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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햇볕과 밤 사이, 무진의 안개 같은...

갈대숲에서 길을 잃었다. 목적지인 순천문학관의 나지막한 초가지붕이 지척에 보이는데 차는 후진하기도 힘든 농로 사이를 몇 바퀴째 맴돌고 있었다. 실뱀처럼 뻘밭 위를 가늘게 휘도는 개울에 막혀, 길은 턱없이 우회하거나 뜻하지 않은 곳에서 끊어졌다. 내비게이터도 무용지물이었다. 차를 버리고 걷기로 했다. 건물이 가까이 보이니 금방 닿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사람 키보다 높은 갈대숲에 막상 들어서니 시야가 갇혀서 방향을 가늠할 수 없었다. 물과 땅과 하늘이 하나로 만나는 곳, 안개가 없는데도 무진(霧津)은 아득했다.

1960년대 가장 빛나는 문학으로 손꼽히는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1980년 5·18 직후, 동아일보에 <먼지의 방>을 연재하다가 돌연 중단하고 절필한 이후, 그의 근황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긴 투병에 들어선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그가 요즘, <무진기행>의 실제 배경이자 그의 고향인 전남 순천에 지어진 ‘김승옥 문학관’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언어를 잃었다. 말로 진행할 수 없는 인터뷰가 어디까지 가능할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내려가 보기로 했다. 전설 속의 작가 김승옥을 직접 대면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설레는 일이었다.

김승옥은 우리 문단의 기린아였다. 대학 2학년 때 <한국일보>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생명연습>이 당선되어 등단한 뒤, <무진기행><서울, 1964년 겨울><염소는 힘이 세다><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만 24살에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김승옥을 일컬어 시인 김지하가 “감수성의 일대 혁신이었고 문장의 일대 파격이었다. 아무리 날고 기는 재주꾼들도 그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고 회고할 만큼 그는 한국 문학의 빛나는 전환점이었다. 그는 왜 붓을 꺾고 문단을 떠났으며, 언어를 잃은 뒤 어떻게 살았을까?

갈대숲을 헤치고 마침내 김승옥 문학관 앞에 도착했을 때, 그는 문학관 안에 없었다. 잠시 후 전갈을 받고 그가 나타났다. 검은 바지에 검은 점퍼를 입은 머리 희끗한 노인이 멀찍이서 다가왔다. 김승옥(74) 작가의 걸음걸이에서 뇌졸중의 병력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건강해 보였다. 뇌졸중으로 반신이 마비되거나 보행이 어려웠던 적도 없었다고 했다. 오로지 그는 한 가지만 잃었다. 언어능력. 작가에겐 그 한 가지가 모든 것이지만.

김승옥 선생이 순천문학관 안에 있는 집필실에서 컴퓨터로 원고를 정리하고 있다.

“별”

김승옥 문학관은 2010년 지어졌다. 순천만자연생태공원의 한편에 지어진 두 동짜리 초가집에서 기역 자로 이어진 건물엔 그의 문학생애를 한눈에 보여주는 육필 원고와 사진 자료, 동영상이 전시되고 전시관 옆에 딸린 작은 방에 그가 기거한다. 원래 주거용으로 지어진 건물이 아니다 보니 그를 위해 바닥에 전기 패널을 깔고 별채에 샤워실을 만드는 등 순천시에서 급히 개조를 하긴 했지만, 살림을 하며 살기엔 턱없이 조촐하고 옹색해 보였다.

부인과 두 아들은 서울에 살고, 김승옥 혼자 주말 무렵엔 여기 머물다가 주중엔 재활치료를 위해 서울로 올라가는 두 집 살림을 하고 있다. 해가 저물면 생태공원 직원들도 퇴근하고 텅 빈 갯벌 습지에서 그 혼자 밤을 맞이한다. “민가에서도 외따로 떨어져 있어 적적하지 않으냐?”고 물으니 그가 주섬주섬 점퍼 안주머니에서 필기구를 꺼내 쪽지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별”

-별이요?

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하늘을 향해 양팔을 벌려 반원을 그렸다.

-별이 많다고요?

“응! 하하하….”

-별이 많아서, 외롭지 않다고요?

“응, 많어….(웃음)”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그의 방은 잡동사니가 많아 너저분하니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식사는 어떻게 해결하시냐?”고 물으니 혼자서 끓여 먹거나 밖에 나가 사 먹는다고 했다.

