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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년 만에 돌아온 이한열의 성적표(사진)

  • 강병진
  • 입력 2015.12.13 17:27
  • 수정 2015.12.13 17:28

연세대생 이한열이 전두환 정권 반대 시위에서 경찰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1987년 6월. 당시 월간지 신동아 기자였던 윤재걸(68)씨는 이한열에 관한 인물 기사를 쓰려고 광주에 있는 이한열의 친가로 향했다.

윤씨가 도착했을 때는 사건이 발생한 지 이미 이삼일이 지난 뒤였다. 집에는 발 빠른 일간지 기자들이 몰려들어 기삿거리가 되는 물건들을 다 챙기고 나가 아무것도 건질 것이 없었다. 이한열의 큰어머니와 고모가 황망한 모습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지금이라면 당장 절도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갈 일이지만, 당시에는 기자들이 사건 당사자의 집에서 사진이나 문서 등 관련 물건을 가져 나오는 일이 흔했다.

윤씨가 조심스럽게 자기소개를 하고 취재에 참고할 만한 것들이 없는지 물었다. 그러자 이들은 "모르겠소. 있는지 들어가서 찾아보시오"라고 힘없이 답했다.

이한열의 연세대 재학 시절과 관련한 물품은 일간지 기자들이 다 가져가 버려 남은 게 없었다. 대신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성적표와 사진 몇 장 정도가 남아 있었다. 윤씨는 그 자료라도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갈무리해 나왔다.

이후 그는 이한열의 집에서 가져온 자료를 지니고 있으면서 늘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과거 학생운동 '동지'였던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최근 만난 일을 계기로 자료를 기념사업회에 넘겼다.

윤씨가 기념사업회에 건넨 자료는 이한열의 학창시절 성적표 7점을 비롯해 가족·친구와 찍은 사진, 당시 학생 운동권 유인물 등이다.

이한열의 초등학교 2학년 성적표에는 '항상 똑똑하게 발표하며 성적도 우수하고 사고력도 뛰어나 판단력도 좋다'는 교사의 평가가 적혀 있다. 5학년 때는 '학습 태도가 바람직하고 친구들과 잘 어울립니다. 칭찬해 주십시오'라는 의견이 달렸다.

과목별 성적은 거의 '수'였고, 중학교 2학년 때는 모든 과목에서 '수'를 받았다. 생활습관, 근면성, 책임감, 사회성 등을 평가한 항목에서도 대부분 최고 등급을 받는 등 착실한 학생이었음이 엿보인다.

성적통지표를 보고 부모가 회신한 글에는 '예습과 복습을 많이 출제해 가정학습을 많이 하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기념사업회는 윤씨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존처리해 내년 6월 서울 마포구에 있는 이한열기념관에 전시할 계획이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지금까지 기자가 당시 가져간 이한열 관련 자료를 돌려받았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며 "지금까지 유족에게서 말로밖에 전해 들을 수 없었던 이한열의 어린 시절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라고 말했다.

윤씨는 13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그때는 기자들이 기사를 쓰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나로서는 늘 부채의식이 있었다"며 "기자이던 나조차 고마움을 느끼게 한 후배 이한열의 유품을 지금에라도 돌려주게 돼 홀가분하다"고 말했다.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씨는 "28년 동안 한열이의 물건을 버리지 않고 잘 보관해준 것도 고마운데 이제라도 돌려줬다니 정말 고맙고 다행"이라고 말했다고 기념사업회는 전했다.

연세대 67학번인 윤씨는 1969년 3선 개헌 반대 운동을 주도하는 등 이한열의 학생운동 '선배'이기도 했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동아일보에서 해직당하고서 1984년 신동아로 복직했다.

이후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에 참여했고, 여러 매체에서 편집국장과 논설주간 등을 역임하다 2008년 전남 해남으로 내려가 시를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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