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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크백 마운틴' 10주년 : 비하인드 스토리들

  • 김도훈
  • 입력 2015.12.10 12:54
  • 수정 2015.12.10 14:11

1997년 가을 밤, 다이애나 오사나는 뉴요커에서 애니 프루가 쓴 단편 소설을 우연히 발견했다.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 그 소설은 두 남성 카우보이의 러브 어페어를 담고 있었다. 와이오밍의 가상의 산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양을 돌보다 만난 에니스 델 마와 잭 트위스트의 이야기였다. 양 돌보기는 끝이 나고, 그 둘은 각자 따로 결혼해서 아이도 갖지만, 그들은 그 뒤로 잭이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열정적인 사랑을 지속한다. 두 사람은 내내 그들 주위의, 가끔은 그들 안의 동성애 혐오증을 두려워 한다.

이 이야기는 오사나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읽어 본 오사나는 자신의 창작 파트너 래리 맥머티에게도 읽어보게 했다. 맥머티는 단편 소설은 쓸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읽는 데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이 이야기를 읽어봐야 한다고 그를 설득하는데 5분 정도 걸렸다.” 오사나가 허핑턴 포스트에 말했다. 그러나 결국 맥머티는 위층에 올라가 앉아서 읽기 시작했다. 20분쯤 후에 그는 조용히 다시 내려왔다.

“반 정도만 읽었는데도 이미 걸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가끔 이게 내가 쓴 글이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글을 읽을 때가 있는데, 나는 ‘브로크백’이 그랬다.” 맥머티의 말이다.

그들은 거의 즉시 이 이야기에 기반한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로 결정하고 프루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사나는 그 편지가 ‘팬 레터’였다고 한다. 약 일주일 후 대답이 왔다. 프루는 이 이야기가 어떻게 장편 영화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허락하겠다고 했다.

이 단편을 시나리오로 옮기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영화의 뼈대는 이미 있었지만, 오사나와 맥머티는 에니스와 잭의 가정 생활, 특히 아내 알마와 루린과의 관계를 넣고 싶었다.

“나는 읽으며 의문이 떠올랐다. 아내들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궁금했다. 아이들에겐 어떤 영향이 있었을지 궁금했다. 이것이 다른 가족들을, 모든 사람들을 어떻게 억눌렀을까. 이런 종류의 동성애 혐오증은 두 남성만의 일이 아니다. 파급 효과가 있고, 그걸 다루려는 시도는 흥미로웠다.” 오사나의 말이다.

완성된 시나리오는 업계에서 찬사를 받았지만, 영화를 만드는 것은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거스 반 산트가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제이크 질렌할은 이안 감독이 참여하기 몇 년 전에 다른 감독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우리가 시나리오를 쓰기로 했을 때부터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어려웠다. 쉬운 게 하나도 없었다.” 오사나의 말이다.

후에 포커스 피처스의 일부가 된 굿머신 제작사의 공동 설립자 제임스 샤머스가 2001년에 제작권을 샀다. “이게 이렇게 되기 전에는 사실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솔직히 조금은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다. 게이 카우보이 영화라니.” 샤머스가 허핑턴 포스트에 말했다.

오사나는 샤머스에게 이안에게 시나리오를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샤머스는 이안과 ‘와호장룡’을 함께 작업한 바 있었다. 샤머스와 이안은 모두 마음에 들어 했지만 – 이안은 허핑턴 포스트에게 단편을 처음 읽고 울었다고 말했다 – 그들은 ‘헐크’를 만들기로 했다. 이안이 연출하고 샤머스는 시나리오와 프로듀스를 도왔다.

‘헐크’를 만들고, 팔고, 홍보하는 몇 년에 걸친 과정 – 그리고 그전의 ‘와호장룡’ – 으로 이안은 무척 지쳤다. 너무나 지쳐 은퇴를 생각했을 정도였다. “솔직히 이안은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샤머스의 말이다. 그러나 리는 분노에 대한 영화 ‘헐크’가 자신의 마지막 작품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브로크백 마운틴’을 다시 떠올렸다.

