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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번 맞선 본 남자의 결혼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30대에 막 들어선 90년대 중반이다. 그는 회원의 친구였는데, 당시 대기업에 근무하던 그에게서는 얼굴에서 광채가 날 정도로 외모가 훤칠했고, 세련된 스타일과 매너를 갖춘, 한마디로 킹카 중의 킹카였다. 몇 명의 여성을 소개했고, 여성들에게는 호감을 얻었는데, 그는 다 거절했다. 그가 허황되게 눈이 높은 게 아니라 내가 보기에도 잘난 사람이었고, 솔직히 말하면 당시 나의 내공으로는 그의 상대를 찾기가 힘들었다.

  • Woongjin Lee
  • 입력 2015.12.11 08:57
  • 수정 2016.12.11 14:12
ⓒgettyimagesbank

맞선계 전설적인 인물 한 명이 얼마 전 결혼했다. 40대 후반이다. 결혼신고를 해서 호적등본에는 분명 유부남인데, 그가 결혼식을 한 장소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호텔, 교회, 성당, 하다 못해 동네 예식장에 이르기까지 그 어디에도 그가 결혼식을 했다는 흔적은 없는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혼인신고만 했기 때문이다.

맞선을 600번 이상 봤을 정도로 한때 잘 나가서 '연애의 황태자', '미팅의 신'이라고까지 불리던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가 결혼식을 생략하는 현실적인 선택을 한 과정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그의 지난 세월을 추적해본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30대에 막 들어선 90년대 중반이다. 그는 회원의 친구였는데, 당시 대기업에 근무하던 그에게서는 얼굴에서 광채가 날 정도로 외모가 훤칠했고, 세련된 스타일과 매너를 갖춘, 한마디로 킹카 중의 킹카였다.

킹카중의 킹카, 여성을 소개하기 벅찰 정도

몇 명의 여성을 소개했고, 여성들에게는 호감을 얻었는데, 그는 다 거절했다. 그가 허황되게 눈이 높은 게 아니라 내가 보기에도 잘난 사람이었고, 솔직히 말하면 당시 나의 내공으로는 그의 상대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그와의 연락이 끊겼다.

그리고 2-3년이 흘렀다. 내가 기획한 등산미팅이 회원들의 호응을 얻어 꾸준히 진행되고 있던 즈음이었다. 주말 도봉산 등산 미팅이 있던 날인데, 거기에 그가 참가한 것이다. 내가 산행을 이끌면서 계곡에서 자기 소개하고, 짝을 이뤄 등산을 하고, 하산하면서 마음의 결정을 하는 방식으로 미팅이 진행됐다.

하산해서 마음에 드는 이성을 3명 적어내면 서로를 선택한 남녀가 커플이 되는데, 그날 참가한 11명의 여성이 모두 그를 1순위로 적어냈다. 말이 되는 것이, 그는 2~3년 전보다 훨씬 더 멋있어졌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는데 자신감이 넘치고 연륜이 쌓여 원숙미까지 느껴졌다. 그의 친구인 회원으로부터 사업도 잘되고 연애계에서도 잘나간다는 얘기를 들은 차였다.

그날 그는 묘하게 내 자존심을 긁는 얘기를 했다. 나의 자격지심인지는 몰라도.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주세요. 꼭 한 번은요." 여전히 그를 만족시키는 여성을 찾기 힘들었고, 내가 아직은 '하수'임을 다시 한번 인정해야 했다. 이때를 계기로 그와 친해지게 되었는데, 그의 친구인 회원과 함께 사석에서 그를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한번은 커피숍에서 만났는데, 저쪽에 한때 만났던 여자가 있다면서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그를 따라 규모가 큰 주점에 갔는데, 거기에도 아는 여자가 있었다. 그 때 벌써 400명 이상 만난 것 같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주위에 아는 여자들 넘쳐

그러다가 다시 그와 연락이 끊겼다. 그리고 10여년 만에 그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홈페이지에 회원 등록을 하고 가입한 상태였다. 그의 이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그 정도의 조건이라면 마음만 먹으면 결혼을 10번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재혼인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40대 후반이 된 그는 젊은 시절의 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 나이의 남자들이 살이 찌고 배도 나오고, 그런 것에 비해 그는 여전히 보기 좋을 정도로 나이가 들었고, 당당했다. 하지만 세월은 이길 수 없었던지 흰머리가 듬성듬성 보였다. 호감은 줄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최고의 남자는 아니었다. 아니 왠지 궁색해 보였다. 이제는 내 안목이 높아진 걸까.

