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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히어로의 시대 | 배트걸을 주목하라. 2편

《배트걸》 시리즈는 '능욕의 악몽'을 추억(?)하려는 시도를 하며 또 한 번 비난의 대상이 된다. 《배트걸》 41호에서 작가 하파엘 아우부케르키가 『배트맨: 킬링 조크』를 오마쥬해 그린 표지가 문제가 된 것이다. 이 표지에서 배트걸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조커의 손에 붙들려 있고, 조커는 그녀의 겁에 질린 얼굴에 손가락을 대고 있다. 소녀 감성을 표방한 새 배트걸 시리즈에 과거 『킬링 조크』에서 바버라가 조커에게 봉변을 당했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 이규원
  • 입력 2015.12.14 12:49
  • 수정 2016.12.14 14:12

[배트맨 데이 기념 특별 연재 12] 여성 히어로의 시대

─ 배트걸을 주목하라. 2편

11회 연재글에서는 DC의 인가를 받은 티셔츠에 여성을 남성의 부속품으로 보는 시선이 담겨 있던 한 사례, 남성 히어로를 성장시키기 위해 여성 주인공을 잔혹한 범죄의 피해자로 만든 경우들을 살펴보았다. 배트맨과 DC 유니버스를 대표하는 여성 히어로인 배트걸 역시 그 탄생부터 꾸준히 이런 수단으로 이용되는 한계가 있었고, 그런 가운데에도 자신의 역할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던 역사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배트우먼과 할리퀸에 대한 그들의 시선

DC 코믹스가 여성 주인공에게 보인 태도가 구설에 올랐던 것은 비단 배트걸만이 아니었다. 물론 작품을 전체적으로 보면 분명히 예전과는 다른 참신한 시도, 새로운 관점, 여성 독자의 감성에 접근하고 다가가려는 노력이 보이는 부분들이 있지만, 군데군데 나타나는 실수가 오히려 문제점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한 예로 DC가 2013년 지미 팔미오티와 아만다 코너를 작가진으로 새 《할리퀸》 시리즈를 발표했을 때 팬들은 열광했다. 두 작가는 부부 사이였고, 그렇기에 캐릭터를 다룰 때 다른 사람들과는 차별되는 특별한 시선을 보여 주리라 기대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DC가 같은 해 '할리퀸 아트 콘테스트'라는 이벤트를 열면서 일어난다. 《할리퀸》 0호에 어울리는 재능 있는 새 작가를 찾기 위해 제시된 4컷의 과제 중, '할리퀸이 토스터, 드라이어, 믹서기 등의 전자 제품을 천장에 매달고 그 아래 욕조에 알몸으로 누워서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이 있었다.

어째서 그녀가 알몸으로 자살하여야 하는가? 많은 작가들의 항의성 그림을 이끌어 낸 DC의 엉뚱한 콘테스트.

(왼쪽: 데비앙아트에 올라온 응모작, ©2013-2015 dtor91 / 오른쪽: 만화 뉴스 사이트에 게시된 항의성 그림.)

팬들은 할리퀸이 아무리 유머러스한 악당이라 할지라도 여성을 그렇게 그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작가와 팬들은 할리퀸 대신에 배트맨과 나이트윙, 로빈을 욕조에 집어던지는 그림을 그려 DC의 엉뚱한 콘테스트에 항의했다. DC 발행인과 작가진이 나서 해명과 사과를 하고서도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배트우먼》 시리즈 역시 논란의 대상이었다. 배트우먼은 '자신에게 떳떳하기 위해' 커밍아웃을 한 결과 사관학교에서 퇴학당하고, 한때 르네 몬토야와 연인 관계이기도 했던 DC 코믹스의 대표적인 여성 동성애자 히어로다. 그런데 이 시리즈의 성공을 이끌었던 작가들이 갑작스럽게 하차 선언을 하는 일이 벌어진다. 당시에 배트우먼은 동성 애인에게 프러포즈를 하면서 결혼을 향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었는데, DC 편집부가 그들의 동성 결혼을 허용할 수 없다고 버틴 결과였다.