“난 누가 벌써 만들었을 줄 알았다. 어느 날 제임스 [샤머스]에게 ‘그 영화는 어떻게 나왔어?’라고 물었더니 ‘아니, 그거 아직 안 만들었어.’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난 ‘호오…’라고 했다.” 이안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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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밍이 좋았다. 리버 로드와 포커스 피처스가 가담했고, 이안도 계약했다. 영화 작업이 시작되자 이안은 상당히 빨리 캐스팅을 마쳤다고 캐스팅 디렉터 에이비 카우프만은 말한다. 그러나 가장 큰 우려 중 하나는 늘 금욕적 캐릭터 에니스를 연기할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배우들은 출연하기로 했다가 한두 달 뒤에 취소하곤 했다.

2003년에 오사나와 맥머티는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배우 히스 레저가 연기하면 좋겠다고 결정했다. 오사나의 딸 사라가 레저를 어머니에게 추천해서, 두 사람은 주말에 마라톤 영화 시청을 했다.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를 봤을 때부터 이 젊은이는 자기 출연작을 훨씬 능가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게 내겐 뚜렷이 보였다. 그의 눈 뒤에는 뭔가 아주 강렬한 것이 있었다.” 오사나의 말이다.

오사나와 맥머티는 각각 프로듀서, 제작자가 되었다. 그들은 레저를 추천했지만 사람들이 곧바로 설득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제작사는 그가 마초스러움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오사나의 말이다. “제작사란 묘하다.” 맥머티가 덧붙였다.

캐스팅 디렉터 카우프만은 레저에게 시나리오를 전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오사나는 ‘그림 형제’에서 레저와 함께 작업하는 사람을 알고 있었다. 그 친구를 통해 장면 몇 개를 보여줄 수 있었다. 레저는 시나리오에 대해 더 알려달라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다른 배우가 캐스팅된 뒤였다.

“나는 [레저에게] ‘저기, 다른 사람이 하기로 했지만 체념하지 마. 이 배우도 발을 뺄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들어.’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12월 초가 되니 제작사에서 그 배우가 취소했다는 전화가 왔다.” 오사나의 말이다.

레저는 시나리오를 마음에 들어 했고, 당시의 여자 친구 나오미 와츠가 침대에서 껑충껑충 뛰며 이 영화를 하라고 애걸했다는 말을 오사나에게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안은 사실 질렌할과 먼저 만났다.

“그[질렌할]는 단편 소설이 묘사하는 캐릭터와는 상당히 달랐지만, 나는 그가 훌륭한 로맨틱 영화 주연감이라고 생각했다.” 이안의 말이다. 마침내 이안이 질렌할과 레저가 같은 방에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주연 배우들을 찾았음을 깨달았다.

“그들이 같이 있는 것을 보자 의심의 여지가 없었고, 나는 그 자리에서 결정했다. 같이 있는 모습이 아주 멋졌다. 둘 사이의 대비가 완벽했다. 멋진 한쌍이었다.” 이안의 말이다.

이안은 두 사람의 아내인 알마와 루린 역을 정하기 위해 20~30명의 여배우를 인터뷰했다. 당시 미셸 윌리엄스는 아직도 ‘도슨의 청춘일기’의 젠 린들리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고 있을 때였다. 윌리엄스는 남편의 게이 연애를 알게 되는 에니스의 아내 알마 역으로 오디션을 본 여배우들 중 하나였다. 윌리엄스는 이안과 만날 때 자신이 몬태나 출신인 걸 강조했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었다.

“미셸이 걸어 들어올 때 나는 ‘됐어.’ 했어요. 대본을 읽기도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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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해서웨이는 원래 알마 역으로 오디션을 봐달라고 요청 받았지만, 자신이 다른 것에 끌림을 느꼈다. “’알마는 내 역할이 아닌데- 난 루린이야.’라고 생각했던 게 기억나요. 올해 아웃 지에 한 말이다.

해서웨이는 당시 ‘프린세스 다이어리 2’를 찍고 있었고, 메이크업을 하고 ‘커다란 공주 머리’를 한 채 점심 시간에 오디션을 봐야 했다. 이안은 그녀가 자기 모습 때문에 여러 번 사과했다고 말하지만, 해서웨이는 자신있고 차분헀으며 집중했다고 기억한다.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았다.” 나중에 아웃에 한 말이다.

“그녀는 당시에는 누가 봐도 당연한 선택은 아니었지만, 대본을 읽고 나자 확실해졌다.” 이안의 말이다.

