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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5일을 기억하는 방법

애초 신고한 집회 장소는 서울광장 내부에 그쳤다. 그러나 주최 측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많이 온 시민들은 광장 안에만 있을 수 없었다. 시민들은 서울광장을 둘러싼 동쪽과 남쪽 도로까지 나아갔다. 행진이 끝난 후 마무리 집회가 열린 대학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혜화동로터리까지 자리를 차지했고, 더 많은 차로를 집회장소로 사용했다. 이를 위해 경찰은 집회 참가 시민의 규모에 맞게 폴리스라인을 이동시키고 차량 흐름을 조정했다. 불상사가 없었을 뿐 아니라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필요한 공간을 더 확보함으로써 그만큼 편하고 자유롭게 집회·시위의 권리를 행사했다.

  • 박근용
  • 입력 2015.12.10 05:51
  • 수정 2016.12.10 14:12
ⓒ연합뉴스

평화집회를 넘어 시민의 권리를 행사한 12월 5일

2차 민중총궐기와 백남기 농민 쾌유기원 범국민대회가 동시에 치러진 12월 5일 집회는 복면퍼레이드, 백남기 선생 가족의 애틋한 인사, 차벽이 없는 가운데서 평화롭게 행진을 한 5만명 군중의 모습이 두드러졌다. 이 모습들은 집회 참가자들에게 서로에 대한 신뢰감과 자긍심을 느끼게 했고, 위축되었던 자신감을 되찾게 해주었다. 집회 준비 과정에 참여한 나로서는 '성공적'인 집회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 성공적인 집회가 열린 12월 5일을, 충돌과 갈등의 날로 기록·회자되고 있는 11월 14일과 대비해 평화적 집회의 날로만 거론하는 것은 경계할 일이다. 우리는 이날을 민주주의의 필수요소인 집회·시위를 자유롭게 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 정부의 시도가 좌절된 날, 시민들이 그 소중한 권리를 행사한 날로 기억하고 말해야 한다. 아래는 그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시민의 권리를 행사하기까지 험난했던 열흘

'11·14 민중총궐기' 집회를 주최한 '민중총궐기본부'의 주요 단체인 전국농민회총연맹은 12월 5일에 서울광장에서 집회를 열겠다고 11월 26일에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은 폭력집회가 명백하다며 28일에 금지통고를 했다. 29일 백남기범대위('백남기 농민 쾌유와 국가폭력 규탄 범국민대책위원회')가 서울광장에서의 백남기 농민 쾌유기원 등 범국민대회 집회신고를 냈다. 경찰은 이 집회도 다음날 금지통고했다. 이유는 백남기범대위 참여단체들이 민중총궐기본부와 겹친다는 것이다. 정부 당국은 이렇게 '한곳에 모여 목소리를 낼' 시민의 권리를 부정했다.

백남기범대위는 바로 그날 서울행정법원에 집회금지통고의 집행을 정지시켜달라는 소장을 제출했다. 그리고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에 연락했다. 시민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을 마련하는 데 노력해달라고. 다음날(12월 1일) 아침, 환경운동연합과 여성단체연합의 공동대표, 참여연대 사무처장, YMCA전국연맹 정책국장 등 연대회의 운영위원회 주요 구성원들이 모였다. 결론은 명쾌했다. '집회와 시위의 권리를 무시하는 정부에 맞서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다. 평화시위를 하려는 시민들이 모이는 공간을 만들자.' 연대회의는 그날 오후 경찰에 5일 서울광장 집회개최를 신고했다.

백남기범대위도 민중총궐기본부도 연대회의도 집회신고 다음날 밤까지 낙관적인 분위기였다. 집회가 금지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는 소식을 경찰로부터 전달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침이 되자 상황은 바뀌어 있었다. 경찰 수뇌부의 판단이 바뀐 것은 청와대의 지시 때문임이 분명했다. 3일 낮 경찰이 집회금지를 통고했다. 이유는 연대회의가 집회신고를 내기는 했지만 실제 집회 주최는 민중총궐기본부이며, 폭력시위가 벌어질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경찰을 앞세운 정부는 누가 집회신고를 내도 서울광장에 정부를 규탄하는 시민들이 모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오후 6시, 법원으로부터 극적인 소식이 나왔다. 경찰이 백남기범대위 주최 집회를 금지한 것은 위법하다는 결정이었다. 너무나 당연한 결정이지만, 주권자인 국민이 정부에 제대로 '한 방' 먹였으니 모두가 환호했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행사하며 광장에 나와 목소리를 내려는 주권자들의 행동을 막으려던 정부 당국의 시도는 이렇게 실패했다.

시민과 정부가 경험한 중요한 과정

이렇게 험난한 과정과 우여곡절을 거쳐 집회가 열린 12월 5일, 5만명에 이르는 시민이 집회·시위의 권리를 실제로 제대로 행사했다. 특히나 좁디좁은 공간에 갇히지 않고 집회에 자유롭게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집회·시위의 권리는 집회 장소에 대한 제약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포함한다. 이는 집회에 참가하려는 시민들이 예상치보다 많으면 그만큼 더 많은 공간을 집회장소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것도 포함한다.

애초 신고한 집회 장소는 서울광장 내부에 그쳤다. 그러나 주최 측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정도로 많이 온 시민들은 광장 안에만 있을 수 없었다. 시민들은 서울광장을 둘러싼 동쪽과 남쪽 도로까지 나아갔다. 행진이 끝난 후 마무리 집회가 열린 대학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혜화동로터리까지 자리를 차지했고, 더 많은 차로를 집회장소로 사용했다. 이를 위해 경찰은 집회 참가 시민의 규모에 맞게 폴리스라인을 이동시키고 차량 흐름을 조정했다. 불상사가 없었을 뿐 아니라 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필요한 공간을 더 확보함으로써 그만큼 편하고 자유롭게 집회·시위의 권리를 행사했다.

그래서 이날은 집회·시위의 권리를 시민들이 행사한 날이자 그 권리가 보장된 날로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이날은, 집회·시위의 자유와 권리를 행사하려는 시민들이 있을 때, 정부가 해서는 안될 일과 해야 할 일을 보여준 날이다. 12월 5일 집회까지의 열흘과 당일의 상황을 구구절절 적은 이유다.

* 이 글은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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