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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유아인의 위대한 순간

  • 남현지
  • 입력 2015.12.05 06:39
  • 수정 2015.12.05 06:40

가끔 그런 배우가 있다. 이미 어느 경지에 올라 그 다음의 것을 보여주는 게 불가능할 거라 생각한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훌쩍 세간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어버리는 이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위대한 배우에겐 그런 순간이 있다. <초록물고기>에서 <넘버3>와 <접속>을 지나 <8월의 크리스마스>와 <쉬리>에 이르는 스펙트럼을 단숨에 써내려 간 1996~98년의 한석규가 그랬고, <설국열차>의 나른한 혁명가와 <관상>의 소시민 아버지, <변호인>의 각성하는 법조인을 한 해에 보여준 2013년의 송강호가 그랬다. 한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유아인에게 2015년이 그런 순간이었노라 말해도 이의를 제기하는 이는 없을 것 같다. 이미 제이티비시 <밀회>로 제 커리어를 아득한 높이로 경신하며 2014년을 보냈음에도 그는 2015년 한해 <베테랑>, <사도>, 에스비에스 <육룡이 나르샤>를 선보이는 데 성공했다. 배우의 예술적 성취를 상의 개수나 작품의 수로 잴 수야 없겠지만, 맡은 작품마다 대중의 기대치를 보기 좋게 배반하며 제 폭을 펼쳐 보이는 배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청룡영화상이 <사도>에서 주연으로 함께 호흡을 맞춘 대배우 송강호 대신 유아인에게 남우주연상을 수여한 것은 일대 사건이었지만 그조차 2015년의 그가 이룬 성취에 비하면 소소한 보답에 불과하다.

좋은 배우는 맡은 인물을 연기하지만 위대한 배우는 시대를 연기한다. 유아인은 필모그래피 내내 이젠 말라붙어버린 ‘청춘’이란 단어에 생기를 불어넣고 단어의 평면에 깊이를 더해 ‘지금 여기’의 청춘의 얼굴을 입체감 있게 그려냈다. 사람들은 종종 ‘청춘’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 희망과 가능성, 푸르름 따위의 이미지를 게으르게 반복하며 단어를 한껏 이상화한다. 유아인은 좀처럼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한국방송 <성균관 스캔들>(2010)의 재신은 시대의 모순에 한껏 짓눌려서 세상을 비웃는 염세를 도락 삼은 인물이었고, 에스비에스 <패션왕>(2012)의 영걸은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단 욕망과 동창 재혁(이제훈)에 대한 콤플렉스로 가득 차 있어 쉽게 정을 붙이기 어려운 남자였다. 유아인이 그린 청춘은 언제나 시대적 한계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 앞에서 어떤 식으로든 주눅 들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존재였다. 유아인이 연기한 ‘소년’들은 해맑고 푸르른 것이 아니라 어딘가 비릿한 내음을 풍기며 잔잔한 시공에 파열을 내는 이들이었고, 단어가 담보한 선량함을 거부하고 선과 악 사이 어딘가에서 길을 찾아 헤매는 것이 청춘의 본질임을 강변하는 이들이었다. 그의 스크린 데뷔작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2006) 속 종대가 끊임없이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정작 꿈이라고 가지고 있던 게 권총을 가지는 것이었단 점은 어쩌면 유아인의 필모그래피를 예언하는 징조였는지도 모른다.

