줄이 꼬인 후 그걸 국내 중고장터에 내다파는 건 그 때문이다. 거기서 취소를 안 받아주니까.

하지만 그런 허들이 없다시피 한 한국의 예매 시장은 꽤나 비효율적으로 운영된다. 1차 예매 때 우르르 몰려들었다가 이후 첫 번째 취소 시점에, 다시 두 번째 취소 시점에 우르르 몰려든다. 그리고 공연 직전에 또 우르르 몰려든다. 취소 표가 왕창 쏟아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매진은 매진이 아니라 착시다. 거래비용만 착실히 증가할 뿐 실제 거래는 그만큼 이뤄지지 않는다.

한국의 공연예술 수요가 그리 크지 않음을 감안할 때 웃긴 일이다. 사기업은 손익분기점을 맞추는 것조차 버거워하고, 공공예술기관은 세금과 후원에 기생해 근근이 (적자) 운영하는 게 현실이다. 표가 없다고 난리를 떨며 취소 표를 맹렬히 노릴 정도라면 다들 돈을 팡팡 벌고 다른 업체도 속속들이 진입해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착시다. 취소가 자유롭고 금전적인 부담도 없으니 일단 표를 이것저것 사둔 후 실제 볼지 말지는 나중에 결정한다. 아이돌 스타가 출연하는 뮤지컬 등은 관객 한 명이 아예 여러 회차에 걸쳐 표를 사재기한다. 물론 실제로 돈 내고 보는 건 본인의 스케줄이나 캐스팅 취향에 맞는 1~2회가 고작. 나머지는 그냥 취소.

한데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위약금을 인상하거나 취소 조건을 까다롭게 변경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미 관행화된 방식이라서 고객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심리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한국 특유의 노동 관행까지 감안해서 볼 때 '미션 임파서블' 성격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근무시간이 가장 긴 나라다. 야근을 스포츠라고 부르는 나라이니만큼 평일 저녁의 공연 관람을 도무지 장담할 수 없다. '나인 투 식스'가 지켜지면 저녁 8시의 공연 관람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겠지만 현실은 다르다. 못 보거나 저녁을 거르고 헐레벌떡 뛰어오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현황에선 그나마 취소라도 허용돼야 예매를 할 수 있다. 그러면 일단 예매했다가 추후 상황을 보고 관람할지 취소할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 올해 예술의전당이 콘서트홀 공연 시작 시각을 8시에서 7시 반으로 앞당기려고 하다가 빗발친 항의에 결국 백지화한 바 있다. 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난 한국의 공연예술 시장이 내실 있게 성장하지 못하는 핵심 이유가 비정상적인 노동 부문에 있다고 본다. 일상의 여유를 없앰으로써 수요를 견인하는 데 강력한 장애요소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한국 공연예술 시장에서 이는 심각한 대목이다. 수요 확대 없이 어떻게 시장이 제대로 성장하나?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행 예매 및 취소 방식을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 안엔 나름의 순기능이 있고, 만약 그것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현된다면 오히려 시장을 효율화하는 데 기여할지도 모른다. 장애요소를 없애주지는 못해도 조금이나마 낮춰줄 수는 있으니까.

결국 문제는 제도의 허점 안에서 본인의 잇속만 챙기는 얌체족이다. 개인의 관점에서야 합리적인 선택에 해당할지 몰라도 사회의 관점에서 보면 정반대다. 정말 자신이 볼 의향이 있는 공연만 예매하고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 취소하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근래 성행하는 취케팅을 보면 이는 이상적 바람에 지나지 않는 듯하다.

어떻게 메커니즘을 디자인하는 게 최선일까? 실제 관람 의향을 가시적인 '신호(signal)'의 형태로 표출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면 환상적이겠지만 딱히 감이 오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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