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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쌓이는 광장

광화문 광장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면 지금 쌓여가고 있는 세월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단추 두 개 끄르고 여유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도 있지만, 소외된 그늘 속으로 내쳐진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서도 나와 있다. 단식 투쟁을 하는 이들과 저녁에 무슨 맛있는 걸 먹을까 고민하는 이들이 공존하는 곳이다. 외국인들이 사진을 찍고 한복체험을 하고 있는 한 편으로는, 집회를 열고, 서명을 받고, 후원을 요청한다. 이러한 모습들이 어떤 이들의 눈에는 몹시 거슬릴 수도 있고, 때로는 내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목소리들도 당연히 만난다. 하지만 그게 광장이고, 광장은 그래야 한다. 세월이 쌓여가는 이 광장이 피맛골처럼, 청계천처럼, 누군가의 눈에 보기 좋은 것만 남지 않게 되길 바란다.

  • 권성민
  • 입력 2015.12.18 10:21
  • 수정 2016.12.18 14:12

신촌에 산다. 스무 살 대학 때문에 터를 잡고 나서부터 십년째 이 근방만 맴돌고 있다. 관성에 약한 모양이다. 제법 멀리 있는 회사에 입사하고 난 뒤로도 한 시간씩 출근에 쓸지언정 옮길 생각을 못했다. 그러다보니 강 건너 남쪽에는 잘 갈 일이 없다. 약속이 이쪽에 잡히면 괜히 피곤하다. 멀어서 귀찮은 것도 있지만, 강북 사대문 근처가 더 정감이 가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오래 된 도시에는 세월이 쌓인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그 역사만큼이나 곳곳에 사람들이 살아온 흔적이 어려 있는데, 아무래도 도로를 구획지어 만들어낸 강남 일대보다는 사대문 근처에서 이를 찾는 재미가 더 쏠쏠하다. 요즘 같은 때에 수십 년 된 가게들이 곳곳에 버티고 있는 신촌도 신촌이지만, 이런 재미를 가장 풍부하게 누릴 수 있는 곳은 역시 광화문인 것 같다.

대학 진학으로 서울에 올라오면서부터 광화문을 좋아했다. 그때는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책을 하염없이 앉아 읽을 수 있는 교보문고, 영풍문고가 있다는 점이 좋았다. 좋다고 자꾸 찾다 보니 다른 매력들도 보인다. 서울에서도 쉬이 만날 수 없는 비주류 영화 상영관들 하며, 크고 작은 전시관들,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랑하는 고궁과 그 사이사이 한적한 길목들이 걸을수록 살가웠다.

광화문 일대를 걷노라면 이 도시가 가진 세월의 깊이가 느껴진다. 이순신 동상부터 광화문까지의 거리를 일컫는 세종로 양옆으로는 정부종합청사와 미대사관, 경찰청이 들어서 있는데, 이 세종로는 고스란히 궁궐 바로 앞에서 실질적인 조선의 행정실무들이 이루어지던 관공서 6조와 한성부가 있던 육조거리였다. 춘추관과 홍문관을 떠올리게 하는 언론사들이 이곳에 모여 있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한편으로는 왕이 아닌 대통령의 집무실을 보란 듯이 경복궁 등 뒤에 지어놓은 모양새가 우습기도 하다. 이 경복궁을 왼쪽에 끼고 올라가면 북촌 한옥마을이 등장한다. 궁과 육조거리로 출퇴근하던 고위 관료들이 경복궁의 지척에 자리 잡고 살던 집들이다.

세종로를 교차하며 동대문과 서대문을 잇는 종로는, 조선 각지에서 한양을 찾던 이들이 다니던 대로다. 그 시절엔 이 종로가 한양을 가로지르는 지름이었으니 그 위엄을 알만하다. 궁에 들락거리는 고관대작들부터 내로라하는 상인들까지 모두가 이 종로를 걸었는데, 그 옆으로는 '피맛골'이 있었다. '높으신 분들'이 말을 타고 종로를 지나면 길을 가다가도 꼬박꼬박 고개를 숙여야 했던 민초들이, 더러워서 내가 피한다며 말이 다닐 수 없는 좁은 골목을 찾아들어갔던 것이다. 말을 피하는 골목, 피맛골. 지금은 사라지고 옹색한 아케이드 간판만이 그 흔적을 말해준다.

종로를 따라가며 볼 수 있는 커다란 상점들은 그 시절 '시전'의 풍모를 보여준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국가 주도로 시장을 발달시키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궁 바로 앞을 가로지르는 종로에 '시전'을 설치하고는 독과점 운영을 할 수 있는 '금난전권(禁亂廛權)'까지 부여해준다. 이 '시장이 난장판이 되는 것을 금할 수 있는 권리' 덕분에, 조선 각지에서 올라온 수많은 작은 상인들은 종로 대로에서 쫓겨나 뒷골목 청계천 일대에 터를 잡았다. 그래서 그 뒤로 불과 십몇 년 전까지도 청계천 일대는 영세 상인들의 터전이 되어왔다. 수백 년 전에 밀려난 이들이 아직도 구질구질해 보였던 것일까. 지금 그곳에는 못생긴 조형물로부터 시작된 인공하천만이 흐르고 있다.

광화문을 자꾸 찾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거기 광장이 있기 때문이다. 여행을 자주 하면서, 어느 도시를 찾든 광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아졌다. 광장은 여행의 감각을 가장 강하게 일으키는 곳이다. 그곳에는 일상의 감각을 넘어선 풍경들이 있기 마련이다. 여행객들과, 여가를 즐기러 나온 시민들을 구경하는 즐거움도 있는가 하면 지금 이 나라에서는 무엇이 이슈이고 사람들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구나 하는 것도 볼 수 있다. 그건 광화문의 광장도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느낄 수 있는 비일상의 감각은,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한 걸음 물러서서 새롭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광화문으로부터 시작해 종로를 따라 서울 곳곳을 거닐면 오래도록 쌓여온 세월을 볼 수 있고, 광화문 광장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면 지금 쌓여가고 있는 세월을 볼 수 있다. 거기에는 단추 두 개 끄르고 여유를 즐기러 나온 사람들도 있지만, 소외된 그늘 속으로 내쳐진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서도 나와 있다. 단식 투쟁을 하는 이들과 저녁에 무슨 맛있는 걸 먹을까 고민하는 이들이 공존하는 곳이다. 외국인들이 사진을 찍고 한복체험을 하고 있는 한 편으로는, 집회를 열고, 서명을 받고, 후원을 요청한다. 이러한 모습들이 어떤 이들의 눈에는 몹시 거슬릴 수도 있고, 때로는 내 얼굴을 찌푸리게 만드는 목소리들도 당연히 만난다. 하지만 그게 광장이고, 광장은 그래야 한다. 세월이 쌓여가는 이 광장이 피맛골처럼, 청계천처럼, 누군가의 눈에 보기 좋은 것만 남지 않게 되길 바란다.

11월 23일 '사랑의 온도탑' 제막 행사가 열린 광화문광장 앞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 이 글은 피디저널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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