몇 번의 미팅주선 결과는 좋은 편이었는데, 문제는 그의 상황이었다. 얘기를 듣자니 여성을 만나는데, 애프터를 안하고, 차만 마시고 헤어진다는 것이었다.

이런 것은 경제력이 없는 남성들이 데이트할 때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예를 들어 한자리에 오래 앉아 있거나 확실하지 않으면 2차까지 안 간다거나, 혹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닌 모호한 태도를 보인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그는 이런 모습을 다 보여주었고, 나는 직감적으로 그에게 경제적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와 술잔을 기울일 기회가 있었다. 그 동안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부모님께서 돌아가시고, 집 2채 정도의 재산을 물려받았다고 한다. 600명 정도의 여성을 만났고, 연애하느라 사업을 등한시하면서 조금씩 형편이 기울었고, 결국 현재 전세로 살던 오피스텔 하나 정도가 남았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시간과 돈, 청춘과 열정을 다했음에도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돌아보니 그 동안 만났던 여성들이 아깝고, 이제 어떤 여성을 만나고 감동을 못 느낀다고 한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무도 없고, 손에 쥔 돈도 없고, 뼈아픈 현실이 떡 버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만나는 여성의 수준도 점점 떨어지더군요. 그럴수록 본전 생각이 나서 억울하고." 한참을 그의 하소연을 듣던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게 분명 당신의 현실인데도 당신은 또다시 습관적으로 누군가를 만날 겁니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없습니다. 당신에게 필요한 사람은 같이 맞벌이할 수 있는 직업이 좋은 여성입니다. 그리고 돈이 없는 상황을 고려해서 결혼식은 최소한으로 해야 합니다."

600명이나 만난 남자의 실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만난 지 얼마 안되어 여성의 호감을 얻었고, 어떻게 설득했는지 결혼식을 생략하자는 그의 말까지도 순순히 받아들이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화려한 시절 잊지 못하는 그, 많은 여자와의 경험이 오히려 독이 돼

나이는 많고, 돈은 없는데, 화려한 시절을 잊지 못하고, 자존심은 세다. 그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성을 많이 만난 대다수 노총각들의 현실이기도 하다.

"난 미팅할 때 늘 킹카였다. 하지만 폭탄이었던 친구들은 다 결혼해서 잘사는데 나에게 남은 건 없다. 이제 내가 폭탄이 되었다. 킹카, 인기, 이런 것은 다 허울이었다.

많은 여자와의 만남이 경험으로 쌓인 게 아니라 오히려 독이 되었다. 이성을 만날 때의 감동, 열정, 에너지는 무한정 나오는 게 아니었다. 많은 여자를 만나면서 다 써버려서 정작 소중한 단 한 사람을 만난 지금, 열정과 힘이 없다. 난 연애하느라 너무 많은 것을 낭비했다."

그의 독백은 헛된 이상을 안은 채 미팅횟수만 채우면서 헤맸던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이기도 하고,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세상 많은 노총각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기도 하다.

'인생에는 특히 이성을 만나는 데 있어서는 딱 쓸 만큼의 시간과 열정, 사랑이 주어진다. 그것을 한꺼번에 쓰느냐, 인생의 단계 단계별로 적당히 쓰느냐는 개인의 선택이다. 나는 미리 한꺼번에 갖다 쓴 것이다.'

그래도 그는 그나마 다행이다. 마지막에 결단을 내리고, 결혼을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이 순간에도 결단 내리는 시기를 저울질하는 남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그에 대한 기억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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