네 명의 주연 – 레저, 질렌할, 윌리엄스, 해서웨이 – 모두 20대 초반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이를 훨씬 넘어서는 성숙함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정말 젊었는데 무서울 정도로 잘했다. 너무 잘해서 나는 정말 무서웠다.” 이안의 말이다.

제작자들은 영화를 단편 소설의 무대가 된 와이오밍 주에서 찍으려고 했지만, 곧 이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몬태나도 살폈지만 거기 역시 적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캐나다 앨버타 주의 캘거리 주위에서 찍기로 했다. 그 선택에도 나름의 어려움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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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양. 그게 제일 어려웠어요.” 이안의 말이다. 그는 양들이 흐르는 개울에서 물을 마신다는 말을 듣고, 그 장면을 찍으려고 시간을 많이 썼다. 양들은 물을 마시지 않았고, 이안은 찍지 못했다. 양은 고여 있는 물을 마시는 걸 좋아한다는 걸 그는 알게 되었다. “몰라요! 난 카우보이가 아니에요.” 이안은 웃으며 말했다.

앨버타 야생 동물 관리 당국은 큰 뿔 달린 양, 야생 염소들이 있을 수 있는 고산지대에 길들여진 양 수백 마리를 데려오지 못하게 했다. 양들이 기관지 질병을 퍼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양에겐 이 병이 해가 되지 않지만 야생 동물이 걸리면 죽을 수도 있다. 공동 프로듀서 스콧 퍼거슨의 설명이다. 이 영화의 상당 부분이 두 남자가 양을 돌보는 것이기 때문에 이건 문제였다.

결국 야생 동물 관리 당국은 다른 산들에서 멀리 떨어진 산 한 곳에서만 촬영을 하게 해주었다. 매일 양 마리 수를 세고, 양을 촬영장에 몰아왔다가 다시 몰고 가고, 당국이 지정한 야생 동물 생물학자가 촬영팀이 규칙을 지키는지 감시한다는 조건이었다.

이 영화의 예산은 적었지만 – 샤머스는 “1,500만 달러보다 한참 아래였어요.”라고 말했다 – 제작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촬영장에 보기 드문 동지애가 있었다고 기억한다. 샤머스는 그게 제작자 마이클 하우스만 덕분이었다고 한다. 샤머스와 이안은 그를 애정을 담아 ‘안 랭글러’라고 부른다. [주:안은 이안의 안. 랭글러는 카우보이란 뜻이다]

“마이크는 여름 캠프 같은 느낌이 나는 환경을 만들어 낼 수 있어요. … 여름 캠프와 서바이벌 훈련이 섞인 것 같은 곳.” 샤머스의 말이다. 하우스만은 이 영화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보다 대자연에 대한 경험이 훨씬 더 많다. 그는 자기 목장이 있고, 원작 단편 소설의 배경 시대와 장소인 1960년대의 와이오밍에서 양을 쳤던 친구가 있다. “하우스만은 우리가 그 산에서 만들 수 있었던 환경의 진짜 대부예요.” 샤머스의 말이다.

하우스만은 이안 감독과 배우들을 위해 고급 트레일러인 에어스트림을 여러 대 빌렸고, 배우들은 친해졌다. “우리는 불가에 둘러앉아서 핫도그를 만들고 개울에서 낚시를 했어요. 아침에는 사람들이 누구는 달걀을, 누구는 커피를 들고 나와서 다같이 둘러앉았죠.”

질렌할은 자기 개를 데려왔다. 레저와 윌리엄스는 사랑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 아직도 친한 것이다. 그저 영화의 성공 때문이 아니라, 그 경험 때문에 유대감이 생겼다. 정말 특별한 시간이었다.” 질렌할이 아웃에 말했다.

“나는 이 영화를 만들기 전에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비극적이긴 해도, 사랑이 가득하다. 모두가 그걸 느꼈다. 이 영화에서 힘을 얻어 나는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안의 말이다.

제작진도 이 영화에 빠져들었다. 일주일 동안 제작진 두 명이 오사나를 찾아가 자기가 게이라고 고백했다. 그 중 한 명은 아직도 커밍 아웃하지 않았다. 잭이 에니스에게 “내가 너랑 끝내는 법을 알았으면 좋겠어. I wish I knew how to quit you.”라고 말하는 장면을 찍었을 때 제작진 몇 명이 울었던 게 기억난다고 질렌할은 말한다.

