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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사람이다 | 갑을관계의 경제학

직장에서 상사에게 푸대접을 받는 노동자가 소비자의 위치에 설 때는 더 취약한 계층에 속한 마트의 노동자와 텔레마케터 노동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원풀이를 합니다. 노동자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되면 정규직은 비규정규직에게, 같은 비정규직이라 해도 대기업의 직원이 하청기업의 직원에게 갑질을 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나와 타자의 관계가 갑을의 틀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김재수
  • 입력 2015.12.10 06:57
  • 수정 2016.12.10 14:12

지난 여름, 논문 발표를 위해 어느 연구원을 방문했습니다. 경제학에서 주인-대리인 관계라 부르는, 갑을 사이의 계약에 대한 논문입니다. 직업병이겠지만, 어디를 가도 갑을의 서열 관계가 눈에 들어 옵니다. 석사 출신인 연구원은 복도에서 박사 출신인 연구위원을 만나면, 목례를 하고 살짝 길을 내주듯 걷습니다. 모두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제 눈에는 생경합니다. 미국 문화에서는 교수와 학생도 친구처럼 인사를 나누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교수님이라 부르면,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 보곤 했습니다. 미국 대학에서는 교수님이라는 호칭을 자주 듣지 못합니다. 한국에서는 저의 직업을 아는 모든 이들이 저를 교수님이라 불렀습니다. 한국을 방문하던 첫 일주일 동안 들은 교수님 호칭은 지난 6년 동안 들은 것보다 많았습니다. 방문했던 학교의 학생들은 자기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닌데, 제게 목례를 하고 교수님이라 불렀습니다. 어색하고 민망했습니다. 이렇게 겸손을 떨고 싶지만, 실제로는 우쭐한 감정을 즐겼습니다. 마트에 가면, 주차요원은 허리를 깊게 숙이고 인사를 합니다. 패밀리 레스토랑에서는 무릎을 끓고 주문을 받습니다. 어디를 가도 우쭐하는 마음이 불쑥불쑥 솟아 올랐습니다.

갑을 게임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연구를 해왔습니다. 독재자 게임에서 실험 참가자는 갑과 을로 나뉩니다. 갑은 십만원의 돈을 갖고 있고, 이 중 얼마를 을에게 줄 것인지 선택합니다. 을은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갑은 독재자이고, 을은 갑의 결정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경제적 인간이라면, 갑은 한 푼의 돈도 을에게 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갑이 얼마의 돈을 을에게 준다면, 이타심이 어느 정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실험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약 60% 정도의 갑은 을에게 돈을 나누어 주었고, 평균 액수는 대략 가진 돈의 20%, 이만원 정도였습니다. 오랫동안 경제학자들은 인간의 이기심을 찬양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이타적인 면이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연구자들은 독재자 게임을 다음과 같이 조금 바꾸어 보았습니다. 을은 만원을 이미 갖고 있습니다. 갑은 본인이 가진 십만원 중에 일부를 을에게 줄 수도 있고, 또는 을이 지닌 만원 중 얼마를 마음껏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을은 여전히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갑이 앞서보다 조금 주지 않겠냐고 예상합니다. 흥미롭게도 앞서의 독재자 게임에서 돈을 나누던 다수의 갑들이 변형된 게임에서는 을의 돈을 빼았습니다.

이처럼 돌변하는 이유는 프레임이 우리의 의사 결정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행동경제학은 이를 프레이밍 효과라 부릅니다. 독재자 게임에서 실험 참가자들은 이타심을 평가받는다는 인식을 하고, 그에 순응합니다. 빼앗기 게임에서는 빼앗는 행위가 허락되었기 때문에, 죄책감 없이 상대방의 돈을 빼앗는 결정을 합니다. 빼앗는 행동이 허락되지 않았다면, 조금만 주고 말았을 수도 있습니다. 갑의 욕망은 갑질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서는 순간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는 지적입니다. 을의 위치에서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과잉 친절이 제공되고 갑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면, 갑질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기 쉽지 않습니다. 갑을 관계 자체가 구조악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직장에서 상사에게 푸대접을 받는 노동자가 소비자의 위치에 설 때는 더 취약한 계층에 속한 마트의 노동자와 텔레마케터 노동자에게 같은 방식으로 원풀이를 합니다. 노동자들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되면 정규직은 비규정규직에게, 같은 비정규직이라 해도 대기업의 직원이 하청기업의 직원에게 갑질을 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나와 타자의 관계가 갑을의 틀로 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복도에서 상사를 만나면 비켜가는 모양으로 걸어야 하고, 마트에 들어서는 손님에게 배꼽 인사를 해야 하고, 식사 주문을 하는 손님 앞에 무릎을 끓어야 합니다. 이런 틀은 우리를 갑질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함께 왼쪽 뺨을 돌려댑시다

동아에코빌아파트 주민들이 경비원들과의 계약서에서 갑을이라는 표현 대신 동행이라는 표현을 써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도시락 업체인 스노우폭스 대표는 <공정 서비스 권리> 안내문을 가게 앞에 붙여 두었습니다. "우리 직원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시면 고객을 내보내겠습니다." 부산의 한 아파트 경비원이 아침 출근길에 90도 인사를 하는 것이 논란이 되자, 한 학생이 부끄럽다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독재자 게임과 빼앗기 게임이 보여준 것처럼, 이런 일들은 작지 않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성서의 예수는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라"고 가르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문맥 속에서 살펴 보면, 다르게 해석되어야 옳습니다. 당시 지중해 문화권에서 오른손의 손등으로 오른 뺨을 때리는 것은 신분이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경멸하듯 혼을 내는 행위였습니다. 로마인이 유대인에게, 주인이 종에게, 즉 갑이 을에게 모멸감을 일으키며 훈계를 하는 상황입니다. 이 때 왼쪽 뺨을 돌려 대는 것은 을이 갑에게 당당히 맞서는 행위입니다. 오른손의 손등으로 왼쪽 뺨을 때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왼쪽 뺨을 돌려대며 나는 당신의 똘마니가 아니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비폭력적 저항을 통해 스스로의 존엄성을 지키겠다는 의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을일 수밖에 없습니다. 함께 왼쪽 뺨을 돌려대며 연대해야 합니다. 배꼽 인사를 하는 주차 요원을 보면, 마트의 점장에게 항의를 합시다. 무릎 끓는 서버를 보면, 레스토랑 지배인에게 항의를 합시다. 우리 모두는 주눅 들지 않고 살아야 하는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갑질하지 않고 살아야 하는 따듯한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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