뉴52 리런칭 이후에 여성 캐릭터의 묘사를 둘러싸고 이런 논란들이 벌어지는 가운데, 《배트걸》 역시도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다시 논란에 휩싸이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지난 포스트에서 정리했듯이 배트걸에게 주어진 과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 배트맨 시리즈에서 남성 캐릭터의 짝으로 태어난 태생적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배트우먼처럼 남성을 짝으로 택하지 않는 선택을 할 것인가, 아니면 남녀 성 역할에 대한 관점을 넓힐 것인가 하는 부분이었다. 또 하나는 배트맨을 돋보이게 하려 이용되었던, 남성 히어로와 달리 상처와 트라우마를 평생 안고 가도록 그려졌던 부분이었다. 아래는 배트걸이 일어설 수 있도록 응원하는 작가와 팬들이 보여준 응원의 노력, 그리고 DC의 과제에 대한 내용이다.

일어나라! 바버라 고든

2011년 DC가 뉴52 리런칭을 단행하면서 《배트걸》 시리즈는 게일 시몬에게 맡겨진다. 게일은 11회 연재글에서 소개했던, '냉장고 속의 여성들'을 정리하는 웹사이트를 만든 바로 그 작가이다. 게일이 보기에 배트걸은 남성 캐릭터와 비교했을 때 여전히 약한 존재로 그려지는 부분이 있었다. 보통 『배트맨: 나이트폴』은 배트맨이 베인에게 허리가 부러지는 이야기, 『배트맨: 패밀리의 죽음』은 로빈(제이슨 토드)이 조커의 손에 살해당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지만, 지금은 배트맨도 로빈도 그런 고통을 다 극복하고 히어로로서 한 차원 성장했다. 그러나 바버라만은 조커에게 총을 맞고 수치를 당했던 기억이 치유되지 않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래서 게일은 '오라클'을 다시 걷게 하고 그녀에게 배트걸 코스튬을 돌려주었다.

게일 시몬의 배트걸 스토리에서 주목을 받은 또 하나는 바버라의 절친으로 등장한 알리시아라는 싱가포르계 여성이었다. 어느 날 바버라와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으면서 바버라는 자신이 배트걸이라는 사실을, 알리시아는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털어놓는데, 그 말을 들은 바버라의 대답이 걸작이다. 잠시 말이 없던 바버라는 "뱁스야."라고 답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를 뱁스라고 불러." 알리시아는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에 조금도 놀라거나 이상한 표정을 짓지 않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해 주는 바버라를 보며 눈물을 흘린다. 이분법으로 성을 구분하는 사회의 선을 넘은 사람 앞에서 놀라기보다는 비밀을 안은 채 마음고생을 겪었을 그녀의 영혼을 먼저 위로하는, 이전과는 다른 세심한 감성으로 독자층을 자극했다. 그래서 런칭 초기만 해도 큰 기대를 받지 않던 《배트걸》 시리즈는 점차 DC의 베스트셀러 타이틀 중 하나로 부상한다. 2015년 현재 통계상으로 여성 독자가 미국 만화 독자층의 40퍼센트 이상인 이 시점에서, 게일 시몬이 확립한 DC의 《배트걸》은 마블의 《미즈 마블》, 《캡틴 마블》 등과 함께 여성 독자를 대변하는 만화로서 그 위상이 과거의 어떤 여성 히어로 만화보다 크다고 볼 수 있다.

DC의 첫 번째 트랜스젠터 캐릭터, 알리시아 예오.

(이미지 출처: http://www.huffingtonpost.com/2013/04/11/dc-comics-transgender-batgirl_n_3061268.html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연이은 사과문

문제는 이후에 게일 시몬이 편집부와의 의견 차이로 하차하고, 《배트걸》 시리즈가 전체적으로 밝은 분위기로 톤을 바꾸면서 벌어졌다. 참신한 시도라는 호평을 받기도 했지만, 새로이 바뀐 《배트걸》 시리즈는 수년간 배트걸이 극복의 과정을 겪었던 가장 큰 두 가지 아픔, 여성와 남성의 역할을 한정 짓는 부분과 '냉장고 속의 여성'으로 취급받아야 했던 그녀의 과거를 들추며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된다.

성 역할의 구분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포용했던 절친 알리시아의 비중은 대폭 줄어들었다. 또 (뉴52) 《배트맨》 37호에서는 대거 타이프라는 이름의 남성 예술가가 배트걸 코스튬을 입고 흉내를 내다가 큰 망신을 당하는데, 다른 사람이 자기 흉내를 내는 것에 대한 불쾌함보다 남성이 자신의 흉내를 내는 것이 불쾌하다는 듯한 배트걸의 반응은 알리시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태도와는 전혀 달라 팬들을 당혹하게 했다. 남성 히어로의 여성 짝으로 탄생한 배트걸이 사람을 성 역할로 구분하는 시각을 뛰어넘게 만듦으로서 독립하게 했던 게일 시몬의 노력을 원점으로 되돌린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결국 작가들이 직접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된다.