-작가 이름으로 된 문학관에 작가가 직접 기거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여기 오는 관람객들은 작가를 직접 만날 수 있으니 큰 영광이겠습니다. 지내는 데 불편하진 않으세요?

“아니, 아니….”

김승옥 선생은 백지에다 단어들을 나열하며 인터뷰어인 이진순씨와 필담을 나눴다.

김승옥 선생은 백지에다 단어들을 나열하며 인터뷰어인 이진순씨와 필담을 나눴다.

그가 백지 여러 장을 챙기더니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씨는 반듯한 편이었지만 쓰는 속도는 더디고 펜은 종종 겉돌았다. 명사는 떠오르는데 그것들을 연결하는 조사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문장의 형태가 아니라 간단한 명사와 기호, 화살표로 이어진 필담이 진행됐다.

우리 일행이 그와 얘길 나누며 문학관 앞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걸 보고는, 한 무리의 여성 관람객들이 다가서며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 작가님인가봐….”

그는 싫은 기색 없이 관람객들이 청하는 대로 사진을 함께 찍었다. 독자라며 반가워하는 이들에게 사인을 해주거나 같이 사진을 찍는 일이, 그의 이즈음 일상에선 가장 큰 즐거움인 것 같았다.

-오랫동안 소식이 뜸해서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2003년 뇌졸중 → 전세 X”

-네네…. 2003년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고요. (X를 가리키며) 이건 무슨 뜻이죠? 전세가 없다고요?

“아, 음….”

그가 쉽게 말을 이어가지 못하자, 문학관 개관 때부터 담당 해설사로 오랫동안 선생을 보필해온 조성혜씨가 옆에서 얘길 거들었다.

“전세가 있었는데 편찮으셔서 병원비, 치료비로 다 없어졌다는 말씀이세요.”

하려던 말이 바로 그 말이었다는 걸 확인해주려는 듯, 그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뇌손상 때문에 재활치료를 오래 받으셨다고 하던데.

“지금도, 지금도….”

-지금도 치료를 받고 계시다고요?

(끄덕끄덕)

-그래도 혈색은 참 좋고 건강해 보이세요.

대답 대신 그는 반듯하게 가로세로 줄을 긋더니 그래프를 그렸다. 2003년 0에서 시작해서 2015년까지 사선으로 올라가는 직선을 그리고, 가운데 2010년을 표시했다.

“(2003년 0점을 가리키며) 아무것도….”

-2003년엔 아무것도 못 했는데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요?

“조금씩 조금씩.”

-근데 왜 2010년이 분기점이 돼요? 아! 여기 김승옥 문학관이 개관한 때로군요.

“(웃으며) 응!”

-문학관이 선생님께 큰 위안이 됐나 봐요.

“(‘말, 글, 친구들’이라고 적으며) 친구가 없어. 혼자, 혼자….”

말도 글도 잃고 친구도 없이 혼자 견뎌내는 시간은 얼마나 가혹했을까. 허허벌판에 시설도 옹색한 외딴집이지만 그가 거기 머무는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빨치산 아버지, 유복자 여동생의 죽음

김승옥은 본래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지만 해방이 되던 해 어머니의 고향인 전남 순천으로 이주했다. 아버지 김기선은 니혼대학 법학과를 다니던 유학생이었고 어머니 윤계자는 오사카에서 제법 자리잡은 한약방집 딸이었다. 순천으로 돌아온 뒤 군청 과장으로 근무하던 아버지는 그가 일곱살 되던 1948년에 집을 떠나셨다.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난 해였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으세요? 뭐가 제일 기억나세요?

“(필담으로) 1948년 순천남초등학교 1학년.”

-네. 선생님이 초등학교 1학년 때요….

“(필담으로) 아버지 → 공산당.”

-아버지가 공산주의자였다고요?

“어.”

그는 다시 종이에 ‘1948. 이승만’이라고 쓰고는 연이어 ‘4월 제주, 10월 여순’이라고 적었다. 뇌손상과 함께 언어능력은 상당 부분 상실했지만 김승옥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기억력은 정확했다. 1948년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제주 4·3 봉기가 일어났고, 여수와 순천지역에 주둔해 있던 국군14연대에 제주도 진압 명령이 떨어지자 이에 반대하는 남로당계 장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셨는데….