질렌할과 레저는 이 영화 전에도 친구였지만 아주 다른 배우였다. 질렌할은 즉흥 연기를 많이 했고, 레저는 체계적이고 꼼꼼했다.

“[질렌할의 즉흥 연기가] 레저로서는 가끔은 거슬렸다. 자기는 준비를 많이 해왔기 때문에, 가끔 레저를 당황하게 할 때가 있었다.” 이안의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잘 지냈고 프로다웠다. 이안의 목표치에 맞추기 위해 섹스 신을 13번 찍어야 했을 때보다 그 사실이 더 명확했던 때는 없었다. “13번째 테이크가 제일 잘 나와서 기뻐요, 내가 그들을 더 고문하지 않아도 괜찮았다는 게.” 이안이 웃으며 말했다.

오사나는 촬영장에서 해서웨이는 ‘루린 같았다’고 한다. “깔끔하고 약간 재수없지만 정말 사랑스러웠죠.” 윌리엄스는 더 조용했고 레저와 더 비슷했다. 윌리엄스는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레저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결국 2008년 초 레저의 비극적인 죽음 이전에 함께 아이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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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이 막 시작될 때, 윌리엄스는 레저와 함께 썰매를 타는 장면을 찍다가 무릎을 접질렀다. 이미 홀딱 반해 있었던 레저는 윌리엄스와 함께 병원에 가겠다고 우겼다. 하우스만에 의하면 그 부상 때문에 영화의 일부 장면들이 바뀌었다고 한다. 식탁 앞에 앉아 있거나 부엌에 서 있는 등, 초반에 윌리엄스의 움직임이 아주 적은 이유다.

잭을 떠난 뒤 격한 감정에 빠진 에니스가 골목으로 뛰어들어 주먹으로 벽을 치는 장면을 찍다가 레저도 부상을 입었다. 해서웨이는 아웃에 그게 즉흥 연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다들 기겁을 했어요. 진짜 벽이었거든요.” 하지만 이안은 계획된 것이고 벽에 패드를 대두었다고 주장한다.

그래도 피가 났다.

“벽을 정말 세게 쳤어요. 나는 저 구름이 조금 더 나아질 수 있을 것 같다, 굴러가는 잡초를 더 정확하게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하고 생각했어요. 그를 보며 욕하는 엑스트라 카우보이의 연기가 좀 오버다, 등등요. 마이클 [하우스만]은 나를 보며 ‘헛소리하지 마. 쟤 피 흘리잖아.’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히스를 봤죠 … 히스를 보고 ‘헤이, 렛츠 고, 렛츠 고.’라고 했어요. 그래서 한 번 더 찍었는데 완벽했어요. 최고의 장면 중 하나였고, 내 커리어를 통틀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예요. 모든 게 완벽해요. 예쁘고. 가슴 아프고. 물론 히스는 더 세게 쳤기 때문에 피가 더 났죠. 그 순간은 완벽했어요.”

“나중에 나는 마이크에게 말했죠. ‘이봐, 좋은 배우들은 저런 걸 좋아해. 잘해주길 바라지 않아. 가능한 한 최고[의 연기]를 끌어내주길 바라지. 히스는 그런 종류의 배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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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나는 레저가 영화를 만들면서 아주 활발하고 마음이 열려 있었다고 기억한다. 그러나 한 장면을 찍을 때는 예외였다. 잭이 죽은 뒤 에니스가 잭의 부모집을 갔다가 옷장 속에서 자기 셔츠가 잭의 셔츠 속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하는 장면이었다.

“그때 레저는 완전히 내면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그건 그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어요.” 오사나의 말이다.

“레저는 아주 조용했어요. 마지막 날이었고, 아주 길고 힘든, 어려운 촬영의 마지막 장면이었죠.” 잭의 어머니를 연기한 로버타 맥스웰의 말이다.

