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짙푸른 바다 위, 사라진 인권

21세기에 벌어졌다고는 믿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원양어선에 탑승했던 수많은 동남아시아계 노동자들에게 에릴의 이야기는 그리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브로커들은 우리를 '축구공'이라 불렀습니다. 자기들 발 밑에 두고 어디든 찰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12월 10일은 유엔에서 지정한 "세계인권선언의 날"이었습니다. 이날 인류는 국가간 존재하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차이를 떠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하는 기본적 자유와 침해받지 않아야 하는 보편적 권리에 대한 믿음을 확인합니다.

지난 수십년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지구상 곳곳에서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억압과 차별, 그리고 끔찍한 폭력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린피스는 그 중에서도 망망대해에서 고통 받고 있는 어부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드리고자 합니다.

누가 평범한 필리핀 청년을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지난 9월 뉴욕타임즈에는 필리핀 청년 에릴 안드레이드(30)의 이야기가 소개되었습니다. 그는 빗물이 새는 어머니 집 천장 수리비를 벌 수 있을 거라는 부푼 꿈을 안고 원양어선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7개월 후인 2011년 2월, 집으로 돌아온 에릴의 시신은 딱딱하게 냉동된 채 나무상자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온몸은 멍과 베인 상처로 가득했고 한쪽 눈과 췌장이 없어진 상태였습니다.

에릴은 대학에서 범죄학을 전공했던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신체 조건 때문에 경찰이라는 꿈은 포기해야 했지만, 그는 바다가 또 다른 기회를 열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원양어선에 사람을 알선해주는 불법 중개업자는 필리핀 대졸자의 평균 임금을 훌쩍 넘는 턱없이 부풀려진 조건을 약속했고, 에릴은 몇년만 고생하면 더 나은 삶을 찾을 수 있을거라 믿으며 고향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싱가폴에 도착한 에릴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비참한 감금생활이었습니다. 그는 허름한 방에 갇혔고, 에릴을 감시했던 사람들은 바다에서 일하고 싶다면 자신의 성노리개가 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암본 항구에 마련된 임시 쉼터에서 쉬고 있는 미얀마 어부들. 인신매매로 끌려온 이들 노동자들에게는 불확실한 미래가.>

바다 위 참혹한 인권 현실

21세기에 벌어졌다고는 믿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원양어선에 탑승했던 수많은 동남아시아계 노동자들에게 에릴의 이야기는 그리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팔 다리가 부러질 때까지 맞았습니다."

"10년동안 단 한푼도 받지 못하고 일 했습니다...그들은 계속 저를 학대했어요... 잠조차도 충분히 잘 수 없었습니다."

"브로커들은 우리를 '축구공'이라 불렀습니다. 자기들 발 밑에 두고 어디든 찰 수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오갈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냉동선이 출항하기 4~5일 전 배에 남아있던 여섯명의 친구와 저는 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했습니다. 두들겨 맞은 후 먹는 것도 금지당했습니다."

"우리는 방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해 두들겨 맞았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맞았습니다. 그걸 보니 달아날 엄두가 나질 않았습니다. 13명 중 그 사람이 본보기로 다리가 부러지는 폭력을 당한 겁니다."

- 인신매매 및 강제노동 피해 선원 인터뷰 중(인도네시아 암본, 2015년 10월)

세계인권선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1조.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인간은 천부적으로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으며 서로 형제애의 정신으로 행동하여야 한다.

제3조. 모든 사람은 생명과 신체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제4조. 어느 누구도 노예상태 또는 예속상태에 놓여지지 아니한다. 모든 형태의 노예제도와 노예매매는 금지된다.

제5조. 어느 누구도 고문, 또는 잔혹하거나 비인도적이거나 굴욕적인 처우 또는 형벌을 받지 아니한다.

...

*세계인권선언 전문은 유엔인권사무소의 웹페이지에서 자세히 보실 수 있습니다.

바다 위 현실과 세계인권선언이 이렇게 극명히 대비되는 현실의 뒤에는 수산업계의 탐욕이 자리합니다. 그린피스는 선원 인권 유린과 해양 환경 파괴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현실을 지속적으로 소개드릴 예정입니다.

연말을 맞아 따뜻한 말과 마음을 나누는 밥상 위, 해산물 요리를 보신다면, 한 번쯤 생각해주세요. '이 해산물에 누군가의 피와 눈물이 담겨 있지는 않을지', '누군가 부당한 대우와 매질을 견디고 지친 몸으로 잡아올린 해산물이 여기 내 식탁 위에 올라온 것은 아닐지'를요.

글:

경규림 / 그린피스 서울사무소 선임 커뮤니케이션 담당자,

김지우 / 그린피스 서울사무소 해양보호 캠페이너

* 이 글은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의 날을 맞아 시작된 스토리펀딩 "참치뿐일까요?"에 연재된 내용 중 일부를 축약한 내용입니다.

▶ 스토리펀딩 '참치뿐일까요?"를 통해 자세히 보기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