“아니, 그때….”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려 하자 그가 말허리를 잘랐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듯했다. 그는 부지런히 몇 개의 지명과 식구들 이름, 화살표를 그리기 시작했다. 내용을 간추리자면 이렇다. 1948년 11월에 아버지와 할머니, 어린 승옥이 함께 광양까지 걸어가다가 할머니와 승옥은 광양으로 가고, 아버지는 ‘산’으로 가셨다.

-산이라고요? 아버지가 입산해서 빨치산이 되었다고요?

“어, 그래….”

그게 아버지와의 마지막 작별인사였다. 6·25가 터지고 7월에 광주가 인민군에 점령당했을 때 낯선 여자 하나가 김승옥의 가족을 찾아왔다. 자신은 1950년 4월까지 아버지의 비서였다고 하면서. 그들 일행이 월출산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도중에 경찰과 마주쳐서 총격전이 벌어졌는데 거기서 자기 혼자 살아남았다고 말했다.

-아버지는요?

그는 월출산 옆에 괄호를 치고 ‘사망’이라고 적었다.

-그때 월출산에서 돌아가셨다고요? 그럼 유해는 찾았나요?

“못 했지, 지금도….”

-아버님이 돌아가실 때 그럼 몇 살이셨죠?

“서른…셋.”

아버지가 입산할 때 어머니는 임신 중이었다. 김승옥의 막내 여동생 혜경은 유복자로 태어났고, 어머니는 형사의 닦달을 피해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삯바느질로 4남매를 부양했다. 어머니가 일하러 나간 동안, 어린 여동생을 업고 먹이고 재우는 건 온전히 맏아들인 승옥의 몫이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돌보던 여동생이 세살 되던 해 갑자기 죽었다. 김승옥이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엄마는 일 나가서 부재중이었고, 병원에 데려갈 돈도, 의지할 어른도 없던 소년은 열이 펄펄 끓어 죽어가는 동생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린 마음에 참 상처가 컸겠어요.

“그럼.”

그는 ‘교회’라고 썼다.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다고 했다. 교회에 앉아, 세상 떠난 아버지와 누이를 위해 기도했다. 어린 소년의 마음에, 서른셋 창창한 나이에 세상을 등진 아버지나 약 한번 못 쓰고 보내버린 여동생의 죽음은, 신이 아니라면 마땅히 호소할 곳도 없는 깊고도 내밀한 상처였다.

20대에게 권하고 싶은 작품은 <무진기행>

그런 상처 속에서도 김승옥은 반듯하고 총명한 소년으로 성장했다. 순천중과 순천고를 졸업하고 1960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했다.

-어머님의 기대가 컸겠어요. 어머니가 맏아들에게 특별히 당부하던 게 있었나요?

“(필담) 고등학교-의사.”

-고등학교 때, 의사 되라고 하셨다고요?

“어.”

그는 의사 옆에 ‘법관’이라고 적더니 법관 위에 가위표를 그었다.

-의사는 되고, 법관은 되지 말라고요? 선생님은 법관이 되고 싶었는데요? 왜요?

“아…버지.”

-아! 아버지가 법학과였지요. 아버지처럼 될까봐 안 된다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껄껄 웃었다. 불문과에 지망한 건 ‘의사’와 ‘법관’의 타협안으로 ‘외교관’이 될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 그는 곧 문단의 샛별로 떠올랐다. 1962년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염무웅, 김현, 최하림 등과 동인지 <산문시대>를 발간했다.

아내 배혜욱과. 1964년 9월 연애를 시작해 1967년 11월에 결혼했다.

대학 4학년이던 1964년. 오른쪽은 연극연출가인 친구 오태석.

아들 융세와 융태가 각각 6살, 4살이던 때. 태능놀이동산에서 찍었다.

오래전 한강에서 찍은 사진. 제일 왼쪽이 소설가 이청준, 그 옆이 동화작가 윤구병이다.

김동리, 이상, 황순원 등 이전 시기의 문인들이 일제강점기에 교육받은 세대인 데 비해, 김승옥을 포함한 김지하, 이문구, 이청준, 박태순 등 4·19세대는 한국어를 국어로 배우고 한국어로 사유하는 온전한 한글세대였다. 1990년대 젊은 세대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에 열광한 것 이상으로 1960년대 젊은이는 김승옥의 감각적이고 세련된 문체에 열광하고, 초기 산업화 시기, 부패한 부르주아와 소외된 인간군상을 다루는 김승옥의 주제의식에 공명했다.