그런데 불과 4이슈 뒤 《배트걸》 시리즈는 '능욕의 악몽'을 추억(?)하려는 시도를 하며 또 한 번 비난의 대상이 된다. 《배트걸》 41호에서 작가 하파엘 아우부케르키가 『배트맨: 킬링 조크』를 오마쥬해 그린 표지가 문제가 된 것이다. 이 표지에서 배트걸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조커의 손에 붙들려 있고, 조커는 그녀의 겁에 질린 얼굴에 손가락을 대고 있다. 소녀 감성을 표방한 새 배트걸 시리즈에 과거 『킬링 조크』에서 바버라가 조커에게 봉변을 당했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밝아진 분위기와도 맞지 않을뿐더러, 게일 시몬이 바버라가 조커의 트라우마를 완전히 극복했다는 의미로 코스튬을 돌려줬음에도 다시 『킬링 조크』를 기념(?)한다는 이유로 그 공포스러운 장면을 오마쥬(?)했다는 점이 팬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킬링 조크』는 배트맨의 걸작으로 기념될지는 몰라도 배트걸의 걸작은 아닌데, 코스튬을 되찾고 트라우마를 극복한 바버라를 다시 배트맨의 부속품으로, 냉장고 속의 여성으로 돌려 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에도 작가와 DC 편집부가 사과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조커 탄생 75주년을 기념하려던 DC의 빗나간 의욕? 그림에 녹아들어 있는 폭력적 요소 때문에 많은 만화팬의 항의를 받고 취소된 《배트걸》 41호 배리언트 커버.

(이미지 출처: http://dc.wikia.com/wiki/Batgirl_Vol_4_41?file=Batgirl_Vol_4_41_Joker_Variant_Solicit.jpg / TM &Copyright © DC Comics, Inc. ALL RIGHTS RESERVED.)

여성 히어로 전성시대

바햐흐로 여성 히어로 전성시대다. 마블의 「제시카 존스」, DC의 「슈퍼걸」 등 여성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는 물론 「원더 우먼」, 「캡틴 마블」 등 DC와 마블을 대표하는 여성 슈퍼 히어로의 영화화도 진행 중이다. 여성 히어로 만화는 작품성 면에서도 호평을 받으며 인기를 얻었다. 다양화된 세상을 반영하듯이 더 다양한 인종, 성별과 연령의 히어로가 등장하고 있다. 찢어진 눈의 무술가가 고작이던 동양계 캐릭터는, 이제 한국계 '아마데우스 조'가 마블 최고의 천재로 등장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감마 폭탄의 발명가인 과학자 브루스 배너의 '헐크'를 물려받은 상황이다. 엑스맨의 원년 멤버 중 하나인 아이스맨이 커밍아웃을 하자 원작자 스탠 리는 "아이스맨이 동성애자였다구요? 몰랐네요! 어쨌든 좋은 이야기만 나온다면 나는 괜찮습니다!"라면서 즐거워했다. 그동안 특정한 계층과 인종을 대상으로 했던 히어로 만화는, 이제 전 세계적인 팬의 관심과 호응을 받으면서 그만큼 모든 사람의 입장과 마음을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그러므로 어느새 독자의 절반이 여성인 이 시대에 DC가 대표 여성 히어로로서 원더우먼이나 슈퍼걸 이상의 위상을 갖고 있는 배트걸을 어떤 식으로 다루어 나갈지, 작가진과의 견해차를 어떻게 조율할지, 여성의 시선과 입장을 어느 정도로 잘 담아낼지 하는 부분은 앞으로도 주목할 점이다. (파키스탄계 10대 무슬림 여성이 주인공인) 《미즈 마블》로 성별과 인종과 종교의 벽을 뛰어넘는 시도를 보이며 많은 칭찬을 받는 마블과 비교해 DC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이런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점쳐지는 미국의 정치 지형으로 이 상황을 설명하려는 시도도 있지만, 여성 히어로의 전성시대는 오히려 이들이 더 색다르면서도 보편적인 재미를 줄 수 있어서가 아닐까? 2015년 10월부터 방영을 시작한 드라마 「슈퍼걸」 예고편.

(동영상 출처: https://youtu.be/Mh8MYFadTmQ)

* 이 연재는 세미콜론과 공동으로 기획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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