<밀회>의 순수하지만 위험한 선재를 지나 유아인이 도달한 지점이 <베테랑>의 악인 조태오 상무와 <사도>의 광인 이선이라는 점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의미심장한 방점이다. <베테랑>의 안하무인 재벌 3세 조태오는 의문의 여지 없는 악인이어서 ‘유아인의 첫 악역’으로도 회자되었지만, 그조차도 단순한 악역이라고 보기엔 서자 콤플렉스와 제동장치 없는 성장 과정이 만나 빚어낸 후천적인 괴물에 가까웠다. 그는 여전히 사무실 장식장을 각종 피규어로 채우고 이종격투기를 즐기며 성장을 거부하지만, 필요한 순간이 되면 어른들이 알려준 ‘갑’의 얼굴을 하고 어른 흉내를 낸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이들을 앉혀놓고 자신이 살아온 이력을 이야기하거나 세상의 법칙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며 훈계하는 순간이 우습기보단 섬찟한 이유다. ‘어이’와 ‘어처구니’조차 구분하지 못할 정도의 애송이지만, 아무도 그에게 의미 있는 가르침을 주거나 제 자신을 이기는 법을 알려준 적이 없기에 그에겐 이 모든 게 너무도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 모든 결핍을 돈과 인맥으로 채울 수 있는 힘으로 감추는 법만을 배워온 조태오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본인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지 못한다. <베테랑>을 보며 조태오가 몰락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단순히 ‘사이다’와 같은 청량감만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천운에 천운이 겹쳐 일개 광역수사대 형사가 재벌 3세를 잡는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지만, 제2의, 제3의 조태오를 키워내는 왜곡된 시스템 자체가 무너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자 콤플렉스에 시달리던 조태오의 반대편에, 적자임에도 인정받지 못해 결국엔 미쳐버린 <사도>의 세자 이선이 있다. 정통성 결여라는 콤플렉스를 안고 있던 아비는 아들이 제 콤플렉스를 채워줄 완벽한 군주로 자라기를 강요했고, 소년은 따뜻한 말 한마디나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지 못한 채 계속 상처를 키우며 나이를 먹었다. 자신을 분출할 틈새 하나 찾지 못하고 삼강오륜과 군주의 덕목, 살아있는 권력인 아버지에게 사방을 틀어막힌 세자는 압박에 못 이겨 정신부터 무너진다. 세자는 이성과 윤리규범이 지배하는 유학의 세계가 아니라 한을 토해내고 원을 달래는 무속의 세계로, 쟁의와 토론으로 갈등을 풀어나가는 문의 세계가 아니라 제 앞을 가로막는 것을 베어버리는 무의 세계로 도망친다. 옷 한벌 입는 것도 어려워하다가 내관의 목을 베는 살인귀가 됐고, 생일상을 받는 어미조차 두려워 눈치를 봐야 하는 광기의 화신이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벽들로 세자를 내파했던 아비는 아들이 미치자 한 평 남짓한 뒤주 안에 아들을 가뒀고, 나를 왜 이런 존재로 키워낸 것이냐며 항변하던 세자는 세손마저도 자신과 같은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앞에서 조용히 죽음을 맞이한다.

유아인이 올 한해 선보인 청춘의 얼굴들은 악인이고 광인임에도 그들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을 멈칫 망설이게 하는 여지를 주는 것은 그런 이유이다. 김선영 평론가는 <아이즈>에 기고한 유아인 배우론에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완득이>, <깡철이>는 모두 인물들이 길 위에 선 모습에서 마무리”된다 말하며 “구속하고 억압하는 세상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찾는” 유아인의 소년성에 대해 말했지만, <베테랑>의 조태오는 감옥으로, <사도>의 이선은 뒤주로 들어가는 것으로 그 끝을 보았다. 김 평론가의 지적처럼 “내일이 없고 출구가 막힌 현실”이라는 청춘의 조건을 시각적으로 상징하는 억압들이다. 김 평론가가 예로 든 작품들은 청춘이 마침내 세상의 구속과 억압을 이겨내고 다시 질문을 던지려 더 큰 세상으로 나온 결말을 맞이했지만, <베테랑>과 <사도>는 외부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뒤틀린 이들의 결말을 그린다. 서른의 자리에 서서 20대의 필모그래피를 정리하며, 유아인은 세상에 삼키기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이 망가진 존재들의 악행까지 사회의 탓을 할 순 없으나, 이들이 이렇게 망가질 때까지 내버려 둔 세상의 책임은 누가 물을 것이냐고.

<육룡이 나르샤> 본 방영을 앞두고 전파를 탄 스페셜 영상에서, 유아인은 같이 일했던 동료들의 말을 전했다. 왜 50부작 드라마를 하느냐는 질문에 “이방원 역이에요”라고 답하자, “아, 네가 할 만한 이유가 있구나”라며 수긍했다는 말. 사방에서 조여오는 제약과 바뀌지 않는 현실 앞에서 신음하고 무너져 내리는 청춘을 연기해왔던 유아인이, 내부 모순으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한 고려를 뒤집어엎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청년 이방원을 연기한다는 것은 당연한 수순처럼 보인다. 죽은 동료를 기리기 위해 관아에 불을 지르는 분이(신세경)를 보며 ‘낭만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저 이방원이 폭력적인 인물이어서가 아니다. 권력을 키우고 학문을 익혀도 바뀔 것 같지 않은 갑갑한 세상을, 벽을 부수는 식으로 돌파해버릴 수 있단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위험하지 않으냐고? 어쩌겠는가. 그것이 방황과 내파를 거듭해온 유아인이 찾은 지금 여기 ‘청춘’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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