“우린 그 이야기를 했죠. 나는 ‘이 셔츠를 발견할 때 네게 아주 강한 영향을 주는 건 이 남자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네가 깨닫는 거야. 네가 그가 죽었다는 걸 알았을 때, 너는 네가 그를 얼마나 진정으로 사랑했는지를 알게 돼. 그 사랑은 정말로 어마어마해. 네가 이 셔츠들을 찾았을 때, 너는 네가 무얼 잃어버렸는지 발견하는 거야.’” 오사나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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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니스가 잭의 부모를 찾아가는 것은 이안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 중 하나다. “그건 억압에 대한 장면이다. 없어진 것, 그들이 못하게 막은 모든 것.” 이안이 아웃에 말했다. 잭의 조용하고 분노하는 아버지 존을 연기한 피터 맥로비는 레저 목소리의 음색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맥로비는 레저의 출연작들을 제대로 보지 않았고, 이렇게 젊은 사람에게서 그토록 강렬한 연기를 볼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를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그건 정말 … 너무나 생생하고 진짜였기 때문에, 현실의 충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목소리를 듣자 나는 내 캐릭터의 현실로 가게 됐어요. 그 목소리가 없었더라면 찾지 못했을 현실이죠.”

에니스가 자기 옷장을 열고 셔츠들과 브로크백 마운틴의 사진을 보는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던 날, 레저는 들떠서 오사나에게 걸어가 뒤에서 어깨를 잡았다. 레저는 오사나에게 영화를 조금 바꾸기로 했다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첫 테이크를 촬영할 때 오사나는 즉시 알아보았다. 두 셔츠가 바뀌어 있었다. 에니스가 셔츠를 찾았을 때는 에니스의 셔츠가 잭의 셔츠 안에 있었다. 지금은 잭의 셔츠가 애니스의 셔츠 안에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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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엔 정말 정말 영리했어요.”

“이 영화의 뒤에 숨은 힘 전체를 다 가지고 있었죠. 굉장히 강렬했어요.” 맥머티도 동의한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2005년 12월 9일에 미국 일부 극장에서 개봉했다. 오사나가 처음으로 단편 소설을 읽은지 약 8년 정도 뒤였다. 이 영화는 제작에 참여한 그 누구의 상상도 뛰어넘는 성공을 올렸다. 1,500만 달러 미만의 제작비로 만든 영화가 미국에서만 8,3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다. 2006년 아카데미 상에는 그 해 그 어느 영화보다 많은 8개 부문에 후보로 올랐고, 감독상, 영화음악상, 각색상을 받았다. 작품상을 ‘크래시’에게 뺏긴 것도 유명하다.

하지만 관계자들 중에는 이 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해석에 실망한 사람들도 있었다. 샤머스와 오사나는 이것을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닌, 무엇보다 동성애 혐오에 대한 이야기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양성애자인지를 놓고 입씨름을 하기도 해요. 그게 무슨 상관이죠? 이들은 서로 사랑에 빠진 두 남성이에요.”

원작 단편을 쓴 프루는 영화가 나온 뒤 특히 짜증이 났다. 몇 년 뒤 파리 리뷰에 그 이야기를 아예 쓰지 않았다면 좋았을 거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특히 남성들이 그 이야기를 보고 싶어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이야기가 잭과 에니스에 대한 게 아니라는 걸 이해를 못 해요. 이건 동성애 혐오에 대한 거예요. 사회적 상황에 대한 거라고요. 장소와 특정 사고 방식과 도덕에 대한 겁니다. 그걸 도대체 이해를 못해요.”

하지만 이 영화의 영향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맥스웰은 자신이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 흐느끼고 있는 자기가 모르는 남자를 달래주었다고 한다. 맥로비는 전세계 팬들에게서 이 영화를 보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는 편지를 받았다.

“나는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의미를 가졌다고 생각하고, 분명 내 자신에게도 그렇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이 이 영화를 생각하고 있어서 기뻐요.” 이안의 말이다.

사회적 지형은 그 뒤 10년 동안 크게 바뀌었다. 미국인들은 LGBT 커뮤니티를 더 잘 받아들인다. 6월에 대법원은 동성 결혼이 헌법에 부합하며 합법이라고 판결했다. 두 게이 카우보이에 대한 영화인 ‘브로크백 마운틴’이 이런 변화에 역할을 했는지는 누구에게 묻느냐 따라 다른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음, 내가 질문을 하나 할게요. 10년이 지난 지금, ‘크래시’에 대한 기사를 쓰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본인도 동성애자인 맥스웰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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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핑턴포스트US의 'Brokeback Mountain,' 10 Years On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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