-<김승옥 전집>서문에서 “1960년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내가 써낸 소설들은 한낱 지독한 염세주의자의 기괴한 독백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내가 ‘60년대 작가’임을 스스로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에게 1960년대란 어떤 의미입니까?

내 질문에, 그는 ‘1960-1970’이라고 쓰고 그 아래 ‘이승만-박정희’라고 썼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4·19를 맞았고 이듬해 5·16을 맞았다. 당시의 단상을 그는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다.

대학 1학년 때 4·19에 참가했던 나로서는 그 다음해 5·16 쿠데타를 당하면서 우리나라가 동남아시아나 남미 정도로 정치적 후진국에 불과했던가 하는 허탈감을 가슴 아프게 느꼈었다. 경제적으로는 비록 가난하지만 우리 국민의 정치의식만은 선진 민주주의 국민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 왔었는데 군대가 하루아침에 조용히 민주주의를 박살내 버리는 것을 보고 깊은 열등감을 느꼈었다.(<내가 만난 하나님>중에서)

-선생님이 쓰신 작품의 대부분은 20대 청년기에 발표된 것들입니다. 요즘 20대한테 ‘이거 한번 읽어볼래?’ 하고 권하고 싶은 작품을 하나만 고르라면 뭘까요?

망설이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한참 만에 그가 대답을 적었다. “무진기행.”

-<무진기행>이요? 왜 그렇습니까?

“(필담으로) 안개.”

-안개라고요? 안개가 상징하는 게 뭐죠?

“(‘안개’ 아래 양 갈래 선을 긋고) 햇볕, 밤.”

-안개가 ‘햇볕과 밤의 중간지대’란 뜻입니까?

“음.”

-그래서 세월이 지나고 보시니 어떻습니까? 우리의 1960년대는 햇볕으로 갔습니까? 밤으로 갔습니까?

“(‘햇볕’과 ‘밤’이 X자로 교차하는 표시를 하며) 똑같애, 똑같애….”

-햇볕이기도, 밤이기도 했다고요?

“음.”

<무진기행>의 주인공 윤희중은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 같은 무진의 짙은 안개 속에서, 속물적 삶에 환멸을 느끼면서도, 처갓집의 후광을 업고 승진하는 길을 뿌리치지 않는다. 속물성에 대한 혐오와 속물적 욕망의 줄다리기 속에서 무진을 떠나 다시 상경하는 주인공의 자괴감은, 어쩌면 김승옥 자신의 고백이자 4·19세대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가는 것을, 유행가를, 술집 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무진기행>중에서)

김승옥의 문학인생은 길지 않았다. 김승옥은 혜성처럼 등장하고 혜성처럼 문단에서 멀어졌다. 1966년 25살 때 <무진기행>을 각색한 영화 <안개>의 시나리오를 집필하게 된 것을 계기로 그는 소설보다는 시나리오 작업에 열중했고 1970년대 대중적 성공을 거둔 <어제 내린 비><영자의 전성시대><겨울여자><도시로 간 처녀>등 일련의 영화 각본을 썼다. 소설에서 영화로 방향을 바꾼 이유에 대해서 그는 “소설 가지고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고 영화 쪽이 더 소질에 맞는 것 같아서”(<내가 만난 하나님>에서)라고 고백한 바 있다.

박정희나 김지하, 혹은 그 모두

30대의 그는 순수문학보다는 돈 되는 쪽을 택했다. 어쩜 그것이 그가 무진기행에서 말한 “한정된 책임 안에서만 사는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 와중에도 대학 동창이며 친한 벗이었던 김지하가 유신정권을 풍자한 일로 잡혀 들어가자 그를 위해 문인들을 모으고 김지하를 위한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쓰신 글 중에 “내게 1970년대는 박정희 대 김지하의 전쟁 기간이었다”라는 대목이 있던데요.

“그래, 그래… (필담으로) 김지하 → 장준하 → 김구.”

-이 흐름이 장준하와 김구로부터 흘러나온 거란 말씀이죠?

“어.”

김지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김승옥은 ‘그 전쟁’에서 온전히 김지하의 편이었을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 한국인들은 내 생각으로는 모두 그 두 진영(박정희-김지하)의 어느 한쪽에 속해 있거나 아니면 그 두 진영 모두에 속해 있었다. 1970년대는 참으로 처절한 갈등의 시대였고 그래서 위대한 시대였다.(<김승옥 전집>서문 중에서)

-위대한 시대였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필담으로) 박정희 경제 O 박정희 문화 X.”

-경제적으로는 잘했는데 문화 면에선 문제가 있었다고요?

“응. (필담) 선박, 자동차 O, 영화, 소설 X.”

박정희 시대에 대한 그의 평가는, 작가의 생각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평범하다. 빨치산의 아들로, 돈이 없어 죽어가는 동생을 바라보고 있어야 했던 그에게 ‘먹고사는 일’ ‘어떻게든 살아남는 일’은 그 무엇보다 엄중한 삶의 과제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김승옥의 젊은 날은 “두 진영(박정희와 김지하) 모두에 속해 있던” 시기였을 것이다.

그 이중성의 바닥을 들춰내는 게 두려워서였을까? 당시 <문학사상>주간이던 이어령의 강권에 마지못해 <서울의 달빛 0장>을 써낸 것 말고는, 70년대 내내 김승옥은 변변한 문학 작품을 남긴 게 없다. 어쩜 그것은, 당시 그가 할 수 있는 문학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을 수도 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왔을 때 비로소 그는 다시 펜을 잡고 동아일보에 장편 <먼지의 방>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되었으니 소설가인 나도 본래 내 자리로 돌아와 소설을 많이 써야겠다고 결심”(<내가 만난 하나님>중에서)하며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5·18이 터지고 그가 쓰는 소설에까지 검열이 시작되자, 그는 돌연 15회 만에 연재를 중단하고 절필했다.

그가 청년 시절 멀리했던 기독교에 본격적으로 귀의를 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술에 취해서 온 아파트가 떠나가라는 듯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부르짖던”(위의 책) 어느 날, 하얀 옷을 입은 하나님이 다가와 종교적 계시를 내리는 신비체험을 하게 되고, 이후 그는 충실한 하나님의 충복으로 살 것을 다짐했다.

-앞으로 뭐 하실 거예요?

“(필담) 소설 1, 선교 2.”

지금은 ‘1964년, 겨울’이 아닌가

-소설을 쓰고 선교를 하겠다고요?

“아니, 아니…. (두 단어를 하나로 동그라미 치며)”

-아, 소설 원고로서 선교를 하겠다고요?

“응, 응. 허허허….”

김승옥은 앞으로 소설 작업을 더 하겠다고 했지만 그가 글을 쓴다 해도, 그것은 이미 우리가 아는 김승옥이 아닐 것이다. 그가 종교에 귀의한 뒤 스스로 평가한 것처럼, 김승옥 문학은 그에게 “하나님의 자애로운 손길에 닿기 이전까지 걸어온 궤적의 일부”이며 “자기 시대의 현상과 징조를 확인하기 위해 상상력의 빛을 여기저기 들이대고 있는 젊은 작가의 모습”이다. “하나님께 이르는 골목”에 깊숙이 들어선 그에게서 60년대를 빛낸 이십대의 김승옥은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하늘과 땅과 물이 맞붙은 순천만 벌판의 외딴집으로 돌아갔다. 김지하의 표현대로 “한국 문학의 반짝이는 별”이었던 문단의 전설은, 별빛 가득한 신의 세계로 돌아갔다. 부디 강건하시기를.

김승옥을 통해 나는, 그의 세대의 한 단면을 조심스레 펼쳐본 느낌이었다. 완고함에 가려졌던 그들의 상처와, 굴종에 가려졌던 그들의 두려움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4·19와 5·16 사이에서, 박정희와 김지하의 사이에서, 햇볕과 밤 사이에서, 속물적 욕망과 속물성에 대한 혐오 사이에서, 청년의 이상과 가장의 책임감 사이에서 휘청거렸던 그들 역시 인생이 고달프고 막막했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한 시대를 마감하고 가장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한적한 노년을 보내고 있지만, 우리 앞에 펼쳐진 현재는 여전히 “안개 가득한 무진”이다. 김승옥이 그렸던 그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은, “1964년, 겨울”이다.

대담자 이진순 : 풀뿌리정치실험실 ‘와글’ 대표. 언론학 박사. 새로운 소통기술과 시민참여가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지 연구하는 것을 주업으로 삼는다. 사람 사이의 수평적 그물망이 어떻게 거대한 수직의 권력을 제어하는지, 평범한 사람들의 따뜻함이 어떻게 얼어붙은 세상을 되살리는지 찾아내는 일에 큰 기쁨을 느낀다.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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